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l review] 희망 없는 길을 간다는 것, <더 로드>

in #aaa5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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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통 잿빛인 세계를 아버지와 어린 아들이 걷고 있다. 그들의 점퍼는 때가 묻었고, 오래 씻지 못한 듯 얼굴도 검댕이 투성이다. 백팩을 맨 아버지는 힘없이 카트를 밀고 간다. 곁에서 아버지를 따르는 열 살 내외의 아이도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영화 <더 로드(2009)>는 세계가 불타버린 후 살아남기 위해 길을 가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다. 영화에서는 어떤 이유로 세계가 불타버렸는지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이야기는 세상이 황폐해진 이후의 시간을 그리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은 남쪽 해안가를 향해 힘겹게 한 걸음씩 옮기고 있다. 세상의 동물들은 모두 죽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갱이 되어 선량한 사람들을 약탈하고 죽이거나 인육을 먹는다. 세계는 좋은 사람보다 나쁜 사람이 훨씬 더 많아졌다.

 큰 줄거리는 단조롭다. 아버지와 아들이 남쪽 해안을 향해 걷는 여정이다. 하지만 모든 여정이 그렇듯, 이 여정도 목적지보다 그 과정이 중요하다. 중간 중간 아버지와 아들은 죽음의 위기에 봉착한다. 이들 부자에게 찾아오는 위기들이 이 영화를 지탱하는 뼈대가 된다.

희망 없는 길을 간다는 것



 중간 중간에 아내가 살아 있을 때의 회상 장면이 나온다. 세상이 불타고, 사람들이 변하고 난 후 아내는 자신과 아이의 존재가 남자에게 짐이라고 여긴다. 겁탈 당하고 죽임 당하는 건 시간문제라고 생각하여 극도로 불안해한다. 아내는 죽음을 선택한다. 남자는 반대하지만, 결국 아내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아내는 어느 날, 추위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살아 있다는 것이 아무런 희망을 주지 못하는 때를 맞이한다면 어떨까.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공포를 느껴야 하고, 길을 걸을 때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면? 그런 절망과 공포를 반영 듯 아버진 위기에 처할 때마다 단 두 발 남은 총을 꺼내서 아이의 이마에 댄다. 누군가에게 잡아먹히거나, 고통스럽게 죽는 것보다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것이 현명할지 모른다. 유사시를 대비해 총을 입 안에 넣고 쏘는 법을 가르치는 아빠의 심정은 어떨까.

 아버지는 희망 없는 여정이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아이에겐 그 여정에 목적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아버지는 아이에게 말한다.

우린 불씨를 운반하는 거야. 네 마음에 있는 불씨 말이야.

 세계는 온기를 잃었다. 냉혹함과 동물의 본능만 남았다. ‘인간적인’ 그 무엇은 찾아보기 힘들다. 인간적인 것은 이제 작은 아이의 마음 한켠에만 불씨로 남아 있다. 그 불씨는 훅 불면 꺼질 듯이 날마다 위태롭다. 그 불씨가 끝까지 지켜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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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공포를 느끼다



 이 영화는 호러나 공포물이 아니다. 하지만, 난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생생한 공포심을 느꼈다. 공포를 준 건, 불타버린 세계도 아니고 잿빛의 길도 아니다. 공포의 실체는, 마음 속 불씨를 잃어버린 사람들이었다. 굶주린 사람들은, 사람들을 사냥하고 가두고 잡아먹었다. 그들은 좀비도, 뱀파이어도 아니었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었기에 공포심은 더 크게 느껴졌다.

 아버지와 아들이 우연히 발견한 저택에 들어간다.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이다. 마침 집 주인은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아버지는 집안 곳곳은 살펴보다가, 지하로 내려가는 작은 문이 잠긴 걸 발견한다. 아버지는 문을 잠근 데는 이유가 있을 거라며, 자물쇠를 부수고 밑으로 내려간다. 지하실에서 본 광경은 충격이었다. 뼈만 앙상한 사람들이 벌거벗은 채 사육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집주인은 인육을 먹는 무리였다. 사육 당하던 사람들은 자신들을 도와달라며 아버지와 아들을 붙잡게 되고, 부자는 그들을 뿌리치고 다시 집으로 올라온다. 그때 집에 사는 사람들이 돌아오는 소리가 들린다.

 이 영화가 공포를 발생시키는 방식은 이런 식이다. 괴물이 등장하지 않지만, 황폐한 세상과 함께 변해버린 보통 사람이 보통 사람을 위협하고 죽이는 것이다. 그래서 더 깊이 감정이입이 된다.

 <더 로드>는 코맥 매카시의 소설이 원작이다. 영화를 먼저 보고 책을 찾아 읽었다. 코맥 매카시는 미국의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로 알려져 있다. 이 소설가의 작품은 여러 편이 영화화되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영화는 아카데미 작품상에 빛나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이다. 이 작품 역시 영화를 먼저 보고 책을 찾아 읽었다. <더 로드>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모두, 원작에 충실한 영화이다. 책을 읽으면 영화 속 장면들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스릴과 인간에 대한 성찰, 이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싶은 이에게 <더 로드>를 권한다. 최근 몇 년 동안 본 영화 중 가장 강렬하고 서늘한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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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 갑자기 오한이 듭니다. 정상인도 바뀐 상황에서는 비정상인이 되어버리는 공포라니요.. T.T

사는 게 각박해지면 인심이 바뀐다고들 하지요. 그 극한의 상황을 본다고 생각하면 되겠지요. 오싹합니다.

ㄷㄷㄷㄷ
사람이 제일 무섭다는게 맞는 말인거 같아요

네 딱 그 말이 적절합니다ㅎ 넘 무서웠어요~~!

리뷰만 봐도 공포가 생기는 듯 합니다.ㅠㅠ

팥쥐 엄마가 준 공포에 비하면,, ㅋ

왠지 좀 무서울 것 같습니다.

감각적인 공포보다 생각으로 느끼는 무서움이랄까요. ㅎ

리뷰를 읽는데도 긴장하게 되는 공포가 넘어 오네요. 솔메님~~~~~~ 안녕하시죠? 너무 오랫만에 들어왔나봐여. ㅎㅎ

해피써클님, 행복의 써클 속에서 살고 계신가요?^^
저도 예전보다 뜸~하게 들러서 한 번씩 글쓰고 흔적을 남긴답니다. 오래된 이웃들 흔적 간간이 볼때 참 반갑더라구요. 즐거운 나날 보내시길 바랍니다!ㅎ

li-li님이 kyslmate님을 멘션하셨습니당.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연결되용~ ^^
li-li님의 평론가들의 도서리뷰 # 66 (19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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