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윤숙, 어느 시인의 일생

in #zzan5 years ago

1990년 6월 7일 어느 시인의 일생
.
그녀의 아버지는 기독교인에 독립운동가였다. 그녀는 아버지처럼 연설을 잘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가족을 돌보지 않고 독립운동한다고 산지사방을 떠돌아 다녔어도 그녀는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을 잃지 않았다. 어머니 또한 그에 못지않은 열혈 부인이었다. 함경도 함흥에서 3.1 만세 운동이 터졌을 때 앞장서서 만세 부르던 어머니는 일본 기마 경찰의 말발굽에 짓밟혔고 그녀는 그 모습을 눈도 못 감고 지켜보고 있었다. 아홉 살 나이에 그 참상을 지켜봤던 그녀는 그때의 태극기를 선연히 기억하며 이런 시를 쓴다.
.
“빨간 빛은 해님이요 / 파란 빛은 달님이지 / 세 줄 그어 네모를 둘렀네
.
우리 나라는 해님 나라 달님 나라 / 어디어디 숨었다가 오늘 나왔나?
우리 엄마 태극기는 불쌍하고 가련해요 / 일본 순사 칼에 찔려 어디론지 가버렸어요

.태극기는 울며 갔지 자꾸자꾸 울며 갔지 /
어디서 찾아올까 누가누가 찾아올까 / 꿈에도 안보이네”

시는 잘 모르지만 읽으면서 콧날이 찡할 만큼 그날 어린 시인이 받았을 상처가 살갗으로 느껴진다. 그녀에게 아버지는 일종의 정신적 지주이자 우러러보는 우상이었다. 보통 여자아이들처럼 소꿉놀이에는 관심이 없고 맹랑한 시를 끄적이면서 커 가는 딸에게 아버지는 “자기 목소리가 있는 글”을 쓰라고 권한다.
.
“글은 너 된대로 써야해. 남의 흉내를 낸다거나 유식한 체 어려운 남의 문구를 모방해 쓰면 넋 빠진 허수아비 글이 되는 거다. 글에서는 글을 쓴 사람의 냄새가 우선 풍겨야 하는 거야. 사람냄새 말이지.” (한국역사 속의 여성인물 하/ 한국여성개발원, 1989 중)
.
이것이 아버지의 충고였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시는 시어를 다듬어 썼다기보다는 그냥 나오는 대로, 감기 걸려 기침을 하듯, 좁은 데 있다 나오면 한숨을 쉬듯 자연스럽고 솔직하다. 1933년 식민지 조선에서 이런 시를 쓸 만큼 솔직한 사람은 드물었으리라. “(전략) 해진 치마 보고 가난을 슬퍼할 때 / 어디선지 그 얼굴은 가만히 나타나 / 깨어진 창 틈으로 속삭입니다
‘너는 조선의 딸이 아니냐’고. (하략) ” <조선의 딸> 중에서.
.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존경심은 창씨개명같은 소리에 시인을 발끈하게 했다. 그녀는 창씨개명을 거부하다가 경찰에 끌려가기도 한다. 이때 일본 관헌은 당신의 성과 비슷한 ‘모리(毛利)’씨를 쓰라고 강권했다고 한다. 이쯤 되면 그녀의 특이한 성을 짐작할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모(毛)윤숙이다. 경기도 경찰국에서 풀려나오는 그녀를 맞은 것은 그녀가 일하던 방송국장, 일본군 보도과장이자 육군 소장 구라하시였다고 한다. '
.
그녀의 회고에 따르면 이때 "나 같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에게도 이런 강압이 오거늘 총독부가 보아서 쓸 만한 인재는 모두가 억지와 탄압으로 꼼짝 못하게 눌러서 저희 편을 만들었을 게 아닌가? 그러나 정말 그들의 편이 된 이가 몇 사람이나 될까?"라고 생각했다고 하는데, 이후 그녀의 행각은 그 ‘몇 안되는’ 일본편이 되려고 머리에 꽃 꽂은 여자 같았다. 독립운동가 아버지는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조선의 딸은 침략 전쟁에 앞장서는 ‘동방의 여인들’의 일원이 된다.

“비단 치마 모르고 연지분도 다 버린 채 동아의 새 언덕을 쌓으리다 온갖 꾸밈에서 행복을 사려던 지난 날에서 풀렸습니다 벗어났습니다 들어보세요 저 날카로운 바람 새에서 미래를 창조하는 우렁찬 고함과 쓰러지면서도 다시 일어나는 산 발자욱 소리를. 우리는 새날의 딸 동방의 여인입니다.”
.
일찍이 춘원 이광수를 사모했던 모윤숙이 춘원의 소개로 안호상과 결혼할 때 영 마뜩지 않은 걸 눈치채고 “지금이라도 때려 치우자!”고 신부대기실(?)에 있던 모윤숙을 충동질했던 대담한 친구 김활란 (아마기 가쓰란)과는 친일 경쟁을 펼치는 듯, 광기에 가까운 친일 행각을 벌인다.

이런 모윤숙이 해방후 선택할 길은 딱 하나였다. 김활란은 조선 팔도에서 몇 안되는 여자 영어 사용자로서 미국에서 반평생을 보낸 이승만에게 접근했고 그의 정치노선의 나팔수가 됐다. UN 한국 위원단장이었던 인도인 메논에게 타고르의 시를 암송하며 접근했던 이 영민한 여성은 메논으로 하여금 “내 평생 이성이 감성에 패배한 순간이었음”을 고백하게 만들었으며 ‘낙랑클럽’을 만들어 “기생 아닌 기품 있는 여성들”(이승만의 표현)이 미군들을 접대하도록 했다.
.

춘원 이광수가 “이제는 사상의 침략을 조심해야 해. 서로의 잘못을 캐내는 데 열을 낼 게 아니라 잘못을 찾는 대로 서로가 다시는 그런 세상이 안 되도록 정신 소제를 해야 한단 말야.”라고 엉뚱한 물타기를 하며 좌익의 득세를 우려한 그대로 모윤숙은 자신의 생존과 자신을 위한 나라를 위해 그 재주를 다했다. 연희대학생이 낀 암살단이 그녀를 겨누고 파티장에 뛰어들었다가 엉뚱한 언더우드 부인을 죽였던 사건은 그녀를 향한 증오가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케 한다.
.
그래도 그녀는 이승만보다는 나았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선무 방송을 하다가 피난을 떠나지 못했던 것이다. 소문에 따르면 그녀는 바로 인민군의 총탄에 머리를 꿰뚫려 탱크에 질질 끌려다녔다고 했지만 그녀는 끝끝내 살아 있었다. 경기도 광주 인근을 헤매며 인민군의 눈초리를 피해 다니던 그녀는 어느 날 죽어 쓰러진 국군 소위의 시신을 앞에서 그녀 하면 떠오르는 절창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를 쓴다.
모르는 분들은 한 번 검색해서 읽어 보시면 될 것이다. 단어 하나 하나가 각혈한 것 같이 선명하고 핏줄처럼 팔딱팔딱 뛴다. 그녀는 참 재주 많은 여성이었다.
.

죽기 얼마 전 그녀는 수필가 전숙희와 북한강변을 갔다가 이렇게 속삭였다고 한다. “숙희야. 나는 지금도 모든 게 그리워. 이렇게 아름다운 날이면 사랑을 하고 싶어.” <렌의 애가>처럼 “여성이 쓴 베르테르의 슬픔” (유진오 왈)이라는 극찬을 듣는 시의 지은이이면서도 그녀는 한껏 어우러지고 피어나는 사랑의 경험을 하지 못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춘원을 오래도록 맘에 담았으면서도 엉뚱한 사람과 결혼해야 했고 인도인 메논에게는 계획적인 ‘우정’ (모윤숙 본인의 표현)을 나눠야 했으며 <렌의 애가>는 김영이라는 유부남 의사를 대상으로 한 것이라는 설도 있으니까.
.
몇년 전 인천시 주관 6.25 기념식에서 송영길 인천 시장은 대로했다. 기념식에서 모윤숙의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가 낭송된 것이다. “이런 창녀 같은 혀로 대화혼을 부르짖으며 내선일체 천황폐화 만세를 부르며 우리 민족의 젊은이를 제국주의 전쟁의 희생양으로 몰려가는 것을 찬양했던 자들이 해방이후에 참회도 하지 않고 심판도 받지 않고 살아있었다는 것도 황당한 일이다.”
.
그 말이 맞다. 그녀가 참회하지 않고 이 나라의 문인의 대표로 살았다는 것은 황당한 일이다. 아울러 드는 생각은 그녀가 살았던 시대 또한 참 정신없는 격변의 시기였다는 것이다. 그녀가 평화 시대를 살았다면 아마도 아무런 흠결도 욕설도 없는 고고하고 존경 받는 시인으로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녀의 시대는 평화롭지 못했고 그녀는 스스로 선택한 활시위의 화살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꽂혔다. 그녀 모윤숙이 1990년 6월 7일 죽었다.

“..... 조국을 위해선 이 몸이 숨길 무덤도 내 시체를 담을 / 작은 관도 사양하노라
오래지 않아 거친 바람이 내 몸을 쓸어 가고 / 젖은 땅의 벌레들이 내 몸을 즐겨 뜯어 가도
나는 유쾌히 이들과 함께 벗이 되어 / 행복해질 조국을 기다리며 /이 골짜기 내 나라 땅에 한 줌 흙이 되기 소원이노라“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중)

“大和魂 억센 앞날 永却으로 빛내일 / 그대들 이나라의 앞잽이 길손 / 피와 살 아낌없이 내여바칠 / 半島의男兒 希望의 花冠입니다. / 가난헌 이몸이 무엇을 바치리까? / 황홀한 창검이나 금은의 장식도 / 그대앞에 디림없이 그저 지냅니다 / 오로지 끓는피 한 목음을 축여보태옵니다. ” (‘지원병에게’ 중)

나는 교과서에 이 두 시가 모두 실리기를 바란다.

Coin Marketplace

STEEM 0.33
TRX 0.11
JST 0.034
BTC 66363.68
ETH 3207.73
USDT 1.00
SBD 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