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제주도 자전거 일주 2. 협재

in #tripsteem5 years ago

image

수년 전에 자전거를 끌고 혼자 갔던 여행기 두 번째입니다.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백팩에 달아놓은 헬멧을 보고 "저기, 혹시 자전거 여행 가시나보죠?"라면서 다가온 사람들과 맥주도 좀 마시고, 선실 구석에서 새우처럼 눕기도 하고, 자리가 불편해서 갑판에 나가서 깜깜한 바다를 넋잃고 구경하던 사이에 해가 떴고 제주도가 보이기 시작했다. 제주항에 배가 도착한 것은 아침 7시가 되기 조금 전이었던 것 같다.









지게차의 삑삑거리는 소리에 멀리서 쭈뼛거리고 있으니 지게차 옆으로 들어오면 된다고 했다. 자전거는 꺼냈는데 막막하다. 제주도를 한바퀴 돈다면서 오긴 했지만 별 생각 없이 왔기에 땅을 보며 자전거를 질질끌고 나가는데 항구 근처 자전거포의 주인 아저씨가 와서 호객을 하는 게 보였다. "자전거 렌트, 자전거 렌트 합니다~" 맨몸으로 와서 자전거 일주를 하는 사람도 많겠지. 대학생 3명이 거기 낚여 흥정을 하고 있는데 그 아저씨에게 거의 넘어간 상황이었다. 나는 제주도에서 처음 만나는 자전거 가게에서 자전거 뒤의 짐받이를 사서 붙이기로 정하고 왔기에 나도 가서 말을 붙였다.





새벽에, 자전거포 사장의 봉고차는 나와 대학생 3명, 내 자전거를 사장의 가게로 운반했다. 나는 짐받이와 짐끈을 15,000원에 샀고 그들은 10만원 가까운 돈을 주고 자전거 3대를 3일간 빌리기로 했다. 아마 1일에 1만5천원 정도였던 것 같다. 중간에 포기하더라도 환불은 불가능하며, 포기한 지점까지 픽업은 갈 수 있다고 했다. 가게는 제주시외버스터미널과 종합운동장 사이의 어딘가에 있었다. 섬에는 제주시와 서귀포시 둘 밖에 없는데 시외터미널이라는 이름이 신선했다.


사장이 내 자전거에 짐받이를 붙이는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아무래도 10만원짜리 손님이 우선이었겠지. 터미널 뒷편에 기사식당에서 돼지두루치기를 맛있게, 싸게 판다면서 추천도 받았다. 밥은 무한리필이면서 3,500원! 내 작업도 끝나고 일단 밥을 먹으러 그 식당에 갔더니 그 대학생들이 밥을 먹고 있었다. 다들 루트가 뻔하구나.


나는 밥을 빨리 먹는 편이다. 가끔 일행이 놀랄정도로. 이 날도 배가 숟가락으로 밥을 광속으로 채굴하고 나니 그들과 비슷하게 식사를 끝내게 되었다. 자전거 페달에 발을 올리려는데 뒤에서 그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행님, 우리 길이 비슷할 것 같은데 같이 다니시죠."

나는 사회인답게 근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 그.. 그래."







사장의 추천대로 자전거를 시계반대방향으로 돌기로 했다. 지도에 표시된 것 중 가장 가까운 관광지인 용연에 도착한 게 9시쯤이었다. 동네 주민 산책로 느낌이 물씬나는 보급형 쇠소깍이었다. 예전에 블로그에 썼던 내용에는 "이 친구들이 있어 정말 유쾌했다"라고 써 놓았는데 지금 생각하니 '응...내가 정말?'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사람을 불편해하는 편이다. 그 때도 어색하게, 그들이 나를 부르는 호칭대로 어설픈 '행님' 행세를 하느라 정신적 에너지를 썼던 것 같다. 지금 다시 쓰면서 보니, 나는 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없다. 내가 그들을 찍고, 그들이 날 찍은 사진이 있을 뿐.







다음 방문지는 용두암. 그 때 그 장소에서, 우리 4명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중국인이었다.







거의 30분마다 한 번씩 쉬었던 것 같다. 그들은 내가 대구에서 자전거와 헬맷을 갖고왔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전문가 취급했다. "아, 나도 초짜야. 자전거 여행 처음인데"라고 서너번 말했음에도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들의 믿음을 져버리지 않으려고 더욱 무리해서 그들보다 조금 더 잘 타는척을 했다.


중간중간 쉴 때 마다, 크게 할 말이 없기도 하고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기 어색하기도 하고 딱히 할 일도 없어서 먼 바다를 보며 북한의 핵개발에 따른 남북관계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척, 사회 초년생으로서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는 척, 바닷바람이 옷을 스치는 낭만을 즐기는 척했다.








정오쯤 극동방송 안테나 부근의 바위염전에 도착했다. 모래가 없는 해안이라 밀물 때 바위 위에 올라온 바닷물을 가두어 소금을 얻었다고 적혀있었다. 왼쪽에서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것을 보며 오른쪽의 바다를 보며 페달을 밟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햇볕도 기분좋게 내렸고 바람도 시원했다. 땅에 발바닥이 닿지는 않지만 내발로 움직인다는 느낌도 좋았다.






뜨겁다. 자전거 탈 때는 배를 때리는 역풍이 불고 쉴 때는 햇볕만 내리쬔다. 출발하면 또 정면에서 바람이 강하게 불어온다. 내가 산 코인 가격은 떨어지고 판 코인의 가격이 오르는 것과 같다.


"행님, 행님 자전거하고 헬맷 한 번 써봐도 되요?"
"어.. 그.. 그래."
나는 자전거와 헬맷의 주인으로서 다정하게 대답했다.










오후 한시를 지나니 슬슬 지친다. 뭔놈의 바다가 끝도 없이 보이나. 아, 지금 해안도로 가는 중이지. 이 때부터 눈에 보이는 사람들이 몽땅 부럽기 시작했다. 나는 오르막인데 저 사람은 내리막이라서 부럽고, 나는 허벅지가 터질 것 같은데 저 사람은 차 타고 가서 부럽고, 나는 정신없이 그냥 달리느라 바쁜데 저 사람은 바닷가 오솔길을 천천히 걸으며 음미하는 것 같고. 가방에 넣은 물건들도 '내가 사용할 물건'이라기보다는 '날 무겁게 하는 물건'에 가까워졌다.








첫날이라 돌만 봐도 신기했나보다. 돌 사진이 많다. 자전거 가게 사장이 준 지도의 3일짜리 코스 중 첫날이 거리도 가장 짧고 가장 쉬운 날이라고 하는데 쉽지는 않았다. 둘째와 셋째날은 아마 익숙해져서 쉽게 느껴지는 게 아닐까.





오후 2시에 밥을 먹었다. 애월항 부근에서 적당이 허름하고 적당히 비어있는 식당에 들어가 적당히 정식을 시켰다. 그리고 4시쯤 협재해수욕장에 도착했다. 지도는 우리에게 여기서 첫날 묵을 숙소를 구하라고 했다. 게스트하우스를 찾아보는데 빈자리가 없다. 해수욕장 구멍가게에 할머니들이 일렬로 앉아서 호객을 한다.


'민박집 4만원~'


협재에서 거의 한시간을 더 갔다가 다시 한시간을 돌아와 협재의 민박집에 자기로 했다. 앞에 4만원을 불렀던 할머니는 보이지 않고 다음 할머니가 5만원을 불렀다. 매도호가 5만원, 매수호가 4만원. 어찌저찌 깎아서 4만5천원에 거래 체결. 작은 원룸이었지만 에어컨도 있고 욕실도 딸려있고 저녁으로 라면을 끓여먹는다니까 김치도 가져다 주셨다. 방값을 깎았으니 에어컨은 되도록 틀지말란다.










옷을 갈아입고 편의점에서 라면, 맥주, 안주를 좀 사오니 애들이 갑자기 나가더니 닭을 한마리 튀겨왔다. 배가 터지도록 먹고 바다에 다시 나가서 남이 터트리는 폭죽을 구경했다.





지도로 보니 정말 짧은 거리다. 제주 자전거 일주 : 1. 제주항에 이어 또 하루가 지나갔다.


여행지 정보
● 제주시 한림읍 협재해수욕장



여름, 제주도 자전거 일주 2. 협재

이 글은 스팀 기반 여행정보 서비스

trips.teem 으로 작성된 글 입니다.

image


Sponsored ( Powered by dclick )

dclick-imagead





























































Sort:  

짱짱맨 호출에 응답하여 보팅하였습니다.

오늘 블록체인 전문 콘텐츠를 만드는 「Keep !t」의 웹진 구독서비스를 시작합니다. 스팀잇 사용자를 위한 75% 할인, 단돈 $5 SBD에 1년구독을 하실 수 있습니다.

KEEP!T이 북이오에 유료웹진을 75%할인된 가격으로 오픈합니다!

자전거따라 같이 이동하는 느낌으로 잘 읽엇습니다~^^

감사합니다^^ 제 댓글이 많이 늦었네요. 수년 전의 길을 사진으로 따라가는 느낌도 좋습니다.

제주도라는 낯선 곳에서 생각지도 않은 인연을 만나셨네요..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우연과 인연이 있는거 같아요^^~

인연은 마음이 좀 열려 있을 때 눈에 보이는 것 같습니다. 특히 여행에서는 서로가 들뜬 상태라 평소보다 더 쉽게 만날 수도 있는 것 같고요. 일상을 여행처럼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안녕하세요. @trips.teem입니다. 정말 재미있는 추억이에요!!! (따라하고 싶은 욕구가...) 다음 3편은 두둥!!!(기대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이거 시리즈로 나눠서 올리는거.. 어뷰징 아니죠?;;;;

불편하지만 같이 다닌 그 기분을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여행 자체는 큰 재산이 되셨을 것 같습니다.

글에는 쓰지 않았지만 모종의 계기에 의해 혼자서는 처음 떠나는 장거리 여행이라 크게 나쁠 건 없겠다는 생각이 드는 일은 주저 않고 해 봤습니다. 어쩌면 다소 궁상맞고 다소 소심한 성격을 고칠 기회라고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순간의 발심은 쉬워도 그걸 편안한게 유지하는 건 어렵더라고요. 저 여행 덕분에 그 전보다는 조금 더 풍부한 일상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긴 합니다.

중간에 링크가 잘못되어 표시되지 않는 사진 두 개.

Coin Marketplace

STEEM 0.35
TRX 0.12
JST 0.040
BTC 70638.80
ETH 3565.34
USDT 1.00
SBD 4.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