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돈까스'의 등장

in #zzan5 years ago (edited)

1963년 7월 13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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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으로 가는 오르막 언덕에는 큼직한 식당들이 많고 저마다 종업원들이 90도 인사와 더불어 이리로 오십사 손짓하는 풍경이 펼쳐진다. 그 가운데 남산 돈까스집이 있는데 나는 그 집의 돈까스보다는 또 다른 ‘남산 돈까스’가 떠올라 쓴웃음을 짓게 된다. ‘남산 돈까스’ 그건 역대 최장수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한 김형욱의 별명이었다. 그가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된 것이 1963년 7월 13일. 그가 해임된 것이 1969년 10월 20일이니 무려 만 6년 3개월 동안 그는 대한민국 정보기관의 책임자 자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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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황해도 신천 사람이다. 신천이라면 기독교인들과 좌익들의 대립 속에 최대의 양민 학살이 발생한 지역으로 유명하다. 그의 어린 시절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미국 의회에서 진술한 대로라면 “소련군의 학정을 못이겨” 월남했다고 돼 있으니 고향을 떠난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그는 어찌어찌 육군 사관학교 8기로 입교했고 장교로 6.25를 맞았다. 동기생 절반 이상이 전사해 버린 전쟁 통에 그는 살아남았고 그의 주장대로라면 ‘을지무공훈장’을 받을 만큼 열심히 싸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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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쿠데타에 가담했고 한때 얼굴 마담으로 내세운 장도영을 축출하는 데에 공을 세운 그는 육사 8기와 5기생들의 권력 다툼 와중에 어물쩡 제 4대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됐다. 그 자신 “내가 정보에 대해 뭐 아는 게 있냐?”고 자세를 낮출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대통령 박정희에 대한 절대적 충성과 그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탄압으로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무려 6년 3개월 동안의 “여러분이 상상하는 그 이상의 권력” (미국 의회에서 의원들을 상대로 한 진술)을 휘둘렀다.

김형욱의 또 다른 별명은 ‘멧돼지’였던 바, 김형욱의 정보부는 멧돼지처럼 질주하며 목표물을 들이받고 쓰러뜨리고 짓이기고 물어뜯었다. 국회에 똥물을 퍼부은 김두한을 잡아와서 초주검을 만들어 그 기골 장대했던 사람을 폐인으로 만든 것이 김형욱의 중앙정보부였고, 인혁당 사건 당시 공안검사들조차 기소를 거부하는 말도 안되는 공소장을 들이밀고 그대로 사인하라고 우기고, 국회의원이건 뭐건 잡아들여서 몽둥이질부터 하고 봤던 깡패들이 김형욱의 중앙정보부였다. 자신을 자르라고 박정희에게 직언한 이만섭의 경우 실제로 죽여 버리라고 부하들에게 명령했다고 하니 그 무식한 저돌성은 세계적으로도 손꼽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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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권력의 원천은 박정희 개인에 대한 충성이었다. 김형욱의 중앙정보부는 나라를 위한 정보기관이 아니라 박정희 개인을 옹위하기 위한 ‘정치적 경호실’이었다. 무지막지하게 두들겨 잡는 외에 그는 박정희에 해로운 인물이라면 죄를 뒤집어씌우든 미인계를 쓰든 어떻게든 제거하거나 탈락시켰다. 미인계로 공작 대상자를 호텔로 끌어들인 후 샤워하는 틈에 여자로 하여금 그 옷을 훔쳐 달아나게 하여 망신을 준 사례 정도는 애교에 속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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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7월 13일 이후 6년 3개월은 한 나라의 정보가 집중되고 방첩의 사령탑이어야 할 정보기관이 대통령 개인의 정치적 무기로 전락했을 때 어떻게 되는가의 소중한 실제 사례였다. 정보기관은 ‘각하를 위하여’ 무슨 짓이든 했고 ‘각하에 저해되는’ 모든 것들을 쓸어내려 했으며 집권자는 그 충성을 즐기는 가운데 정보기관의 권력은 극대화되어 국민을 감시하는 눈과 귀가 되고 국민을 두들겨 패는 몽둥이가 됐다. 그리고 그 특권 속에서 부패했고 저마다의 배를 불렸다. 김형욱은 우리 나라 예산 보유고가 3천만 달러이던 시절 2천만 달러를 빼돌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돈이 뉘 돈이며 그는 이 돈을 어떻게 빼돌렸으며 그것이 경제에 미친 영향은 과연 어느 정도였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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