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 6. 4 꿈과 음악 사이 어딘가]'멜로영화 와호장룡'

in #kr6 years ago (edited)

와호6.jpg

'시간의 무게를 버티고'

살아가면서 겪는 대부분의 자극은 망각의 강으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그리고도 시간의 무게를 버티고 남아있는 기억이 존재한다면 그건 분명 그 경험 이전의 나와 이후의 내가 이미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증거다. 왜 였을까? 문득 '와호장룡'이 떠올랐다. 요리 강호를 떠나온지 어언 12년, 다시 돌아온 부엌에서 느낀 익숙함 때문이었을까? 강호는 평화로웠다. 모든 것들이 제 자리에 있었다. 고추장, 된장, 참기름, 식용유, 후라이팬, 국냄비, 깨소금 등. 참, 들기름 하나 빼고. 부산으로 다시 돌아와서는 들기름을 볼 일이 없었지만 한시도 들기름을 잊어본 적이 없다. 들기름을 만나기 전 나와 후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totally different person)이니까.

'와호장룡'의 장면들이 뚜렷이 떠오르질 않는다. 하지만 중요하지 않다. '와호장룡'이라는 타이틀을 생각할 때 드는 기분은 언제든 꺼내 볼 수 있는 감정이니까. '와호장룡'은 내게 이상적인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다시 그 사랑을 엿보고 싶어졌다. 왜 였을까? 단서는 늘 그랬듯 '이목백'과 '수련', 두사람을 손에 쥐고 다시 영화를 재생했다. 파편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장면들을 하나씩 이어 붙여나갔다. 다행이 그 사랑은 그대로 잘 간직되어 있었다.

'와호장룡(臥虎藏龍)과 이안감독'

'와호장룡'은 누운 호랑이와 숨은 용을 의미한다고 한다. '진정한 영웅과 전설은 보이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나. 또한 극 중 두 주인공의 이름이 '룡'과 '호'이다. 혹자는 이 영화를 무협영화로, 혹자는 동양철학영화로, 또 다른 혹자는 페미니즘 영화로 읽을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서로의 마음을 고백하지 않은 주인공들의 비극을 예로 들어,
'두유소개팅' 어플이 필요한 이유를 말해주는 영화로 읽기도 한다.
https://blog.naver.com/ttoridecorp/221162292594)

'와호장룡'은 당시 무협영화로는 유일하게 73회 아카데미상 작품상 후보에 오르는 등, 무려 10개 부문 후보에 올라 외국어영화상, 미술상, 음악상, 촬영상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현재까지도 미국에서 가장 높은 수익을 거둬들인 외국어 영화로 기록되어 있다.

'와호장룡'을 얘기하면서 '이안'감독 얘기를 빼먹을 수 없을 것이다. '이안'감독 영화의 결을 참 좋아한다. 음악으로 얘기하자면 모든 악기가 '좋은 음악'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느낌. 특히나 보컬을 또 하나의 악기로 이해하지 못하는 많은 보컬리스트들이 음악보다 자신의 노래를 자랑하기 급급한 음악들을 좋아하지 않는데, 어느 악기 하나 그 음악이 만들어내려는 사운드의 무드를 해하지 않는 음악이 좋은 음악이듯 이안감독의 작품이 그러하다. '브로큰 백 마운틴', '색계', '헐크', '라이프 오브 파이'까지. 어느 악기 하나 전면에 나와 뽐내는 일 없이 모든 악기가 하나가 되어 만들어내는 하모니, 그의 작품에는 그런 아름다움이 있다. 듣는 이가 슬픈 마음을 느낄 새도 없이 표정과 노래에서 이미 혼자 다 울어버린 가수처럼 노래하지도 않고 가사는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처럼 일상의 반복을 읊고 무표정과 건조한 목소리로 노래하지만 음악이 멎고 나서는 눈물 한방울도 흘릴수도 없을만큼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의 크기에 할말을 잊고 만다. 일상의 익숙한 일들에 대한 감정소모로 길들여진 우리들에게 반응조차 할 수 없는 압도적인 감정의 자극 앞에서는 무방비일 수 밖에.

여권사진 116.jpg

'검객 주윤발?'

영화를 보기 전 주윤발 캐스팅에 관련해 검술이나 권법을 사용하는 주윤발의 모습이 잘 상상이 안갔다. 후에 속편에서 나왔던 견자단이나 어린시절 내 무협영화의 영웅이었던 이연걸 쯤은 나와줘야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나면 이보다 더 적합한 캐스팅이 있었을까 생각이 든다. 실제로 무예를 배운 적이 없는 주윤발은 양손을 자유롭게 연기하기가 힘들어 한손을 등뒤에 감추면서 절제된 검술로 오히려 여유있는 초절정 고수의 연기를 연출할 수 있었고 이는 마치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감정을 절제했던 그의 이성적인 사랑을 빼닮았다. 만약 그의 무술이 현란했다면 얻을 수 없었을 효과들.

와호115.jpg

'검술이 아닌 춤에 가까운 움직임'

실제 발레 전공으로 영국 유학까지 간 적이 있는 '수련' 역의 '양자경'과 무용학교를 다녔던 '소룡'역의 '장쯔이'. 둘 다 무술연기 경험이 없었지만 결국 몸을 사용하는 일은 통하는 법인지 누구하나 어설퍼보이는 이가 없다. 그들의 몸놀림을 보고 있자면 무술을 연마하여 누군가를 죽이고 죽는 일 같은 건 떠오르지 않다. 이미 정해진 합대로 춤을 추고 있는 두사람. 잔인함 대신 우아함이 느껴지는 이유.

와호2.jpg

와호1.jpg

'눈부신 푸름, 대나무숲'

'와호장룡'하면 많은 사람들이 대나무숲을 떠올릴 것이다. 그 드푸른 대나무숲을 보자면 그들의 와이어 씬이 긴장감 넘치는 검투가 아닌 하늘을 두둥실 떠노는 신선놀음으로 비춰 부러움을 살지도 모른다. 영상미가 빛을 발하는 순간. 스스대는 바람소리와 함께 대나무잎 사이사이 슬로우모션으로 스쳐가는 장쯔이의 얼굴에 오만가지 감정이 담겨 있는 듯하다.



와호910.jpg

'멜로영화 와호장룡'

말하자면 '와호장룡'은 내게 지독한 멜로영화다. 무당파 마지막 후계자 이목백은 수련 끝에 사부에게서도 듣지 못한 경지에 이른다. 하지만 경지에 다다른 그가 느낀 것은 기쁨이 아닌 슬픔. 그리고 그가 가슴에서 떨쳐낼 수 없는 일에 대한 생각. 수련을 관두고 하산한 그가 강호를 떠나기로 결정하면서 천하보검 청명검까지 내려놓기로 한건 처음부터 '수련'에 대한 마음 때문이었다. '수련'의 약혼자 '맹사조'가 '이목백'을 구하다가 죽음을 당하고 나서 그 후로 '이목백'과 많은 일들을 함께하면서 감정이 깊어갔지만 그와의 언약을 지키기 위해 누구와도 마음을 나누지 않았던 '수련', 그런 그녀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목백'. 때문에 서로의 마음을 잘 알면서도 누구하나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세월을 흘려보냈다.

와호4.jpg

곧바로 심장으로 침투하는 독침에 의해 마지막 호흡만을 남겨둔 상황, 이목백은 그제야 수련에게 자신의 일생을 허비했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칠흑같은 빛 한자락 없는 곳에서도 자신의 혼백은 그녀의 사랑으로 인해 외롭지 않을거라고 말한 뒤 숨을 거둔다. 마지막까지 숨을 아끼고 그 힘을 명상하는데 집중하라며 조언하는 이성적인 너무나 이성적인 수련은 영화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언급되는 '사랑'을 말하고 쓰러지는 이목백을 껴안고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만다.

'찌질한 내 사랑에 대한 속죄'

기억났다. '와호장룡'을 처음 봤던 그 날의 마음이.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한게 아니라 나를 사랑한거구나.'

'평생 살면서 이런 멋있는 사랑을 한번 해볼 수 있을까?'

사랑을 가장해 내 사랑을 채우기 급급했던 그 때. 미숙했다고 넘어가기에는 너무나 이기적이고 어린 아이 같았던 그때. 다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들 같은 사랑을 해보겠노라 다짐하게 했던 '와호장룡'.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긴 연애 끝에 결혼을 했고 옆에서는 아이가 끙끙대며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잠을 자고 있다. 연애하는 동안 내 모습이 크게 달라진 점도 없었고 지금의 아내를 참 많이도 울렸었는데 6년이 가까운 시간동안 옆자리를 지켜주었구나. 어쩌면 내가 그토록 동경했던 사랑을 아내는 이미 이뤄 낸건지도 모르겠다. 결혼도 출산도 사랑의 결실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걸 보면 아직도 내게는 사랑할 기회가 남아있는걸까? 나는 여전히 철없는 남편이다.

<내가 아는 한 가장 아름다운 고백>

와호15.jpg

와호16.jpg

와호17.jpg

와호7.jpg

Sort:  

I am testing competition voting bot. I will visit again. ^^ Thank you for participation. Please enjoy the competition. Upvote your post. -Keeper-

경연대회가 더 좋은 포스팅을 위한 동기부여가 또 되어주니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키퍼님^^

멋진 포스팅 감사합니다 ^^ 영화 한편 다시 본거 같아요 ^^

재밌게 읽었습니다. 경연대회 좋은 결과 있으시길!

열심히 해보려구요. 감사합니다.^^

대나무숲은 명장면중에하나죠 !

정말 압권이죠!^^

ㅎㅎㅎ 재밌는 포스팅 감사합니다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짱짱맨 호출에 출동했습니다!!

오치님 감사합니다.^^

짱짱맨 호출로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린시절 좋아하던 영화내요
확실히....이런 중국 영화가 인기였는데... 시대의 흐름이 이제는 갓마블로....

갓마블이 또 좋은 대안이 되어주었죠.ㅎㅎ

ukk 출똥햇슴다

출똥 감사드립니다!^^

ㅎㅎㅎ 감사합니다

요즘 저 배우들 다 잘 있나 모르겠어요
아 그리고 원래 요리 하셨더랬나요? 오호~

주윤발, 양자경, 장쯔이 모두 '와호장룡' 이후로 헐리웃에서 종종 볼 수 있었죠.
요리는 전공은 아니구요. 군대에서 취사병 했었습니다.ㅎㅎ

아 그렇군요 취사병을 말씀하신거였군요ㅎㅎㅎㅎ

여운이 남는 포스팅입니다..특히 끝부분..
저도 대회 참가하는데 이렇게 글 잘 쓰시는 분과 나란히참가하게 되어 영광이네요~ 응원차 들렸어요. 자주 놀러올게요! 화이팅! 😊

아이고 과찬의 말씀이세요. 저도 응원합니다! 다같이 화이팅하시죠.^^

Coin Marketplace

STEEM 0.31
TRX 0.11
JST 0.034
BTC 66441.00
ETH 3217.31
USDT 1.00
SBD 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