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사) post 56, 한국의 분단 1945-48

in #steempress5 years ago (edited)

웨더스비 교수 씀

소련에 있어서 한반도 문제의 중요성으로 인해, 소련 지도자들은 남한에서 진행되고 있는 선거를 위한 준비를 긴밀히 관찰하고 있었다. 4월 24일,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정치국은 평양의 슈티코프 장군에게 남한에서 단독선거가 이루어지면 북한에서 해야할 반응에 대한 지시를 내려 보냈다. 그럴 경우, 김일성에게 북한에서 인민위원회를 개최하여 정치국에서 작성한 두개의 결정을 통과시키도록 했다. 

첫째, 평양은 서울의 정부의 북한에 대한 법적 관할권을 거부한다. 그리하여 위원회는 한반도가 통일될때까지, 인민위원회는 북한의 영토에 대한 법적 권한을 가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헌법초안을 도입한다.  

둘째, 북한은 서울에 수립된 정부에 대항하기 위한 전국적인 정부를 수립한다.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이 정부는 북한에서 선거를 통해 수립되어야 했다. 그리하여 “두단계의 불법선거”가 남한에서 실시되어야 했다. 각 지역에서 7내지 8명의 대표를 선출하여 해주에서 모였다. 그리고 남한의 각도에서 360명의 의원을 선출하여 최고인민위원회에 보냈다. 러시아의 자료에 따르면, 8월 21일부터 26일까지 해주에서 1100명의 대표들이 모여서 360명의 의원들을 선출했다. 동시에, 선거는 북한에서 8월 25일 개최되었다. 

대한민국 수립 약2주후에, 평양에서 572명의 위원이 참가한 최고인민위원회가 개최되었다. 9월 8일 위원회는 새로운 헌법을 승인했으며, 그다음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레베데프 장군은 역사학자인 안드레이 란코프와의 인터뷰에서 새로운 국가의 명칭을 자신의 제안했으며, 북한에서 제안한 ‘조선 인민공화국’을 거절한 다음이었다. 김일성은 내각의 수장이 되었으며 김두봉은 최고인민위원회 의장으로 남았다. 

대한민국이 유엔의 승인으로 정통성을 주장했기 때문에,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한국인에 의해 독립적으로 수립된 유일한 정부라는 주장을 정통성의 근거로 삼았다. 소련이 수행한 중심적 역할을 무시하고, 이런 새로운 서사는 유엔임시한국위원회가 선거를  실시하는 자신들의 계획을 수행하기 바로직전인, 1948년 4월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연석회의에서 국가의 기원을 두었다. 

김구와 김규식은 일주일간의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고 북한에서 자유로운 선거를 수용하겠으며 남쪽으로 전기제공의 차단을 중지하겠다는 김일성의 약속을 가지고 돌아왔다. 두 약속 모두 곧바고 깨어졌으나, 이를 진짜로 믿었던 김규식은 유엔 감시하이 선거를 보이코트했다. 새로 수립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김일성이 이끄는 반일투사들의 남북연석회의를 통해 수립된 반면, 대한민국은 미국이 일본 부역자들로 수립했다고 주장했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한국을 두개의 경쟁적인 국가로 비극적으로 분단하게된 과정을 알아보겠다. 

[참고자료]

이 포스트는 다음자료를 참고했다.

Andrei Lankov, From Stalin to Kim Il Sung: The Formation of North Korea, 1945-1960 (New Brunswick, NJ: Rutgers University Press, 2002).



Posted from my blog with SteemPress : http://warandpeace.dothome.co.kr/2019/08/11/division-korea-56d-weathers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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