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과 맥나라마

in #zzan5 years ago

이영훈과 맥나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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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맥나마라는 양반이 있다. 격동의 1960년대 미군의 사령탑이었다. 쿠바 미사일 위기와 베트남 통킹만 사건과 북베트남 폭격, 1968년의 베트남 구정 대공세 등 굵직하다 못해 통통하게 역사에 기록된 사건들을 맞아 처리했던 미국의 국방 장관이었다. 재임기간 7년. 미국 역사상 최장수 국방 장관이었다.

별 몇 개 기본으로 달고 제대한 역전의 용장인가 싶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는 국방 장관 발탁 당시 민간인이었고 계량화된 수치를 신봉하는 통계학자였고 포드 자동차의 사장이었으며 국방장관보다는 재무부 장관을 내심 기대하던 책상물림이었다. 하지만 케네디는 비대해진 국방부를 통제할 인물로 그를 꼽았고 국방장관으로 입각시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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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이 한창일 때 그는 육군 항공대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유럽전 종전 후 육군 항공대가 기존의 B17 폭격기를 태평양으로 이동, 사용하려고 하자 그보다 신형 B29를 대량생산하여 전선에 투입하는 것이 효율적임을 수치를 통해 증명했다. 일본을 쑥대밭으로 만든 대공습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는 맥나마라의 계산에 의거하여 선택된 B29 편대에 의해 이뤄졌다. 이런 예에서 보듯, 맥나마라는 숫자로 모든 것을 파악하고, 또 그를 논리적 근거로 삼는 데에 특출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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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베트남 디엔비에푸 요새에서 프랑스가 홍건하게 얻어 터지고 물러난 후 미국은 한 나라가 공산화되면 줄줄이 무너질 수 있다는 '도미노 이론‘의 포로가 됐다. 미국은 어떻게든 동남아에서 번져가는 공산주의를 차단하고자 했고 그 최전방은 분단된 분단된 베트남의 경계가 된 북위 17도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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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구축함이 월맹군 어뢰정으로부터 공격받았다는 (그런데 1차 공격 시에는 오히려 공격한 쪽이 더 피해가 컸고, 2차 공격 때에는 ‘공격의 징후’만 있었던) 통킹만 사건 이후 맥나마라는 나름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북베트남 폭격을 시작한다.

이후 그는 전쟁 내내 매일 폭격 출격 횟수, 퍼부은 폭탄의 양, 사살된 북베트남군이나 베트콩의 수를 보고하라고 할 정도로 극성맞은 국방장관이었다. 그의 계산대로라면 압도적인 미군의 화력과 힘 앞에 북베트남은 곧 두 손을 들어야 했고, 미군들은 큰 상처 없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전쟁 발발 3년만에 그는 무려 50만 명이 넘는 미군을 베트남에 하염없이 쓸어넣고 있는 자신을 발견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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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회고록에서 그는 통킹만 사건이 미국의 의도에 의해 조작된 사건임을 토로하면서, 자신의 실패 이유 가운데 하나로 이것을 든다. “당시 우리들은 상대방에 대한 그릇된 판단 때문에 그들이 스스로가 옳다고 믿는 가치관을 위해서는 목숨을 걸고 싸우는 내셔널리즘의 힘을 과소평가하였다.”는 것이다. 수치로 계산될 수 없는 요소가 있다는 것, 인간의 열정과 의지와 정신력의 크기를 간과했다는 자기고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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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는 중요하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김상경은 이런 대사를 치지 않던가. “서류는 거짓말 안합니다.” 맞다. 숫자 역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숫자 자체가 조작될 수는 있겠으나 정리되고 확인된 수치라면 ‘팩트’의 왕관을 가장 먼저 차지할 수 있다. 기록 또한 마찬가지다. 자료가 부족하고 기억도 희미한 상황이라면 당시 현장에서 만들어진 기록이란 무엇보다도 유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살인의 추억>에서 김상경이 결국 서류에 배신당하듯 사람들은 숫자에 속고 기록에 울게 돼 있다. 바로 맥나마라가 그런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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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와 기록을 중시하는 이들이 즐겨 범하는 오류 중 하나가 맥락의 상실이다. 어떤 숫자가 통계화되는 것은 그를 활용하려는 이들의 의도에 따른 것이고, 현실의 왜곡된 반영일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하지만 “중요한 건 숫자”라는 고집은 숫자를 둘러싼 맥락을 소거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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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조선인들의 평균 수명이 이전에 비해 비약적으로 늘어난 것은 팩트일 수 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인의 평균 수명은 얼마이고, 의료 혜택이 일본인들 거주 구역에 집중된 비율은 얼마인지, 지역별 편차는 어느 정도였는지 등 더 다양한 맥락을 고려해야 ‘숫자’의 의미가 정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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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는 그런 것이다. 얼마 전 일부 공무원들이 ‘가라’로 야근을 하고 야근수당을 챙긴 사실이 문제가 된 적이 있는데 50년 쯤 뒤 이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 출퇴근 기록만 가지고 들입다 ‘끝까지 파는’ 학자가 있다면 그는 “당시 공무원들이 과도한 야근에 시달렸다.”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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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는 그런 것이다. 일제 강점기 일본 경찰들이 일본 군복을 입고 여자들을 끌고 가는 악당들을 체포했다는 기록과 수치를 제시하며 일본은 타의에 의해 위안부가 되는 일을 막았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얼마나 의미가 없는 일인지는 5공 시절 신문 검색만 해 봐도 안다. 7년 내내 5공 정권은 ‘고문 근절’을 떠들었고 일부 경찰의 ‘일탈’을 징계하고 있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 정권이 물고문 전기고문 등 각종 고문과 소원했던 사이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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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기억과 기록의 합이다. 기억하는 이들이 모두 죽으면 남는 것은 기록이겠지만 기록은 기억 이상으로 왜곡되기 쉬운 존재다. 상반되는 기록들을 비교하고 진위를 살피며 과장과 허위의 잡티들을 도려내고 최대한 객관적인 사실로 다듬어 내는 것이 사료 비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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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나마라가 숫자로 현실을 구성하려다가 큰코를 다친 것만큼이나 숫자로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설사 맥나마라가 B29 폭격을 제안했을 때처럼 숫자가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진다 해도 이는 어디까지나 단편 조각에 불과하다. 거짓말하지 않는 숫자라지만 아예 진실을 가려 버리는 더 큰 거짓의 도구가 되는 것이니까.

이영훈 교수의 책 <반일 종족주의>가 베스트셀러라고 한다. 이영훈 교수는 ‘숫자’에 관한한 상당히 자신감을 가진 사람이고, 일제 강점기가 조선 사람들에게 그리 해악이지만은 않았음을, 오히려 조선 경제는 성장했고 근대화 일로를 걸었음을 숫자를 통해 얘기하고 있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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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가 MBC 기자의 뺨을 올려붙인 것처럼, 조선인들이 일상적으로 일본 순사에게 뺨을 맞고 다녔다는 사실, 3.1 운동 이전에는 아예 경찰이 임의로 누군가를 지목해서 끌고 와서는 엉덩이 까고 쇠좃매로 피 철철 날 때까지 때릴 수 있는 조선 태형령이 엄존하고 있었다는 사실 앞에서 그 ‘근대화’의 의미를 숫자로 증명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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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인세 한 푼을 보태기는 싫어서 <반일 종족주의>를 사 볼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상황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그를 토착왜구에 친일파라고 몰아부쳐도 그의 의견에 동감하거나 호기심을 가져 그 책을 사 보는 사람들의 수가 적지 않다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의 반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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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보고 빠져드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길은 이영훈 교수가 우스꽝스러워 보일 만큼 명료하고 재미있게 학문적으로 박살을 내는 방법이 최선일 것 같다. 부디 그런 일이 벌어지기를. 카메라 앞에서 사람 뺨을 때리는 저 일본인스러운 교수는 이미 확신범이 돼 있어서 무슨 욕을 먹든 오히려 더 기고만장할 것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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