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광석이라는 사람

in #zzan4 years ago

1987년 7월 12일 “채광석이라는 사람

1975년 4월 서울농대 복학생 김상진이 집회 도중 자신의 배에 칼을 찔러 넣었다. 피를 흘리며 병원에 실려간 김상진이 생사의 기로를 헤매던 그 시간에 서울대 학교 당국은 긴급회의를 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죽음의 문고리를 잡은 그들의 제자에게 ‘제적’ 선고를 내린다. 김상진은 그렇게 제적생의 신분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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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죽은 며칠 뒤인 4월 30일 남베트남 정권이 무너졌고 ‘월남패망’을 일종의 본보기로 삼아 정권은 민주화 운동에 대한 탄압을 극대화했다. 대통령을 비방하는 행위만으로 사형 선고가 가능했던 긴급조치 9호는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그런데 이 서슬퍼런 긴급조치가 내려진지 불과 열흘도 안돼 서울대에서는 유신 정권의 뺨을 때리는 시위가 벌어진다. 5월 22일 벌어졌다 하여 ‘오둘둘 시위’라고 불리는 이 시위에서 서울대생 수십 명이 구속됐고 수배됐다. 구속자 가운데 채광석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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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안면도에서 자라난 그는 어려서부터 활기가 넘치는 아이였고 동네가 인정하고 섬 전체가 아는 수재였다고 한다. 충청도 일대의 수재가 모인다는 대전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 사대 영어교육과에 68학번으로 입학한다. 하지만 세상은 그를 영어 교사로 살아가게 만들지 않았고 박정희 정권에 맞서 싸우던 그는 일찌감치 당국의 주목을 받아 1971년 강제징집을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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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스승을 찾은 채광석은 이런 결의를 남긴다. “선생님 반드시 모든 것을 극복하고 돌아오겠습니다.” 하지만 그야말로 어둠의 세월이 막막한 강제징집의 소회가 오죽했으랴. 그는 이런 싯귀를 남기고 있다. “일기장을 묶으면서/ 노트를 책들을 바라보았지 떠나던 날/ 남자는 때때로 망각할 줄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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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의 그 원통에서 군 생활을 하던 그는 골탄 작업을 너무 심하게 하다 그 독성 때문에 후일 탈모에 시달렸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스승에게 한 다짐대로 모든 것을 극복했으며 정권의 바람대로 ‘순화’되지 않은 젊음으로 학교에 돌아왔다. 그리고 1975년 오둘둘 시위로 그는 또 한 번 사회와 장기 격리된다. 그래도 그때는 창살 밖에서 그를 기다리는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주고받은 연서는 수백통에 이르렀고 그것들은 <그 어딘가의 구비에서 우리가 만나듯이>라는 책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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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대학 4년생이었고 여자는 신입생이었습니다. 여기 저기 기웃거리며 조금씩 시간을 보내는 만남이 한 달이 조금 지날 무렵, 남자는 중뿔나게도 무슨 거창한 신념의 깃대를 흔들어 대더니만 훌쩍 벽돌담 안으로 사라졌습니다. 1975년 5월말의 일이었습니다. 남자로서는 시대가 낭만을 누릴 만큼 한가롭지 못하다고 생각했던 듯 싶습니다. 그러나 흔한 일은 아니지만, 그 낭만은 야금야금 담 안의 세계와 담 밖의 세계를 관통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그러다가는 드러내놓고, 마침내 삶의 중심을 차지할 만큼 그 벽돌담을 사이에 둔 기이한 사랑은 서로의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 어딘가의 구비에서 우리가 만났듯이> 서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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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얌전하고 수줍음까지 내비치는 서문이지만 그의 삶은 180도 달랐다. ‘시인의 시대’라 할 80년대에 맹렬하게 돌입해 들어갔던 그는 위악에 가까운 욕설의 대가였고 “지식인들의 문학은 이대로 가면 곧 몰락한다.”고 직설의 화살을 날리기 일쑤였으며 민중 속에서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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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노동자 시인 박노해의 시를 발굴하여 세상에 알린 사람이었고 유신 시대 이후 명맥이 끊어졌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실질적인 재건자였다. 황지우의 말처럼 '남들이 다 어려운 가운데서 매끄럽게 챙길 것은 챙기고 일의 결과를 소유하면서 눈치껏 살아오는 동안 참으로 가장으로서는 못살았고, 지식인으로서는 철저하게 살았던‘ 사람이었다. 그의 시 ’밧줄을 타며‘에서 그의 삶이 어떠했는가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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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걸고 한 발 두 발 비지땀을 흘리며 /식은땀을 훔치며 목숨을 걸고 한 발 두 발
아우성치는 압제의 손길 내리꽂히는 수탈의 손길을 뚫고 /저 꿈에도 못 잊을 원한과 열망의 봉우리 / 꼭대기에 두 발을 딛고 새 하늘 새 땅을 보기 위하여 /외치며 노래하며 /민족의 아들 딸 / 밧줄을 탄다 목숨을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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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짧은 평생을 밧줄 타듯 살았다. 그는 피켈을 휘둘러 빙벽에 틈을 내고 자신은 물론 뒷사람들에게 아득하기만 한 빙벽을 오르도록 만들었던 사람이었다. 시인으로, 평론가로, 조직가로, 그리고 싸움꾼으로서 그는 80년대 문학판을 종횡했다. 친척 동생이 경제적 곤궁을 타개할 다른 일터를 제안했을 때 “나는 문학에 온전히 투신하겠다.”고 거절했던 것은 그 한 예일 뿐. 6월항쟁 내내 거리에서 싸우다가 보낸 그는 1987년 7월 11일 여성단체연합이 주최한 민요한마당에 참석한 후 후배들과 밤샘토론을 벌였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길을 나서다가 그만 교통사고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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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이 안치된 세란스 병원 영안실은 글자 그대로 ‘난장판’이었다고 전한다. 수백 명의 문인들이 전국에서 몰려들어 울고 소리 지르고 통곡하고 통음하며 날을 지샜다고 한다. 그 가운데 한 명이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이건 호상(好喪)이다! 호상!” 만으로 따지면 마흔 줄에도 접어들지 못한 서른 아홉의 죽음에 호상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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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아마도 ‘온전히’ 문학과 사회의 발전에만 몰두해 왔던 채광석의 삶을 기리는 외침이었을 것 같다. 더 살아서 그렇게 아름다운 삶이 행여 이지러지느니 차라리 이렇게 홀연히 가는 게 낫지 않겠는가 하는 뜻이었으리라. 그토록 그의 삶은 옹골찼고 치열했다. 탐욕이나 불의, 나태와 퇴보가 끼어들 틈이 없는 삶을 살다가 채광석은 죽었다. “차갑고 냉정하고 적당히 예복 입고 써야 할 평론을, 일개 병사처러 단독무장을 한 채로 이리저리 부딪치고안으로 피를 흘리곤 했던” (황석영의 조사 중) 채광석은 죽었다.

이시영 시인은 조시에서 “해마다 칠월이 오면 너는 여름산처럼 푸르게 산맥 일어설 것”이라고 읊었다. 해마다 돌아오는 7월 12일은 영원히 푸른 산맥처럼 살다 간 사람의 기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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