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용 장군의 두 사선을 넘다) 14-5 지화형무소의 남대위

in #leedaeyong5 years ago (edited)

1977년 5월 19일 이대용은 A동 감옥을 떠나 D동으로 옮겼다. 그 이후 여기저기를 전전하다가 1977년 6월 26일에는 D동 2층 1소 감방으로 이감되었다.

D동은 사형집행 예정수인들이 많이 있었다. 사형 집행을 앞둔 남월 반공 게릴라들인 와하우교군 위관급 장교들이 이곳 D동에 이감되어 있다가 사형되었다. 여기서 이대용은 D동 2층 담당 남대위와 만나게 되었다. 남대위는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문맹자였다. 그는 착한 사람이었다. 권총의 명사수여서 호치민의 경호원이었으나 호치민이 죽은 후에는 여기저기로 왔다갔다 하다가 결국은 치화형무소 간수가 되었다.

1977년 6월 24일 새벽부터 이대용은 열병을 앓기 시작했다. 6월 26일에는 물한모금 마시지 못하고 혼수상태에 빠지곤 했다. 40도를 오르내리는 고열은 6월 30일까지 이어졌다. 이대용은 거적대기 위해 누워 온몸이 쑤셔대는 가운데 펄펄 끓는 체온을 이를 악물로 견뎌냈다.

남대위는 이대용의 상태가 걱정되어 퇴근도 하지 않고 형무소에서 대기하면서 이대용을 보살폈다. 6월 28일에는 여의사와 간호원을 데리고 와서 진찰하게 하고 약도 지어주었다. 7월 4일이 되어서야 열이 떨어졌고 일어나서 죽을 먹을 수 있었다. 러닝 셔츠와 팬티를 갈아 입으려고 벗었더니 피가 많이 묻어 있었다. 이대용도 모르는 사이에 둔부 양쪽과 허리뒷편에 손바닥만한 상처가 나 있었다. 피부껍질은 모두 없어지고 시뻘건 살덩어리 위해 피가 엉켜있었다. 이대용은 왜 그런지 몰랐으나 그것은 욕창이었던 것 같다. 움직이지 못하면 피부가 괴사해서 생긴다.

이후 남대위는 이대용에게 취사장에서 끓인 물 한동이씩을 가져다 주게했다. 그런 특혜는 이대용이 D동을 떠날때까지 4개월간 계속되었다. 일광욕시간도 15분에서 30분으로 늘려 주었다. 그러나 남대위도 1977년 11월 2일 만난지 4개월 만에 떠났다. 떠나기전 그는 통역관을 데리고 와서 이대용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남대위는 이대용을 부대사라고 하면서 자신이 AH동으로 이동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하면서 얼마 있으면 석방되어 귀국하게 될 것이라고 위로했다. 이대용은 감방에서 옥사할 수도 있었다. 그때 남대위가 도와주었다.

이대용 장군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구중위 옹바오 남대위를 고맙다고 기록해 놓았다. 그들이 있었기에 이대용이 살아 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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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낸스 해킹사건에 대한 갠적인 생각

저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여러분들은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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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위가 고마운 분이군요

선을 배푸시던 분들도 남은 여생이 평안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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