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고정희 가다

in #zzan5 years ago

1991년 6월 9일 시인 고정희, 사망.

전라도 해남을 고향으로 둔 그녀는 짧게, 하지만 열정적으로 살다 간 시인이다. 독신으로 살면서 “그녀 이전에 여성주의 시인은 없었다.”할 만큼, 페미니즘적 시선을 담아내는 동시에 기독교적인 예언자의 언어와 같이 명징하고 치열한 시어로 독자들의 머리 속을 쩡쩡 울려대던 시인이었으며, 하얀 손에 보드라운 피부의 우아한 여류 시인이 아니라 현실에 분노하고 개혁을 위해 끊임없이 현실 속에서 투쟁했던 구릿빛 시인이었다. 죽기 직전의 며칠 동안에도 그녀는 강경대 타살사건에 항의하는 범국민 대회 한복판에서 최루탄을 맞으며... 눈물 흘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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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지리산을 좋아했다고 한다. 툭하면 지리산을 찾았고 뻔질나게 천왕봉부터 피아골까지의 그 드넓은 산줄기를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땅이 험하고 날이 궂어도 그녀의 지리산 나들이는 그칠 줄 몰랐고, 마흔 넷의 초여름 비오는 뱀사골에도 거침없는 발자국을 찍었다. 하지만 계곡을 건너던 중 크게 한 번 흔들린 그녀는 급류에 휘말렸고 다시 세상으로 걸어나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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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 관한한 문외한의 수준을 평생 벗어나지 못하는 처지이지만 나는 그녀의 시 <상한 영혼을 위하여>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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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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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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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 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영원한 비탄 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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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바닥과 인간의 바닥을 가감없이 드러냈던 프로그램을 마무리하면서 나는 이 시를 어떻게든 프로그램에 흐르게 하고 싶었다. “밑둥이 잘리워도 새순은 돋거니” 아무리 후벼파이고 짓밟히고 내동댕이쳐질망정 솟아나는 새순은 어디에도 있다는 믿음을 전해 주고 싶었고,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는 시인의 영탄처럼 희망이란 희망이 도시 보이지 않는 순간에 가장 큰 빛을 발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싶었으며 “아무리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이 하나 오고 있다”는 다짐을 들려 주고 싶었던 것이다. 비록 능력 부족으로 실패했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스스로 목숨 끊은 이들의 기사가 종횡으로 눈앞을 그어대고, 피를 팔아서라도 등록금을 마련하려 했지만 신체검사에서 떨어진 학생이 절박한 머리띠 차림으로 거리에 나서야 하며, 앞일을 생각하면 그저 눈앞이 캄캄하기만 할 뿐인 이들로 그득한 요즘, 그녀의 시에 대한 그리움은 날로 더한다. 또 다른 시에서 그녀가 인용했던 나찜 히크메트의 말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잊어버리지 말아야 하는지를 깨우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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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불을 붙이지 않거나 그대가 불을 붙이지 않거나 우리가 불을 붙이지 않는다면
이 어둠을 대체 어떻게 밝힐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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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잡을 손이 오더라도 우리가 손을 내밀지 않으면 잡을 수 없을 것이고, 우리는 그저 외로운 파편으로밖에는 남기 어려울 것이다. 오늘 지리산의 자연의 일부로 돌아간 고정희 시인은 그것을 자신의 언어와 치열한 몸으로 보여 주었던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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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기억납니다. 지리산에서 실족하여 유명을 달리한 고정희 시인.
잊고 있어서 송구하기 그지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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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이가 @dozam님의 소중한 댓글에 $0.016을 보팅해서 $0.007을 살려드리고 가요. 곰돌이가 지금까지 총 6139번 $67.378을 보팅해서 $78.502을 구했습니다. @gomdory 곰도뤼~

감사합니다, 곰도리님.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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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뚱맞은 인사 드립니다.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늘 좋은 글로 우리 근현대를 조명해 주셔서,
오늘 고정희 시인을 다시 보게 해주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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