역사: 로마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

in #kr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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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로마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 **

이 이야기는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인 이야기” 이후의 지중해 역사를 정치적 입장이 아닌 이탈이아 민중의 입장에서 쓴 책입니다. 본서를 접하면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보다 ‘책이 말하고 싶어하는 것이 무엇일까?’라는 입장에서 가볍게 책과 대화를 하는 맘으로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다행이 이 책은 저에게 딱딱한 역사적 사실을 통해 책 자체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조금이나마 보게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항상 감탄하는 것이지만, 저자가 생각하고 준비한 사료를 중심으로 한 번 쓴 글은, 화석과 같은 역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며 수많은 사람에게 다양하면서도 인격적으로 영감과 교훈을 주기 때문에, 활자라는 말이 생기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제 마음 가운데 화려한 성공(영광) 뒤의 몰락이 얼마나 인간의 삶을 비참하게 만드는가 깊이 되새기게 됩니다. 로마의 그 찬란한 1000년의 문명이 힘을 잃고 몰락하면서 그 영향은 일반 서민의 삶에 바로 직결되어 나타났습니다. 세계의 중심이었던 로마가 무너지면서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활발한 정치 경제적 소통과 교역이 급격히 쇠퇴하고, 대중의 삶의 질은 형편없이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역 내 평화를 지킬 만한 강력한 세력이 사라지자 북부 아프리카의 이슬람교도의 (본서에서는 ‘사라센인’으로 통칭함) 해적질이 극에 달하였고, 이들에 의해 지중해 지역의 수많은 민중들이 노예로 끌려가 비참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중세시대는 600년경에서부터 1500년 사이를 말하며,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명으로는 ‘비잔틴’과 ‘이슬람’이었습니다. 동로마 제국의 직접적인 계승자인 비잔틴 문명은 그리스어를 사용했으며, 로마의 정치 전통과 기독교 신앙의 열정을 결합하고자 했습니다. 이슬람 문명은 아랍어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며, 역동적인 신흥종교로부터 정치, 문화적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서유럽의 기독교 문명은 다른 문명들에 비해 발달이 늦었습니다. 서유럽의 기독교 문명이 중세 이후 산업혁명 등을 통해 그 경쟁자들을 앞질렀던 까닭에, 서유럽의 지식인들은 최근까지도 비잔틴 문명과 이슬람 문명을 낙후되고 비합리적인 문명이라고 업신여기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7세기에서 11세기에 이르기까지 가장 뒤떨어진 쪽은 서유럽 기독교 문명이었습니다. 대략 4,5백 년에 달하는 기간에 걸쳐 서유럽은 비잔틴과 이슬람의 그늘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로마제국 멸망에 대한 역사를 저술하였던 뛰어난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비잔틴 역사를 ‘허약함과 불행의 지루하고 단조로운 이야기’라고 혹평하였습니다. 이는 일면 맞는 말입니다. 중세시대 당시 서유럽 특히 지중해 지역의 흩어진 국가의 대중들은 누구보다도 비잔틴 제국의 지원을 끊임없이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비잔틴은 이미 로마 제국의 화려했던 역사 이후에 그 명망으로 근근이 명맥만 유지해 나갔습니다.

그들은 당시 지중해 광역권을 지배하며 평화를 지킬 힘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비잔틴은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1000년이나 존속하였습니다. 그래서 에드워드 맥널 번즈(Edward McNall Burns)는 비잔틴 역사를 “허약하지만 인상적인 문명”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시오노 나나미의 중세에 대한 시대구분에는 기존 학자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중세는 후세 학자들이 붙인 명칭인데, 일단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서기 476년부터 제노바 출신의 이탈리아인인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1492년까지가 중세로 되어 있다. 하지만 고대부터 르네상스 시대까지의 ‘중간기’라 해도 실제로는 1천 년에 걸친 긴 세월이기 때문에, 보통은 이 1천 년을 서기 1000년을 경계로 ‘중세 전기’와 ‘중세 후기’로 양분한다. 이 설에 따르면 ‘중세 전기’의 지중해 세계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것은 기독교가 아니라 이슬람교도였다.

문화와 문명이라는 면에서 어느 쪽이 우월하고 어느 쪽이 열등했는가 하는 논의는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자기가 가진 힘을 최대한 활용하여 더욱 높이 향상하겠다는 의욕은 ‘중세 전기’에는 이슬람 쪽이 절대적으로 우월했다. 다만 그 의욕을 해적질에 쏟아 부은 것이 해적의 표적이 된 기독교 세계의 주민에게는 불행이었지만.”

그러나 그의 중세 시대에 대한 평가는 기존 학자들과 많이 다릅니다. 이는 그가 당시 지중해 해변국가의 일반 서민의 입장에서 역사를 이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존 역사학자들이 비잔틴과 이슬람 문명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이슬람문명이 유럽에 유입되면서 유럽의 발전에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고 인정하고 있지만, 시오노 나나미는 중세 시대의 이슬람교도들의 – 특히 아랍 본토의 이슬람교도가 아닌 북아프리카의 신 이슬람교도들의 - 실제적인 삶은 기독교 문명에 속해 있던 지중해 지역에 대한 ‘해적질’이 주된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랑고바르드족에 침략당하지 않고 비잔티움 제국 영토로 남아 있었던 것이 남이탈리아와 시칠리아다. 하지만 이들 지역에서 비잔티움 제국도 안전도 보장하지 못하면서 세금만 뜯어가는 통치 형태를 보이고 있었다. 이래서는 사라센 해적의 위협에 계속 시달리는 해안지방 주민들에게는 어디에도 희망이 없었다.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자위 수단은 바다를 널리 바라볼 수 있는 지점을 골라 망루를 세우고 해적선의 습격을 한시라도 빨리 발견하여 주민들에게 달아날 시간을 조금이라도 많이 주는 것뿐이었다………중략…….

하지만 이 ‘사라센 탑(망루)’을 아무리 지어도 해적의 노략질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사라센 해적은 검은 바탕에 하얀 해골을 물들인 깃발을 돛대에 높이 내걸고 습격해 오는 것도 아니고, 이슬람교도의 배라는 것을 보여주는 초록 바탕에 하얀 반달이 그려진 깃발을 내걸지도 않았다.

그들은 다른 기독교 국가의 깃발을 내걸거나 표적으로 삼은 지방과 동맹관계에 있는 나라의 깃발을 내걸고 접근해 오는 경우가 많았다. 망원경도 없는 시대, 접근해 오는 선방의 실체를 한시라도 빨리 알아내려고 망루 위에서 필사적으로 눈을 부릅뜨고 파수꾼의 심경을 동정하지 않을 수 없다. 중세 전기, 즉 서기 1000년 이전에 살았던 지중해 서부의 서민들은 해적에게 납치되어 평생을 이슬람교도의 노예로 살고 싶지 않으면 스스로 자위책을 강구해야 했지만, 그들이 의지할 수 있는 자위책이란 이 정도가 고작이었다.

‘암흑의 중세’라고 후세의 역사가들은 말한다. 한편으로는 중세가 암흑시대는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이탈리아 반도와 시칠리아 사람들에게 그들이 살았던 ‘중세’는 암흑 그 자체였다.

당시 이슬람은 단순한 해적질 이상으로 유럽 기독교 문명세계를 위협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럽세계는 내부적인 갈등과 분쟁으로 자신들의 영토 내에 있던 일반 대중의 안전을 지켜주지 못하였습니다. 당시 유럽의 기독교도들은 이대로 내버려두면 조만간 유럽도 이슬람에 먹힐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외부의 도전에 결연히 맞서지 못했습니다. 서양사에서는 유럽의 태동의 시점으로 알려진 서기 800년에 신성로마제국의 샤를마뉴 대제가 잠시 이슬람 세력에 대항하며 전열을 가다듬었지만 그의 사후 다시 유럽은 분열과 갈등에 휩싸였습니다.

시오노 나나미는 계속적으로 ‘중세 전기’가 일반 서민들에게는 왜 암흑기였는지에 재차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불행한 사람들의 실상이 총체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았다. 그것은 그들이 이름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8세기부터 9세기와 10세기에 걸쳐 사라센(북아프리카 이슬람교도) 해적에게 희생된 사람은 방대한 수에 이르지만, 그들 가운데 저명인사는 단 한 사람밖에 없다. 프랑스에서 로마로 가는 길에 남프랑스에서 해적의 습격을 받아 가진 것을 몽땅 털린 클뤼니 수도원장이 그 사람인데, 이때는 프랑스 왕이 군대를 파견하여 수도원장 일행을 구출했을 뿐만 아니라 생트로페 근처의 사라센 기지였던 팔시네트에서 해적의 소굴 자체를 없애버렸다. 피해자가 중요인물이었기 때문에 왕까지 나선 것이다.

이름도 없는 서민이 끌려가봤자, 왕은커녕 ‘할거’하고 있는 ‘군웅’들도 꿈쩍하지 않았다. 피해자의 대부분이 이름 없는 서민이었을 뿐만 아니라, 전해져 오는 정보도 연속성이 없이 띄엄띄엄 이어진 것도 이슬람 세계에서 노예로 혹사당하는 기독교도의 실상이 유럽에 충분히 전해지지 않은 요인일 것이다.”

“누가 사라센 해적에게 가장 많은 피해를 보았는가를 오늘날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방법이 있다. 그러려면 머릿속을 컴퓨터 그래픽화할 필요가 있지만, 머리속에서 하는 작업이니까 상상력만 있으면 된다.

남프랑스에서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 남부로 내려와 ‘장화’ 뒤꿈치(이탈리아 반도)를 빙 돈 지역, 즉 티레니아 해와 이오니아 해에 면해 있는 일대는 지금은 관광지로 알려져서, 전 세계에서 오는 사람들이 지중해를 만끽하고 있다. 기후가 온난하고 풍광이 아름답다는 공통점을 가진 이들 관관지에서 사람도 건물도 바다에 떠 있는 배도 모두 지워버린다. 머릿속에서 무인직영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고대에는 가도를 오가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고, 평야는 구석구석까지 경작되고, 상하수도가 완비된 도시나 마을이 진주목걸이처럼 이어져 있고, 항구에는 베들이 끊임없이 드나들었지만, 그 땅에서 인간과 관련된 것을 모조리 지워버린다.

그러고 나면 비로소 알 수 있을 것이다. 중세 전기가 어떤 시대였는지.

그리고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중세가 암흑이었다는 것도 비로소 납득할 수 있을 게 분명하다.”

그러면서 시오노 나나미는 중세시대의 지도자들이 자기 자신들의 문제에만 매달려 급급하고, 일반 민중들을 보호하지 못한 것에 대해 연민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지도자가 일반 서민들을 보호하고 지역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덕목으로 정치적 의지와 실행력을 손꼽았습니다.

“평화는 간절히 바라는 것만으로는 실현되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누군가가 평화를 어지럽히면서 가만두지 않겠다고 분명히 언명하고 실행해야만 비로소 평화가 현실화되는 법이다. 따라서 평화를 확립하는 것은 군사가 아니라 정치적 의지였다.”

저는 여기에서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다’는 말이 다시 뇌리에 떠오릅니다. 위대한 ‘지도자’가 사라지고, 제국을 다스리던 뛰어난 ‘시스템’마저 무너지자 일반 서민의 삶은 그야말로 내적으로는 삶의 질이 현저하게 떨어지고, 외적으로는 이슬람교도 해적들로부터 모든 것을 빼앗겼습니다.

리더와 시스템이 사라질 때 이후의 역사는 암흑기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이를 배웠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 자체 내에서는 이를 깨달아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냉철하게 객관적으로 자신 뿐 아니라 자신이 속해 있는 조직 또는 국가의 역사적 위치를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아마 시오노 나나미도 당시 일반 서민들의 삶을 서술하면서 이와 같은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을 <로마인 이야기> 제 6권의 마지막 부분을 다시 본서에서 인용한 것으로 나타낸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팍스 로마나는 로마에 의한 평화였고, 현대식으로 말하면 ‘로마제국의 주도로 이루어진 국제 질서’다. 하지만 평화와 안전을 의미하는 이 ‘팍스’는 타국의 군대로부터 자국민을 보호하는 것만으로는 성립되지 않는다고 로마인은 생각했다. 도적, 산적, 해적 같은 인간 사회의 적으로부터도 충분히 보호해주지 않으면 사회의 평화도 개인의 안전도 달성할 수 없다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다. 그 ‘팍스 로마나’란 무엇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로 ‘팍스 로마나’라는 제목을 붙인 <로마인 이야기> 제6권의 마지막 부문을 인용하고자 한다.

“죽기 조금 전에 아우구스투스가 나폴리 만을 유람할 때 잠시 들른 포추올리에서 이런 사건이 있었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방금 도착한 상선의 승객과 선원들이 가까이에 닻을 내고 있는 배 위에서 쉬고 있는 늙은 황제를 알아보았다. 선상에서 사람들은 마치 합창이라도 하듯 입을 모아 황제에게 외쳤다.

“당신 덕택입니다. 우리의 생활이 이루어진 것도.

당신 덕택입니다. 우리가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는 것도.

당신 덕택입니다. 우리가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이 예기치 않았던 찬사는 늙은 아우구스투스를 진심으로 행복하게 해주었다. 그는 그 사람들에게 1인당 금화 40닢을 주라고 지시했다. 다만 그 금화의 사용처에 조건을 달았다. 그 돈으로 이집트 물산을 구입하여 다른 곳에 팔라는 거였다. 늙어서도 아우구스투스는 여전히 현실적인 남자였다. 물산이 자유롭게 유통되어야만 제국 전체의 경제력이 향상되고 생활수준도 높아진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팍스(평화’)였다.”

시오노 나나미는 여기 아우구스투스의 일화를 인용하면서 중세 시대의 지도자들의 무책임한 행태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위대한 인간정신이 사라지고, 역사에 대한 기록문화마저도 철저하게 퇴락해버린 중세시대는 서민들에게는 불행의 기간이었음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중세시대에 역사의식은 물론 일반 대중에 대한 지도자들의 노블리스 노블리제 정신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성전을 목표로 발현한 십자군 전쟁에서마저도 북아프리카에 노예로 끌려간 수많은 기독교도(이들은 모두 일반 서민들이었습니다!)들을 구출하고자 하는 조금의 시도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중세 후반에 특별한 단체 외에는 말입니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 <노생거 수도원>에서 여주인공 캐서린 몰런드는 역사에 대해 이렇게 불평을 늘어 놓습니다.

“역사란 짜증나게 하거나 피곤한 이야기만을 늘어놓을 뿐이야. 페이지마다 교황과 왕들의 다툼, 전쟁이나 질병들이 나오지. 그리고 아무짝에도 못쓸 남자들만 나오고 여자라곤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지루한 이야기야.”

제인 오스틴 작품의 여주인공은 1800년경에 이런 말을 했지만, 그녀는 최근까지도 똑 같은 불평을 했을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20세기에 이르기까지도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역사를 ‘과거의 정치’, 즉 과거에 행해진 정치의 무미 건조한 연대기 정도로만 간주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쇠망사에서 “순전히 역사란, 그 거의가 인류의 범행, 우행, 복운의 등기부에 다름 아니다.”라고까지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역사는 단순히 정치적 사료뿐만 아니라 당시의 일반 서민들의 삶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가 아닐까 합니다.

문제는 이 역사를 통해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배우는가 입니다. 어느 유명한 언론인은 그래서 역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역사에는 일반적으로 설화적, 교훈적, 법칙적 인식이 있으며 역사에 관심을 갖고 독서를 계속하면 이 목적을 절로 달성할 수 있다. 역사는 우리에게 비단 ‘재미’만 주지 않고 ‘교훈’을 주며 앞날에 대한 방향, 즉 역사적 법칙 같은 것도 깨우쳐 준다. 역사란 엄격한 의미에서 ‘오늘’의 이해를 위해 있는 것이다.”

참조 : “로마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상)”, 시오노 나나미, 한길사, 2009.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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