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steem]대한민국에서 중국인을 이해하려 한다는 것[김명호. 중국인이야기2]

in #jjangjjangman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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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나 초한지 수준을 넘어 근 현대사에 우리 역사에 끼어들었던 중국 공산당과 중국인을 진지한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 그들을 이해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적어도 노태우 정권까지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2차 대전 이후 세계는 이념이라는 거대한 장벽을 세우고 둘로 나뉘어 서로를 백안시 했다. 때문에 폐쇄적인 국사정권하의 한국에서 장벽 저쪽에 있는 중국이라는 나라를 알 수 있는 자료는 많지 않았다.

70년대 군사독재정권하에서 중국을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기까지 했다. 중국과 국교가 수립되고 최대 무역 상대국이 된 지금까지도 우리는 중국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함부로 탐구하기가 껄끄러운 것이 현실이다.

  • 몇 권의 문학 서적과 한 권의 르뽀 문학 [중국의 붉은별]이 그 목마름을 해결해 줄 뿐이었다.

1930년대 에드가 스노의 [중국의 붉은별]이 거의 유일하게 중국 홍군을 취재한 르뽀라고 할 수 있었다.

펄벅의 『대지』가 1900년대 중국 농민의 삶의 애환을 처음으로 그렸다면,

장 융의 자전소설 『대륙의 딸들』은 군벌시대로부터 문화혁명까지의 3대에 걸친 역사를 보여준다. 1900년부터 100년간에 근현대사를 다룬 이 책은 가히 금세기 최고의 중국 논픽션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을 읽었을 때의 감동이 기억난다. 개인적으로 [중국의 붉은 별] 보다 대장정과 문화혁명의 디테일한 결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두 권의 책은 사건의 소용돌이 안에서 함께 휘둘리며 살아간 사람들의 보고서일 뿐이다. 중국사회에 일어난 사건들을 원인과 결과를 맞춰가며 입체적으로 보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함부로 중국이야기를 다룰 수 없었던 군사정권 하의 우리나라에서는 리영희의 [5억인과의 대화]등과 같이 기 출판 사료들을 엮어 중국을 설명하는 정도의 책들 밖에 낼 수 없었다.

그러나 드디어 한국에서도 중국의 군벌시대부터 홍군의 혁명을 거쳐 대장정과 국공합작, 공산당정권의 수립과 문화혁명은 물론, 국민당의 타이완행과 마오쩌뚱 이후 자유주의 경제체제의 수용까지를 입체적으로 볼 수 있는 책이 등장했다. [중국인 이야기]이다.

이 책의 사실성과 정확성은 이전의 책들이 보여주던 부분 부분들이 하나의 줄로 엮이게 된다. 예를 들어 중국의 붉은별에서 에드가 스노우가 시안을 거쳐 홍구가 잠입하는 과정은 한편의 스릴러를 방불하지만, 저우언라이와 첫 대면하는 장면을 <중국인 이야기2>와 <중국의 붉은 별>에서 각각 발췌하여 나란히 병치해 보면 그 때의 장면이 살아나는 듯하다.

"7월 9일, 소련 구역의 첫 번째 초소에 도착하자 말 위에 앉아 있던 사람이 악수를 청했다. 얼굴이 수염투성이었다. "현상금 8만 원에 지명수배된 저우언라이"라며 자신을 소개했다" (<중국인 이야기2>, 431쪽)

"곧 몸이 가냘프고 중국인으로서는 유별나게 검은 수염이 많은 젊은 장교가 나타났다. 그는 나에게 다가와 부드럽고 세련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안녕하시오, 누군가를 찾고 계시다구요?" 그는 다름아닌 영어로 말을 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이내 그가 그 유명한 주은래임을 알았다. ......주은래의 숙소 앞에는 장개석이 그의 목에 8만 원의 현상금을 걸어놓았음에도 한 사람의 보초만이 서 있을 뿐이었다."(<중국의 붉은 별>, 57~59쪽)

김명호의 [중국인 이야기]는 중국 땅에 산 인민들의 삶이 어떠했는지, 혁명의 주체들이 어떻게 일어나서 인민들에게 다가갔는지, 홍군이 어떻게 오늘날의 중국 공산당이 되어, 어떻게 중국의 정치체제가 정립되고 오늘날에 이르렀는지, 어떤 사건들이 있었고 거기에 누가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중국 근 현대사를 살아온 생생한 삶의 모습들을 소개하며 수많은 중국인들의 삶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나라의 역사를 보여준다.

이제 이 책을 읽으면 중국의 근 현대사를 이해할 수 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보고 로마를 이해한 독자라면 이제 [중국인 이야기]를 읽으면 로마보다도 중국이 더 생생해 질 것이다. 더구나 [중국인 이야기]는 재미있기까지 하다. 로마인 이야기처럼 시대를 따라 긴장되었다 늘어지거나 하지도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살아서 펄떡거리는 사람의 이야기, 삶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1 여성 혁명가들의 행로
017 옌안의 홍색공주 쑨웨이스
027 손자도 극형에 처한 여장부 캉커칭
031 최후의 정통파 자객 스구란
037 중국 최초 할리우드 스타의 비극적 생애
047 루쉰 이후에 장아이링이다
2 펑더화이와 마오쩌둥의 애증
057 펑더화이, 마오쩌둥을 비판하다
105 중공의 한국전쟁 출병, 펑더화이와 김일성
3 학력보다 학력이다
141 소박한 국학대사 나라의 품격을 높이다
155 ‘자본론’마이푸, ‘셰익스피어’ 번역한 량스치우
163 재녀들 속에 방황하는 서정시인 쉬즈모
4 국부 쑨원의 경호원
195 나에겐 혁명정신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217 바람둥이 쑨원 쑹칭링이게 청혼하다
227 수완좋고 대범한 혁명의 후원자 쑹자수
247 국부 쑨원의 경호원
265 중국의 마키아벨리 량스이
273 돈으로 총통이 된 군벌 차오쿤
5 사랑과 혁명
289 사랑이 전쟁보다 힘들다
325 시안사변과 좡쉐량의 반세기 연금생활
339 매국노로 전락한 혁명영웅, 그를 사랑한 여자
353 연애도 혁명처럼 1: 뤼이눙 네 연인
367 연애도 혁명처럼 2: 선동가 리리싼의 좌절
6 매화를 사랑한 정보총책 다이리
405 장제스의 머리 양융타이, 마오의 눈 우스
427 에드거 스노, 홍군을 전 세계에 알리다
439 밤새워 중국의 미래 논한 량수밍과 마오쩌둥
447 한 번도 실각한 적 없는 리셴넨의 행보
ISBN: 9788935662197

  • 우리에게 익숙한 쑨원과 마오 팩덕회와 김일성관련내용 일부만 소개합니다

나에겐 혁명정신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 “ 나라의 환부를 도려내는 국의(國醫)를 하겠다.” >

쑨원에게 좋아하는 것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가 혁명이었다. 쑨원에게서 혁명은 그 시대에 태어나 서양 문물을 접하고 부패된 청말시기 왕정을 몰아내고 새로운 나라를 갈망하는 한족들의 염원을 등에 업은 사명이기도 했다. “사람 치료하는 인의(人醫)로 평생을 지내느니 나라의 환부를 도려내는 국의(國醫)”를 하겠다는 그의 결단에서도 엿볼수 있다. 둘째는 여자였다.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남자는 세상천지에 없다...”(p198) 쑨원의 대답을 들은 이누카이는 무릎을 치며 화답했다. ‘열 여자 싫어하는 남자 있겠느냐’
셋째는 독서였다.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돈이 없어 끼니는 걸러도 책은 구입해 읽었다. 간암의 고통 중에서도 그랬다. “혁명은 부단히 진화한다. 현상만 갖고는 성공과 실패를 가늠할 수 없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는 길은 독서밖에 없다” 고(p199) 밥 보다 책을 소중히 여겼다. 제 2권 p198 (pp195 – 215)

바람둥이 쑨원 쑹칭링이게 청혼하다

구습을 타파코자 민의를 움직인 혁명가들이 질풍노도의 청춘처럼 감정이 끌리는 대로 여인들을 취했다. 마오쩌둥, 장제스도 그랬고 국부(國父)라 불리 움을 받던 쑨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쑨원에게는 조강지처인 루무전(盧慕貞)이 있었고 이십 년간 실질적인 ‘쑨원의 부인’ 으로 대접받던 홍콩 여인 천추이펀(陳粹芬)이 있었다. 그럼에도 쑹자수의 큰 딸 아이링(靄齡)에 눈독을 들이다 실패하자 동생 칭링(慶齡)을 끌어들여 27세의 나이 차를 개의치 않고 쑹칭링 22세 쑨원 49세 때인 1915년 10월 25일 도쿄의 우메야 쇼키치 집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조강지처를 불러다가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게 했고 천추이펀과도 결별했다.
어처구니없는 말을 쏟아내기도 했다.

“쑹칭링과 결혼만 할 수 있다면 다음 날 새벽에 죽어도 후회하지 않겠다”(p222)

천하대사를 함께 논하는 동지들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은 분명 아니었다. 27세 연하의 딸 같은 쑹칭링에게 온 마음을 빼앗겼다. 곱지 않는 시선을 보내는 동지들에게

“나는 혁명가다 수천 년간 내려오는 악습의 지배를 받지 않겠다”고 했다. (p225)

에드거 스노, 홍군을 전 세계에 알리다

< 여름이기도 했지만 방 안에는 온갖 벌레들이 들끓었다. 마오는 간간이 옷을 벗어 들고 나가 한바탕 훌훌 털곤 했다. 평생 목욕을 해본 사람 같지 않았지만 정교했다.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중국의 미래에 얼마나 엄청난 영향을 미칠지 잘 알고 있었다.> 제2권 p434

1935년 10월, 마오가 인솔하는 홍군이 산시(陝西)성 북쪽 바오안(保安)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국민당은 물샐틈없이 봉쇄했다. 홍군은 고사 직전이었다. 2만 5,000리의 장정으로 기력을 상실한데다 산베이(陝北)의 빈곤은 상상을 초월했다. 마오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자신과 전우들이 걸어온 길을 후세에 전설로 남기고 당의 기본방침이 “항일 근거지와 통일전선의 구축” 이라는 것을 외부에 알리고 싶었다. 상하이의 지하조직을 통해 쑹칭링에게 “믿을 만한 외국기자와 외국인 의사 한 명이 바오안을 방문할 수 있게 해달라” 는 부탁을 했다. 쑹은 항일을 주장하는 학생들의 시위를 적극 지지했던 미국 기자 에드거 스노와 외과의사 조지 하템을 접촉했다. 1936년 7월 11일 밤 9시, 스노와 하템은 저우의 안내로 마오쩌둥을 만났다.

첫 번째 만남에서 마오는 스노우에게 말을 아끼며 먼저 서부전선에 있는 홍군을 만나보라는 권유를 했다. “조사를 하지 않은 사람은 발언할 권리가 없다”는 천하의 명언을 남긴 사람다웠다. 홍군의 주력부대는 바오안에서 200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스노와 하렘은 간쑤(甘肅), 닝샤(寧夏) 일대를 다니며 홍군을 접촉했다. 장정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들을 들었다. 이들은 떼지어 다니는 토비들이 아니었다. “예정보다 더 머물지 않았다면, 마오만 만나고 돌아왔다면, 홍국의 승리가 어디서 왔는지 나는 영원히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홍군은 패할 리 없다. 정치적으로 잘 다듬어진 군대였다.”. 스노가 바오안으로 돌아오자 마오는 본격적으로 10여 차례에 걸쳐 소련 정부의 정책과 항일전쟁의 형세, 민족통일전선의 형성에 관한 것 외에 누구에게도 해본 적이 없었던 성장 과정과 결혼에 얽힌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1936년 10월 중순, 베이핑으로 돌아온 에드거 스노는 미국 영사관 강당에서 서북기행(西北紀行)을 발표했다. 2개월 후 시안사변으로 마오쩌둥과 홍군은 기사회생했고 마오는 옌안에 정착했다. 이듬해 여름(7월 7일), 중.일 양국이 전면전에 돌입한 직후 스노는 런던에서 [중국의 붉은 별](Red star over china)을 출간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외국의 의사와 기자, 작작가들이 몰려들었고 의료지원단, 성금들이 답지했다. 국내에서는 이상을 축구하는 청소년들과 대학생, 문화인들, 연예인들, 홍군 지원군들이 항일성지(抗日聖地) 옌안으로 몰려들었다. 마오쩌둥은 중국식 공공외교의 창시자였다. [중국의 붉은 별]은 대전략과 마오쩌둥이 자신과 홍군을 중국과 전 세계에 선전하기 위한 공공외교의 산물이었다.(pp427-437)

펑더화이, 마오쩌둥을 비판하다

< 진리는 하녀의 속성이 있다. 권위에 의존해야 빛을 발한다. 권위가 약한 진리는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둔갑한다. 대다수가 진리를 숭상하는 것 같아도 실상은 권위를 숭배하기 때문이다. 펑더화이는 이 점을 간과했다. > 제 2권 p72

1535년 7월 초, 토머스 모어는 유토피아를 꿈꾸다 단두대 앞에서 사라져 갔다. 1824년 로버트 오웬의 뉴하모니타운 공산주의 실험장은 5년을 견디지 못했다. 비슷한 시기에 카를 마르크스는 토마스 모어의 이상과 인류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길을 과학적으로 천명했다. 마오쩌둥은 유아원과 양로원, 상점, 학교, 농장, 등이 공동으로 운영되는 표준형 유토피아를 구상했다. 1958년 대약진 운동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인민공사를 통해 하루 세 끼를 공공식당에서 무료로 먹었다. 일을 열심히 한 사람과 빈둥거리며 눈치만 보던 사람의 배당량이 똑 같았다. 이성적인 미몽(美夢)이 하루아침에 비이성적인 악몽으로 둔갑했고 아사자가 속출하고 연료가 바닥났다. 이러한 상황을 펑더화이는 “주석의 심리를 살피느라 진실을 말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며 거침없이 소신껏 맹렬한 비판을 통한 재고를 요청했다. 마오쩌둥은 대약진 운동에 문제점이 많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부정당하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펑더화이는 그것을 간과했다. (pp57 – 104)

중공의 한국전쟁 출병

< “많은 동지들이 출병을 반대한다.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일이 있다.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을 치르는 동안 조선 인민과 당의 동지들은 우리의 혁명을 위해 피를 흘렸다. 조선은 수백, 수천 가지 이유를 들이대도 바뀔 수 없는 혈맹이다.” > 제 2권 p111

하지만 중공은 서울까지 밀고 내려온 후에 철수를 경정하면서 김일성과 사이가 벌어집니다.
이하 김명호 교수의 한겨례레 기고문 발췌입니다.

펑더화이는 김일성이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서울을 점령한 중국인민지원군이 더 이상 남하를 거부하고 철수를 결정했을 때는 펑더화이의 집무실에 달려와 멱살 잡고 집기를 때려부수며 온갖 욕설을 퍼부어댔다. 서로 권총을 빼들기 일보 직전에 참모들이 달려와 말리지 않았더라면 무슨 해괴한 일이 벌어졌을지 모를 정도였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김일성은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았다. 평양에 전쟁전람관을 만들면서 중국지원군에 관한 내용은 거의 무시해버렸다.
중국 정부도 북한의 행동에 불만이 많았다. 외부에 발표는 않았지만 평양 주재 대사직을 3년간 공석으로 내버려뒀다. 저우언라이도 섭섭함을 드러냈다. 베이징 주재 북한대사관이 초대한 만찬에 참석은 해도 북한 주재원들과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 귀갓길에 불편을 토로했다. “그간 우리는 정말 하느라고 했다. 조선의 산수와 초목을 아끼고 사랑하라는 마오 주석의 지시에 따라 조국과 매한가지로 파괴된 조선의 회복에 열정을 다했다. 그래도 저 사람들은 우리를 믿지 않고 감격해하는 기색이 전혀 없다.”

저우언라이는 틀린 말을 하지 않았다. 중국은 정전 3개월 뒤부터 북한의 전후 복구와 건설에 집중했다. 철도를 복구시키고 크고 작은 교량 1300여개를 새로 만들거나 원래의 모습을 되찾게 했다. 평양은 물론이고 함흥, 원산 등에 대규모 공병대를 투입해 전쟁으로 파괴된 도시를 새롭게 변모시켰다. 58년 철수 때까지 북한 재건에 참여한 연인원만 1000만명이 넘는다고 중국 쪽은 기록했다. 펑더화이의 후임으로 지원군 사령관을 역임한 양융(楊勇)의 보고서가 눈길을 끈다. “참전 이후 8년간 조선 인민들을 위해 공공건물 881개와 주택 4만5000여채를 우리 손으로 직접 지었다. 제방 4000여개와 댐 건설도 지원군이 나서서 추진했다. 심은 나무가 3600여만그루에 달하고 인분 1300여만톤을 우리가 직접 밭에 뿌리는 바람에 지원군 병사들 근처에만 가도 똥 냄새가 코를 찔렀다. 지원군 병사들은 조선 형제들을 위해 의식주도 절약했다. 양식 2100여만근(斤)과 의류 59만점을 주둔지 인근 주민들에게 제공해 이들을 재난에서 구했다. 전투가 치열했던 지역의 주민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살 곳이 마땅치 않았다. 이들에게 집을 지어주고 인근에 매설된 지뢰를 제거하느라 우리 병사들은 하루도 쉴 틈이 없었다.”

1956년 소련 공산당이 스탈린의 개인숭배를 비판한 다음부터 김일성 비판은 하루가 다를 정도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위기를 느낀 김일성은 고위층 간부들에게 칼날을 세웠다. 중국과 가까운 연안파부터 손을 댔다.
마오쩌둥도 북한의 옛 동지들이 체포되거나 당에서 쫓겨나자 “스탈린과 다를 게 없다. 귀에 거슬리는 말을 단 한마디도 듣기 싫어한다. 상대가 누구건 반대만 하면 무조건 죽여 없애려 한다”고 직접 김일성을 비난했다. 이어서 펑더화이를 평양에 파견했다.

펑더화이는 “마오쩌둥의 뜻”이라며 연안파를 숙청한 조선노동당의 결의안을 취소하라고 김일성을 압박했다. 김일성은 조건을 달았다. “지원군을 철수해라. 수십만 군대가 우리 땅에 머무는 것을 더 이상 바라지 않는다.”

마오는 김일성의 철군 요구에 동의하지 않았다. 잘못을 인정하라며 김일성을 몰아붙였다. 베이징 주재 소련대사를 만난 자리에서도 김일성을 티토와 히틀러에 비유하며 호되게 매도했다.

6·25 전쟁 정전 이후 중국지원군은 철수를 주저했다. 1954년 7개 사단이 철수하고, 55년 3월에 6개 사단이 북한을 떠났다. 1956년 4월 북-중 관계가 심각해졌을 때도 44만의 지원군이 북한에 주둔하고 있었다. 완전히 철수하기까지는 2년이 더 걸렸다.
출처

감사합니다. @ra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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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팅소녀 이미지는@cheongpyeongyull 님이 그려주신 작품입니다.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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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소개 감사합니다!

제가 20대 청년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 한국에 처박혀 있지 말고 세계로 돌아다니라는 말입니다. 문화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 가서 직접 체험하라는 의미지요. 중국과 일하면서 중국에서 살아보니 충격 그 자체였거든요. 한국인에겐 충격인데 중국인에겐 당연한 것, 그것이 바로 문화였습니다. 한 예로 남을 속여서 이득을 취하면 우리는 나쁜 짓이라고 생각하지만, 중국인들은 그걸 능력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건 차원이 다른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문화적 차이지요.

김명호 교수님은 북중 관계에 대한 이해가 깊은 분이시죠. 저도 읽어보고 싶네요. 소개글 잘 읽었습니다.

가까운 그래서, 먼 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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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와 중동사는 너무 복잡해서 대학생 때에 한 번 손댔다가 앞 몇 장에서 포기한 적이 있네여. 전공도 수학쪽이라서 전혀 생소해서...

이제는 한번 읽어보고 싶은 책입니다. 기억 했다가 나중에... ^^
책 읽기가 왜 이렇게 힘든지.
스팀잇을 끊어야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중국 리더들의 이야기, 중국과 북한의 이야기들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도 훌륭하신 북스팀을 보았습니다 ㅎ
항상 느끼는거지만 대단하세요 ㅎ

흥미로운 이야기에 빠져 봅니다.
북스팀은 홈피가 따로있나요. 아니면 태그만 북스팀을 다나요.

재미있네요.ㅎㅎ 서프라이즈에서 몇가지 본 일화도 있고.^_^ 이런 놀라운 이야기 좋아합니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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