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lyLee's Life Magazine 16. 평생 모르고 살 것들에 대하여 / 가을방학 - 곳에 따라 비

in #music6 years ago (edited)


LilyLee's Life Magazine 16.
Music
평생 모르고 살 것들에 대하여
/ 가을방학 - 곳에 따라 비

가을방학.jpg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아이가 없는 여자주인공은 아들을 전쟁에 내보냈다가 잃은 동생을 보며 생각한다. 아들을 가져본 적도 잃어본 적도 없는 자신은 그 기분을 평생 모르고 살 거라며, 가슴 아픈 경험도 재산이 될 수 있다는 얘기였다.

비극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의 배부른 소리로 들릴 수도 있겠으나, 나는 그 구절에서 꽤나 깊은 감명을 받았다. 금붕어보다야 낫지만 결코 앵무새나 돌고래보다 뛰어나지 않을 형편없는 기억력을 가진 내가 대강이나마 그 내용을 기억하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그 책을 읽은 것은 스물셋이었고, 나는 겪지 않았어도 될 일들을 나서서 겪으면서 심신이 지쳐있는 상태였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았으면 될 일이었다. 가만히 한국에서 권태로운 연애를 지속하거나 혹은 이별하거나, 휴학을 하고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했으면 됐을 일이었다. 호주에 가겠다고 했을 때 엄마는 ‘무엇하러’ 가냐고 되물었으며, 나는 그에 대해 사실대로 답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현실 도피였다. 나를 둘러싼 모든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곳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싶었다.

왜 항상 도망치고 싶었는지는 모르겠다. 나의 삶은 언제나 권태로웠다. 사물과 내 과거와 사고를 기억하기 시작한 7세 무렵부터 그러했다. 혹자는 가장 오래된 기억이 막 태어난 순간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4, 5세가 아닐까 싶다. 나는 기억하는 것이 좀 늦었다. 머리를 뭘로 얻어맞은 것도 아니고 큰 사고를 당한 것도 아닌데 어린 시절의 기억이 거의 없다. 머리가 나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성적은 늘 좋았으니까.

내 가장 오래된 기억은 오른손을 다쳐 흰 붕대를 칭칭 감아 왼손으로 삐뚤빼뚤하게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썼던 기억이다. 또 하나는 유치원에 가기 싫어서 집에서 버티다가 지각을 해서, 9시가 넘어 혼자 고요한 유치원의 계단 앞에서 ‘올라가기 싫다’고 생각하며 서 있었던 일, 그리고 아무도 없는 유치원 교실에서 혼자 컴퓨터를 하고 있던 기억이다. 무엇이든 즐겁고 유쾌하다고만은 할 수 없는 기억이다. 오래된 것은 몇 가지가 더 있지만 사실 그것은 조작된 기억이다. “너 어렸을 때 그랬었어”하는 어른들의 말을 듣고 나중에 내 머릿속에서 이미지화 해낸, 만들어낸 기억인 것이다.

권태는 평화로운 일상의 징표다. 일생의 드라마틱한 사건은 대부분 불행과 관련 있다. 사고, 입원, 질병, 죽음 같은 것들 말이다. 많은 행복은 계획된 일이다. 연애, 결혼, 임신(혹자에게는 그것마저 불행이 될 수도 있지만), 출산. 로또 당첨 같은 행운은 많은 이들에게 찾아오는 행운은 아니며 지나친 행운은 때로 불행이 되기도 한다.

별 일 없는 평범한 삶이란 그래서 어려운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지독히 권태롭기도 하다. 어렸을 때는 그랬었다. 다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나를 사랑해주는 부모님, 아주 친하지는 않지만 잘 싸우지도 않는 형제. 다들 저녁 식사 후엔 거실에 모여 앉아 텔레비전을 보면서 집 앞 슈퍼마켓에서 잔뜩 사온 과자를 함께 나눠먹고 깔깔거리며 사는 줄 알았다. 엄마는 회초리를 들거나 욕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집에서 나는 ‘예쁜이’라고 불렸다. 의외로 그런 집안이 많지 않다는 걸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20년이 지나서였다.

가을방학의 노래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곳에 따라 비>다. 이 노래에는 다음과 같은 가사가 나온다.

전학 가던 날 아침엔 항상 이렇게 비가 오곤 했었지

나는 전학을 가 본 적이 없다. 그 감정이 궁금하다. 아마 평생 알지 못할 것이다. 그다지 즐겁고 유쾌한 경험은 되지 못할 지라도, 낯선 학교와 낯선 아이들을 마주하고, 흙먼지가 풀풀 이는 낯선 운동장에서 외로움을 목구멍으로 삼키며 하교하는 기분 같은 것은 알지 못할 것이다.

때로 어떤 것들은 평생 모르고 산다. 모르고 사는 게 좋은 것들도 있다. 큰 병, 수술, 사고, 가까운 사람의 죽음 같은 것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재산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건 아마 불행한 기억이 거의 없는 행복해빠진 나의 철없는 철학일지도 모르지만.

  • 본문에서 인용된 가을방학의 <곳에 따라 비>는 하기 링크를 통해 들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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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 편안하게 들립니다.

좋은 노래지요 ㅎㅎ

짱짱맨 호출에 출동했습니다!!

매번 감사합니다^^

제 경험상
불행하더라도 다채로운 경험을 한 사람보다는
단조롭더라도 행복한 삶을 산 사람이 훨씬 잠재력도 풍부하고 매력있더라구요^^

torax님처럼 얘기한 사람이 있었어요!
모든 경험이 재산이 된다는 말은, 어쩌면 불행한 일을 겪은 사람들에 대한 위로의 말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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