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용 장군 17. 미국에서의 초등군사반과 육사교관시절 그리고 전두환과 노태우에 대한 기억steemCreated with Sketch.

이대용 장군 17. 미국에서의 초등군사반과 육사교관시절 그리고 전두환과 노태우에 대한 기억

미국으로 가는데 15일이 걸렸다. 부산에서 일본을 거쳐 하와이 그리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중간 기착지에 내리지도 못하고 꼬박 15일간 배를 탔다. 당시 한국군들이 받은 교육은 위관급들이 받는 초등군사반 교육이었다. 그러나 한국군 장교들은 전부 중령이나 대령들이었다.

미군으로 부터 한달에 150불 정도 봉급을 받았다. 비프스테이크가 90센트 정도였다. 미국의 풍요로운 생활이 부러웠다. 시간이 나면 여행을 했다. 미국의 육군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도 그때 처음 구경을 했다. 교육을 마치고 귀국을 했더니 ‘웨스트포인트 구경한 사람 손들으라’고 했다. 그래서 손을 들었더니 이대용을 육사교관으로 발령을 냈다. 육사 11기가 2학년일 때 교관으로 부임했다. 그때부터 6개월정도 근무를 했다. 육군사관학교 생도대 부대장을 했다. 그리고 전술학을 가르쳤다. 후방에 있는 이대용은 몸이 근질근질했다. 자꾸 전방으로 가고 싶었다.

육사에서 눈에 뛰었던 생도들은 대부분 소장급 정도로 군생활을 마쳤다. 가장 눈에 띄었던 사람은 이범천이라는 사람이었든데 그도 소장까지 하고 죽었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그렇게 눈에 띄었던 사람들이 어니었다.

마침 육사교장이 사단장을 하던 김종오 장군이 부임해서 이대용을 놔주지 않았다. 김종오 장군은 시간만 나면 생도들앞에 이대용을 세워놓고 압록강에서 물을 떠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육사에서 휴전을 맞이했다. 사실 한국전쟁은 최초 3개월 정도가 매우 치열했다. 그리고 약 1년간은 싸움을 했지만 처음처럼 치열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휴전회담이후부터는 별로 전투가 없었다. 그래서 전투가 벌어지면 기자들이 모여서 크게 기사화되었을 뿐이었다. 3개월간 전사상자가 37개월 동안 벌어진 한국전쟁 전체 사상사의 70퍼센트 정도였다.

낙동강전투는 이제까지의 전투중에서 가장 치열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오키나와전이나 이오지마전 혹은 사이판전투보다 훨씬 더 많은 피해가 발생한 전투였다.

그러는 차에 김종오 장군이 군단장으로 영전을 했다.이대용은 그 기회를 이용해서 고등군사반 교육을 지원했다. 1953년 12월에 들어가서 54년 3월까지 광주에서 교육을 받았다. 광주에서의 교육은 미국의 교육과 달랐다. 미국의 교육은 모두 실제 행동위주였다. 참호에 대한 교육을 하면 직접 뎣센티가지 다 직접 파보는 교육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교육은 주로 말로했다. 이론으로만 가르치는 것이었다. 일본군의 영향을 많이 받은 탓이었다.

교육을 마치기 전에 당시 1군단장이던 김종오 장군에게 연락을 했더니 12사단 정보참모로 보직을 시켰다. 그리고 몇개월 있다가 52연대의 부연대장이 되었다.

녹취록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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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전똥, 노똥이 나오는군요.

이대용장군님 평전을 쓰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으아.. 저 두명도 나왔네요~!
역사의 오점이죠.ㅠㅠ

한국도 군인들 대우좀 해주었으면 합니다.
미국은 군대 제대하면 정말 많은 혜택이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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