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예능의 역사를 돌아보며.

in #busy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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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참담한 심정. 저와 똑같을 겁니다. 하지만 여러분 절대로 좌절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한국축구는 다시 일어설 겁니다."

이 멘트는 이경규가 1998 프랑스 월드컵 특집 '이경규가 간다' 촬영차 한국과 네덜란드의 조별리그 2차전(5:0 패배로 붉은악마가 새벽이슬을 맞으며 눈물을 흘렸다는 그 경기다.)을 보고 울먹이며 남긴 한 마디다. '이경규가 간다'는 내가 기억하기로 대한민국에서 월드컵이라는 소재로 예능 프로그램을 만든 첫 번째 사례이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당시에는 1무 2패라는 참담한 결과 때문에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4년 후, 2002년 한·일 월드컵을 맞이하여 이경규가 간다는 특별편성 형식으로 부활하였다. 대표팀의 4강 신화에 편승하여 월드컵 예능으로 돌아온 이경규가 간다는 대박을 쳤고, 방송가에 월드컵이 대목일 수 있음을 각인시켰다.

2006년, 독일 월드컵을 맞이하여 '월드컵 대목'은 돌아왔고, 2002년 이경규가 간다의 대성공을 기억하는 방송 3사는 월드컵 중계진들과 함께 자사의 주력 프로그램 출연자들과 스태프들도 독일로 파견하여 본격적인 월드컵 예능 경쟁의 서막을 올렸다. 특이한 점은 당시에는 막 독립편성된 '무한도전'의 월드컵 특집이다. 이전에도 내가 쓴 적이 있지만, 무도의 월드컵 특집은 방 두 개에 각각 무도 멤버들과 한국에 거주하는 아프리카인들을 모아놓고, 같은 날 대한민국과 토고의 독일월드컵 예선 1차전을 보게 하면서 환호와 아쉬움이 교차하는 장면을 편집했다. 상당히 신선한 시도였다. 우리도 상대팀도 똑같다. 득점에 기뻐하고 실점에 슬퍼한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었다. 독일 월드컵에서 대표팀은 1승1무1패의 준수한 성적을 냈지만, 불운으로 16강에는 들지 못하였다.(한국의 성적은 당시 16강에 들지 못한 팀들 중 가장 성적이 좋았다고 한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은 SBS의 원맨쇼였다. SBS는 대한민국에서 남아공 월드컵의 중계권을 거머쥔 유일한 방송사였다. 그러기에 월드컵 관련 프로그램에 자사의 모든 역량을 쏟아부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부진하던 자사의 일요 예능 프로그램을 재정비 차원에서 휴방조치하고(이 휴방조치 이후 탄생한 예능이 바로 런닝맨이다.) 그 대신 월드컵 특집 예능 '태극기 휘날리며'를 편성하여 대대적인 월드컵 대목 싹쓸이에 들어갔다. 2010년의 특이한 점은 아이러니하게도 원조 월드컵 예능인인 이경규의 행보다. 당시 이경규는 MBC를 떠나 KBS에서 '남자의 자격'을 하고 있었는데, 남자의 자격팀도 월드컵 예능 촬영차 남아공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월드컵 영상의 사용권은 SBS에 있으니 경기가 벌어지는 현장은 담을 수 없고 응원하는 모습만 내내 잡아야했다는 안타까운(?)일이 있다. 남아공 월드컵에서 대표팀은 사상 첫 원정 16강을 달성하였다. 여러모로 SBS의 승리였다. 현재와 미래를 모두 잡았으니.

바로 4년 전인 2014 브라질 월드컵. 그곳은 말 그대로 붕괴의 현장이었다. 중계권은 방송 3사가 나누어 쥐었다. 다시 월드컵 대목 경쟁이 시작되었다. 주력 프로그램 출연진들은 브라질로 다시 파견되었다. 브라질 뿐만이 아니라 거리응원 현장에도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대표팀은 98년 이후 최악의 성적인 1무 2패로 탈락하였다. 성적 뿐만 아니라 내용도 최악이었다. 98년의 1무2패가 한국축구와 세계축구의 격차가 너무 컸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발생한 패배라면, 2014년의 1무2패는 철저하게 자멸에 가까운 졸전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브라질 월드컵을 소재로 예능을 만드는 이들이 어떤 기분이었는지를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무한도전'의 브라질 월드컵 응원 특집, 특히 알제리전 방송분이다.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참패 경기 중 하나이기도 했던 그 경기 위주로는 도저히 다룰 수 없어서 원래대로라면 곁가지로 들어갔을 내용을 집어넣어 간신히 1회분을 만들었다. 마침 그 경기는 다른 프로그램들도 '타깃'으로 삼은 경기였기 때문에 무도 팀은 '힐링캠프'나 '우리동네 예체능', '아빠 어디가' 등 다른 예능 프로그램 촬영팀과 연예인들을 마치 '번개'하듯 줄줄이 만나게 되었다. 그 경기를 다룬 거의 모든 프로그램들이 이런 식이었다. 그렇게 거품은 무너졌다.

결국 월드컵 시즌에 맞춰서 내는 예능 프로그램의 성패는 대표팀의 성적에 크게 좌우될 수밖에 없다. 한국축구의 신화를 써내려간 2002년부터 '졌지만 잘 싸웠던' 2006년, 그리고 원정 16강을 달성한 2010까지의 '황금기'에는 월드컵에서의 선전에 편승하여 월드컵을 다룬 예능도 흥행을 거두었지만, 2014년의 경우 최악의 성적과 함께 브라질에 간 모든 예능은 동반침몰하였다. 결국은 이겨야 재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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