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오후 네시 -- 타인은 지옥

in #booksteem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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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가 한 말, "타자는 지옥이다"는 너무도 유명한 말이다.

맛는 말 아냐?

마누라는 지옥이다! 이와 동시에 남편은 마누라에게 지옥이다! ㅋㅋ 지옥을 체험 하려면 결혼하면 한 달 이내에 지옥을 경험하시게 된다? 무덤 지대로 파는 거지,,,,

물론 연애할 때도 지옥은 경험된다.

내가 아닌 타자는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너를 좋아하는데, 너는 내가 좋아하는 만큼 나를 좋아하지 않아서 슬프다,,, 이런 감정. 이 때 내 마음은 지옥으로 변한다.

타인을 소유하려는 욕망이 극단적으로 치닫으면 타자의 목숨을 빼앗아라서라도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감각의 제국>이 되는 거다.​

동일시의 극단화!​

​내가 타자의 마음을 송두리 채 소유하지 못한다는 사실,,,,여기서 비극은 시작된다. 어떻게 하면 타자의 마음에 들 것인가?​ ​이제 나는 타인 (남편 혹은 아내, 자식, 친구, 선배, 직장 상사, 도덕률)의 시선을 의식하기 시작한다. 타인은 나의 행동을 제약하는 외부 변수가 되는 거다. 그럼 그러한 타인의 시선에 제약받는 삶은 나의 온전한 삶인가? 아님 타인의 삶인가?​

타인을 의식하고, 타인의 마음을 사로 잡기 위해, 타인에 인정받기 위해 살 것인가? 이러한 타인의 시선을 개무시하고 내가 원하는 삶을 살 것인가?

타인의 시선을 개무시하기는 힘들다. 타인은 나에게 '너는 이런 놈이야' 라고 딱지를 붙인다. 너는 빨갱이야, 너는 보수 꼴통이야,,,,너는 친일파야,, 이 때 나는 과연 타인들이 나에게 부여한 객체성을 무시할 수 있을까? 그래서 타인과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되, 타인을 지나치게 의식하지 않고 내 맘대로 행동한다! 말이야 쉽지 실제 살아가는데 어려움이 많다는 것을 알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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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별도로 우리는 과연 자신 스스로에 대해 잘 아는 존재인가, 라는 문제를 생각해보자.

나는 내가 누구인지, 나 스스로 잘 아는가? 내 안에 수많은 "내"가 있다고 어느 가수는 노래했다. (도플갱어 혹은 정신분열?) 당신은 당신을 자신있게 규정할 수 있는가?

오우,,,,, 노우!

정리하자면 인간은 자신이 무엇인지 스스로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타인의 자신에 대한 시선을 의식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나의 행동은 온전한 나의 행동이 아니게 된다. 이 때 중요한 것은 타인이 나를 보는 시선을 통해 나는 '나'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모르는 나!

소설 <오후 네시>는 타인을 통해 나를 성찰하고 바라보는 이야기이다. 정년퇴직한 노부부가 한적한 시골에 내려온다. (전원생활) 너무도 좋은 집을 발견한 것이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상상하라) 그러나 이내 지옥으로 바뀐다.

옆집 사는 늙은 의사가 매일 오후 네시만 되면 집에 와서 차를 마시다가 6시에 돌아간다. 처음엔 반갑게 맞이 하지만 매일 아무 예고도 없이 오후 네시만 되면 당연하다는 듯이 집에 찾아오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예의와 배려가 몸에 밴 두 노인네들은 내키지 않은 방문객 때문에 서서히 변해가기 시작한다. ​어떻게 변해가느냐구요? 알고 싶으면 소설을 읽어 보시면 됩니다. ^^

배려와 예절바름으로 평생을 교사로 살아 온 남자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세계관이 오후 네시의 방문객으로 인해 처절하게 무너지면서 급기야.........

이 소설이 말하는 바는 지금 당신은 당신의 본 모습이 아닐 수도 있다! 정도?​ 암튼 인간은 타인으로 인해 내가 모르는 (혹은 몰랐던) 나의 존재를 새롭게 ​볼 수 있다는 것이며, 타인이라는 지옥을 통과해야만 진정한 나를 만날 수 있단다. 그럼 타인은 짜증나는 존재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필수불가결한 존재라는 거네.​

엉뚱하게도,,,,

이 책을 읽고 전원생활이 정내미 떨어지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 (뭐 그렇다고 서울 생활이 오지게 잼있는 것도 결코 아니지만) ​혼자 살면 신경 쓸 일 별로 없이 딱 좋은데,,, 그럼 또 외롭고,,,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한단 말인가?​ 아후 머리 아포라.

​PS>

타자의 문제는 참으로 어렵다.

서양철학에서 동일성과 타자의 문제가 나온다. ​타자에 대한 존중이 아니라 타자를 나와 동일하게 흡수해 버리는 사상이 서양철학의 주류였다. (임마뉴엘 레비나스 같은 경우는 예외지만)​

다양성의 말살, 나찌가 대표적이다. 게르만 민족이라는 동일성을 유지하기 위에 유태인을 죽여라. 지금은 기독교 혹은 이슬람이 자신의 종교 외에 타자를 인정치 않고 서로를 잡아 죽인다. 이러한 사상은 서양철학의 시작인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으로부터 이어져 온, 뿌리 깊은 것이다.

이데아 이론을 보라. 천상의 이데아가 있고 현상되는 나머지는 전부 가짜다. 물론 가짜는 진짜 이데아보다 폄훼되고 무시되는 가치판단이 진행된다.​​ 타자를 인정하자는 다양성의 존중은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칭해지는 들뢰즈를 기다려야 했다.

동양철학은 이데아고 뭐고 필요 없고, 서로를 인정하면서 조화로운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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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r article is very exciting!

아핫... 이 소설 잼나게 읽은 기억이... ^^

요즘 실존주의 철학자들에게 자꾸 손이 갑니다. 그만큼 타인을 의식하는 사회에서 지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가 타인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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