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용 장군 녹취록 24, 티우 대통령과의 인연

in #leedaeyong5 years ago (edited)

이대용은 1963년 9월에 도착해서 인수인계를 받고 10월 1일부터 베트남 무관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당시 고 딘 디엠(Ngo Dinh Diem)대통령은 11월에 발생한 구데타로 권력을 상실하고 피살되고 말았다. 디엠 대통령은 장기 독재 통치로 베트남 내부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결국 미국이 사주하다시피한 구데타에 의해 권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당시 구데타를 일으킨 두온 반 빈(Duon Van Minh)대장은 덩치는 커도 똑똑한 사람이 아니었다. 연이어서 계속 구데타가 일어났다. 모두 6번의 구데타가 발생했다.

구데타가 자꾸 일어나면서 적이 아니라 아군끼리 서로 싸우는 형국이 되었다. 그리고 정작 싸워야 할 대상인 베트콩이나 월맹군과는 전투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이대용은 그 와중에 나중에 월남 대통령이 된 티우와 개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티우는 구데타에 개입은 했지만 직접 앞에 나서지는 않았다.

여러번의 구데타로 인해 정국이 혼란해지자 월남군들이 회의를 했다. 이렇게 계속 구데타를 하다가는 자멸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군인들 중에서 누구를 추천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티우가 추대되었다. 육사교장도 지냈고 참모총장도 했다. 육사교장을 했기 때문에 육사지지자들이 호응을 많이 했다.

이대용이 보았던 티우는 매우 똑똑하고 능력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월남 사회전체가 부패로 썩어 있어서 티우도 어쩌지 못했을 뿐이다. 이대용과 티우는 개인적으로도 매우 가까운 사이었다. 티우는 코냑을 좋아했다. 이대용은 불란서에서 코냑을 구해서 같이 한잔씩 하곤 했다. 이대용의 부인과 타우의 부인과도 서로 좋은 관계였다. 말은 서로 통하지 않았지만 말없이 통할 수 있는 사이었다.

티우가 권력을 장악하고 얼마지 않아 대한민국의 월남군 파병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미국과 한국간에는 이미 합의했지만 월남과의 합의와 협조가 남아 있었다. 월남파병과 관련한 협상은 이대용이 전적으로 맡게 되었다. 티우는 이대용의 파병제안을 흔쾌히 수용했다. 티우의 승인이후 이대용은 월남 국방장관 그리고 합동참모총장을 만나 협상을 마무리 했다.

제일 먼저 파병한 부대는 붕따오(vung Tao)의 이동외과 병원이었다.

녹취록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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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 정국이 정말 혼란 스러웠던 시기군요.
안팍으로 이대용장군님의 능력이 빛납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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