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시작하며

in #cabincrew6 years ago (edited)

image“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흥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처음 읽은 게 언제쯤일까. 오랫만에 책장의 책을 빼 첫 장을 넘겨본다. 1993년 8월 9쇄로 발행된 책에서 나는 이 말을 처음 만났다. 이런 사랑과 앎의 교훈을 처음 건넨 이는 조선시대의 어느 문인이고, 유 교수는 미술에 대한 안목을 갖추기를 어려워하는 이들의 질문을 듣고 고민하다 이 말이 정답일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답사기>의 서문에 소개하고 있다.

어리버리 4년차 승무원이던 내게 큰 깨달음으로 다가온 이 말을 제법 가슴 깊이 품었던가 보다. 내가 하는 일, 거기서 만나는 사람들, 세상, 여행, 책, 영화, 음악 등등 그 모든 새로운 것을 만나거나 접할 때마다 그 말이 떠올랐다. 그 위력은 사뭇 놀라웠다. 그닥 새로울 것 없는 익숙한 일상도 사랑의 시선으로 쳐다보니 놀랍게도 새롭게 보였다. 새로운 곳으로 떠나는 분들을 만나는 일, 새로운 경험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분들을 만나는 일. 나는 어쩌면 이런 내 일을 그때부터 더 많이 사랑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최근 끝난 드라마 주인공의 직업은 영화 음향감독이었다. 그가 철부지 동생에게 음향일을 가르치는데, 감독입봉의 일념으로 형 몰래 시나리오를 쓰는 동생은 음향일에는 관심도 없다. 그러니 주인공이 시키는 일을 재대로 못 해내 계속 야단맞고 지적을 당한다. 밤의 소리가 다르고, 서해와 동해의 파도 소리가 다르며, 그냥 차는 깡통 소리와 화가 나서 차는 깡통 소리가 다르다며, 주인공은 동생을 가르친다. 어느 날 주인공은 동생에게 햇살 비치는 환한 창을 열 때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소리가 없다며 그 소리를 찾으라고 한다.

이후 동생은 어린 여자친구를 녹음실로 데려와 “음향”이 안들어간 창을 여는 영상과 음향이 들어간 영상을 보여준다. 햇살 비치는 소리를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나는 그 장면을 보고 정말 깜짝 놀랐다. 드라마는 두 번의 영상을 보여준다. 한번을 창을 열 때 자동차들이 지나가는 소음을 깔았고, 한번은 아이들이 웃고 떠들며 노는 소리가 들어갔다. 그 두 가지 확연히 다른 소리가 들어감으로써 그저 창을 여는 영상이 주는 이야기가 달라져버렸다.

우리는 일상을 어떻게 기억할까? 일상은 영화의 한 장면과 달리 시각의 홍수 속에서 부리나케 흘러간다. 무심코 지나치기 일쑤인 일상의 시간들을 우리의 기억 속에 자리잡게 하는 건 그런 특별한 ‘소리’와 ‘결’이 아닐까? 하나의 시각적 이미지를 청각과 질감 등 공감각으로 엮음으로써 우리는 거기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깊은 기억 속으로 저장한다. 일을 하며 만나는 승객들에게 밝고 환하게 말하라고 수도 없이 교육받았다. 나 또한 함께 일하는 후배들에게 같은 얘기를 늘 하지만, 그 의미를 찾아내지 못했다. 내가 진심으로 건넨 환한 말 한 마디가 누군가의 기억 속 영화의 ‘음향’이 되어 그 기억의 생생함을 배가시킨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우리의 여행은 어떤 소리로 시작될까? 여행용 신발이 내는 자박자박 발걸음 소리, 그 뒤를 따르는 공항 바닥 위 짐가방 롤러 구르는 소리, 멀리서 메아리치는 탑승 안내 방송 소리. 그렇게 긴 탑승구를 지나 타고갈 비행기의 입구에서 승객들을 맞는 승무원들의 소리를 만난다. “안녕하세요. 어서오십시오. 탑승을 환영합니다. 파리까지 모시겠습니다.”
승객들의 부푼 마음처럼 에너지로 충만한 그 밝고 환한 인사의 목소리는 아침 햇살 비치는 큰 창을 열 때 들어오는 햇살 소리라고 해도 좋다.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멋진 음향효과라고 해도 좋다. 수백 명의 승객들이 내 목소리를 배경 삼아 멋진 여행의 출발을 기억할 것이라 생각하니, 인사를 건네는 내 마음도 더 큰 사랑으로 충만해지는 걸 이제 나는 날마다 느낀다.

조선과 오늘을 이어준 유흥준 교수의 그 글 한 줄과 드라마에서 알게 된 “소리 없던 것들에 입혀진 소리”. 이처럼 내가 만나는 세상을 더욱 풍성하게 살아 있는 현실로 만들어주는 게 무엇인지를 하나씩 깨닫는 일은 늘 놀라운 경험이다. 더구나 그것이 내 일터에서 고객으로 만나는 누군가와의 첫 만남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 것이라 생각하니 더욱 소중하다. 깨달음 이후 보이는 것은 정말 예전같지 않다. 이토록 소중하고 이토록 생생하고 이토록 충만하니 말이다.

Sort:  

반갑습니다!!
steemit.com/@easysteemit
에 들르시면 좀 더 스팀잇이 친숙해 지는데 도움이 되실듯 합니다:)
한국어 태그는 kr 을 추가해 주시면 더 좋구요-

스팀잇은 아직도 어렵네요.

많이 가르쳐 주세요~!

한국말로 쓰고 한국 사람들에게 읽히려면 아무래도 kr-로 시작하는 태그를 많이 달수록 좋습니다. 현재 많이 쓰이는 태그들은 여기를 참조하세요: https://steemit.com/kr/@myfan/5-7

@lilykim, congratulations on making your first post! I gave you an upvote!
Please take a moment to read this post regarding commenting and spam. (tl;dr - if you spam, you will be flagged!)

Congratulations @lilykim! You have completed some achievement on Steemit and have been rewarded with new badge(s) :

You published your First Post
You got a First Vote

Click on any badge to view your own Board of Honor on SteemitBoard.
For more information about SteemitBoard, click here

If you no longer want to receive notifications, reply to this comment with the word STOP

Upvote this notification to help all Steemit users. Learn why here!

Coin Marketplace

STEEM 0.28
TRX 0.12
JST 0.033
BTC 69101.20
ETH 3740.70
USDT 1.00
SBD 3.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