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에세이] 고오급 인력을 낭비하는 사회

in #kr6 years ago (edited)



나는 글을 쓸 때든 글을 볼 때든 카페를 즐겨 찾는다. 적당한 소음이 끊임없이 나를 환기시키고, 틈틈이 사람들의 모습을 둘러보는 재미가 있다. 오늘도 나는 카페의 기다란 테이블에 앉아 아메리카노와 함께 한 숨 긴 잠을 청하며, ‘그의 정의론’에 대하여 끄적이다가 그제 구매한 책을 꺼내 읽고 있다. 내 글을 쓰는 것도 즐겁지만, 역시 남의 글을 읽는 것이 마음도 편하고 유익하다.

방금은 불현듯 나의 집중력을 깨는 일이 일어났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여학생에게 한 남학생이 다가와 말을 걸며 내 관심을 빼앗아 간 것이다. 그와 그녀가 큰소리로 대화를 이어가는 통에 나는 좀처럼 내 독서에 집중할 수 없었다. 말소리가 어찌나 내 귀에 쏙쏙 박혀 오던지... 나는 왜이리 남의 이야기가 궁금하고 재미있는걸까.

이 둘은 아직 그렇게까지 가까운 사이는 아닌가보다. 그가 그녀에게 자신의 문학적 감수성과 외모, 지식 등을 자랑하고 있었다. 처음에 남자는 여자에게 영화 속 영어 대사를 줄줄 읊었다. 그렇게 감동받을만한 부분인가 싶지만, 어쨌든 그는 자신의 감상을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그리고나서 그는 자신의 큰 키와 복근 사진을 자랑하는데 이어, 현재 자신이 하고 있는 공부가 얼마나 어려운지, 또 학습량이 얼마나 많은지를 피력했다. 말의 내용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로스쿨에 다니고 있는 학생인 듯하다. 대놓고 자기 자랑을 하는 그의 모습에 괜스레 내가 다 낯부끄러워졌다. 남자로서 그 허세가 묘하게 공감되는 탓에 나 자신을 거울에 비춘 듯한 느낌이 드는 까닭일까.

하지만 그가 말하는 내용의 수준으로 보아 단순히 근거없는 허세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공대생으로 보이는 그녀에게 기본적인 법학의 원리와 최근 이슈가 되는 사건의 쟁점에 대한 설명을 해 주었다. 꽤나 똑똑한 친구 같았다. 자부심에 찬 그의 법학적 소양을 듣고 있자니, 한 때 법학과 학부생이던 시절이 떠올라 은근한 흥이 올라왔다. 오랜만에 듣는 이론과 판례들이 거의 다 죽어가던 과거의 뇌신경들을 다시 활성화시킨 모양이었다. 내 눈은 책 위에 꽂혀 있었지만, 내 귀는 그의 말을 경청하며 마음 속으로 ‘그래, 그렇지, 맞아 맞아’를 외치고 있었다. 하마터면 입으로 “옳지”하고 소리를 낼 뻔했다.

그런데 정말 내가 입소리를 낼 뻔한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다만 그 소리는 “옳지”와 같은 긍정의 호응이 아닌 “신발, 강아지 조카 같은 소리하네”와 같은 분노의 표출이었을 터였다. 남자는 자신이 검사가 될 것이라며 신나게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는데, 그의 입에서 터진 그의 직업적 가치관이 내 화를 돋운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검사가 되면, 폭력사건은 받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사람도 동물인데 폭행은 어느정도 용인해주어야 하고,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고작 그런 보잘것 없는 사건을 처리하는데 너무나 많은 고급 인력이 소모된단다. 검사, 판사까지 그런일에 신경써야 하냐며, 고급인력으로서 진짜 사건을 맡아 집중해야 한단다.

고급 인력... 고오급 인력... 대체 고급 인력이란 무엇이길래, 그는 본래 주어진 직업상의 역할까지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을까?

나는 그에게 묻고 싶었다.

“당신이 길에서 뜬금없이 맞았을 때, 고급인력인 경찰이 ‘내가 고작 단순폭행을 봐야겠소? 원래 사람은 동물이오. 같이 맞서 싸우시오’라고 하면 어떨까?”

“당신이 감기에 걸렸을 때, 고급인력인 의사가 ‘내가 고작 고뿔을 봐야겠소? 원래 사람은 그렇소. 알아서 극복하시오’라고 하면 어떨까?”

“당신의 차가 갑자기 멈추어 섰을 때, 고급인력인 정비기사가 ‘내가 고작 시동꺼진 것을 봐야겠소? 원래 차가 시동꺼지는 일은 빈번하게 발생하오. 알아서 정비하시오’라고 하면 어떨까?”

우리의 삶은 대부분 사소한 일들로 이루어져 있고, 이를 처리하기 위해 각 직업이 있다. 그의 말대로라면 우리 사회는 고급 인력을 쓸데없이 낭비하고 있는 사회가 아닌가. 그는 대체 공무원을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그저 본인의 출세와 명예를 위한 자리로 보는 것일까? 그로써 남을 하대할 수 있는 권리를 얻는? 혹은 검사의 자리를 자신의 재능과 노력이 보상받는 지위라고 생각했을까? 나는 처음 듣는 그 신박한 헛소리에 화가 나, 더 이상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을 수 없었다. 계속하여 분노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들어 갔다. 나는 결국 조용히 짐을 챙겨 자리를 옮겼다.

내가 이렇게 못마땅해 한들, 똑똑한 그는 검사가 되겠지. 아니면 좋게 이해하여 허세를 부리다보니 말이 헛나왔다고 이해하면 되려나. 천천히 마음을 달래며 자판을 두드리고 있지만, 씁쓸한 마음이 쉽게 가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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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ㅗ급인ㄹ엿ㄱ

ㅋㅋㅋㅋ이런 센스는 어디서 납니까

완전히 별도의 문제지만, 그 나이는 많이 한심할 수 있는 나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내심을 극한까지 발휘하면서 어린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줘야 할 때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저도 좀 더 어렸을 때에는 그런 경향이 많이 있었고, 그래서 부끄러운 기억이기도 하고 그렇습니다ㅎㅎ 그런데 이야기 속 저 친구는 말을 들어보면 서른 가까이 되는 것 같아보였는데다가 곧 법조인이 될 사람의 사고방식이라 생각하니 열이 받았습니다.

고오오ㅗ오오ㅗ오오오오ㅗ오ㅗ오ㅗㅗ

각종 고시를 통한 선출방식 부작용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순 암기식 성적 나열로 상위부터 뽑으니 이런 사단이 난다고 봅니다 . 요즘 학교 쌤들을 보면 전혀 교사 자질이 없어보는 사람도 교사를 하고 있으니까요.

집단면접과 인성면접을 먼저 시행하고 차후에 통과자들을 대상으로 시험응시 자격을 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사교육의 대한민국은 그조차 학원을 만들어낼 것같네요ㅋㅋ

고급인력

오래 일했고
아는 사람 많고

능력의 고급 보단 인맥과 정치에 능한 고급

물론 후자의 2가지 항목이 나쁜건 아니지만, 좀 많이 치우쳐진 느낌이죠

인맥과 정치력의 스노우 볼 효과 뒤에 숨은 능력평가

무엇이 되었든 타인을 깔고보는 사람은 분노를 불러일으킵니다

머리만 좋은 고급인력들이 만든 사회가 어떤 가치가 있어서 지금 이런 사회가 된 것인지 되묻고 싶어지네요. ㅎㅎ(부글부글)

그러게 말입니다. 그래도 뜻있는 사람들에 의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니 희망은 있습니다.

신발, 강아지 조카 같은 소리하네

언어순화적 명언 제 레이다망에 얻어걸렸습니다. 키득 키득

참견하지 말고 그냥 참아요. 현재에 잘난만큼 응당 그것에 대한 복을 받은 만큼 잘 보답하는 것이 우주의 원리인데 무식해서 그렇지요. 뭐, 그런 사람이 이번 생에 잘 쳐드시고 복락누리다가 간다면 다음생에 어떻게 될지 모를것 같습니다. 앞으로 큰코 다치면 그 놈 인생이 좀 나아질 테고. (여기까지는 도꾼들의 감상평)

인간 종자 피터의 표현,

그새끼 시방새

ㅋㅋㅋㅋㅋㅋ

저는 직장생활을 해 본적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친구가 그러더군요. 착한사람은 꼭 능력이 없고 나쁜 놈들은 일을 잘해 승진을 하는 꼴을 자주 본다고요..

그래서 진짜 착하게 살려면 능력을 키워야된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어설프게 착하기만 한 것도 안타깝습니다

잠에서 깨셨군요.

'신발, 강아지 조카 같은 소리 하네' 왜 나도 여기에 끌리는지...

꽂히셨나요ㅋㅋㅋㅋㅋ

머리만 좋고 개념은 탑재하지 못한 자가 신념을 가지면 무서워진다는 걸 코너링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자가 대표적이기도 하고, 또 그런자들이 부지기수로 널려있기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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