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미한 성대결에 염증이 납니다

in #journalism6 years ago

<여성도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성별 관계없는 국가의 보호를 요청합니다.> 국민청원이 30만명을 넘어섰습니다. 남성이 피해자인 홍대 누드크로키모델 불법촬영 사건의 처리 과정을 본 여성들이, 국가가 여성은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여성들이 느끼는 불안과 공포는 존중되어야 합니다. 분명 검찰, 경찰, 그리고 사법부가 신뢰를 기울여야 할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남성들의 인식이나 태도도 바뀌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우리 사회의 현실을 과장하여 말하는 것이 문제해결에 도움을 줄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성들로서도 불안과 공포가 과장되어 패닉에 빠지면 심리적으로 더 힘들어지기만 할 뿐입니다. 분노의 에너지는 커졌는데 문제해결과 상관없는 여론몰이와 성대결에 힘을 빼는 느낌입니다. 담론 역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불안, 공포, 분노를 방관하거나 부추기고 있습니다. #동일범죄동일처벌 , #동일범죄동일수사 와 같은 해시태그를 보면 막막해집니다.
 
 
무엇보다 생각의 전제가 어긋나 있다고 봅니다. 한국 사회가 남성중심 문화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사회란 건 맞는 얘기라 봅니다. 하지만 남성중심 문화는 과연 남성의 피해와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할까요?
 
 
단적으로 남성이 여성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주변 남성에게 호소하면 어떻게 될까요. 남성중심 문화에 젖어 있는 한국 사회에서 많은 친구 남성들은 보통 "왜 안 잤어? 안 예뻤어?" 따위 소리나 합니다. 설령 페미니즘 세례 받은 남성이라 해도 여성에 대해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남성에 대해선 저렇게들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속하게 문제를 해결해주기는커녕, 애초 문제로 보지도 않습니다.
 
 
왜 그러는지를 굳이 묻는다면... 여기에도 성차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경우도 십대 후반 이십대 초반을 돌이켜보면 연상녀들이 허락도 없이 제 몸의 별로 민감하지 않은 부위들을 쓰다듬거린 적들이 기억나지만 그닥 불쾌하지는 않았습니다. 여성들과 차이가 있다면, 유사시에 제가 그들을 힘으로 떨쳐낼 수 있다고 믿었기에(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별 생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남성의 뇌와 여성의 뇌가 크게 다르기보단 그런 조건의 차이 때문에 감정의 차이가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다시 돌아오면, 여하간 남성은 ‘남성의 피해’에 대해 더 둔감한 동물입니다. 저처럼 별 생각이 없는 이들을 표준으로 삼지 민감한 남성들의 호소를 들어주지 않습니다. 남성 역시 남성보다는 오히려 여성의 고통 호소에 더 민감하게 반응할 것입니다. 이런 경향적인 사실을 부정한다면 사실 ‘남성이 여성보다 유리하다’는 식의 진술조차 무의미합니다. 제 생각엔 이런 현상 역시 페미니스트들이 말하는 소위 ‘젠더구조’의 반영인 것으로 보이니까요.
  
  
정리하자면, 남성중심 사회의 남성성은 남성이 고통을 호소할 경우 남성을 괴롭힌 여성을 재빨리 단죄하는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통을 전시하지 않고, 고통을 감내하며, 더 정확히 얘기하면 고통이 없는 척 연기하며 성취를 이룬 남성의 옆에 그를 위무하는 존재로서의 여성을 붙여주는 게 그 문화의 핵심입니다. 사회적 여성성의 상징이 제 몸을 옥죄는 ‘코르셋’이라면, 사회적 남성성의 상징은 ‘갑옷’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본인을 더 크게 전시하고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척 구는 것입니다.
 
 
다시 홍대 누드크로키모델 불법촬영 사건으로 돌아와 봅시다. 저는 성범죄, 디지털성범죄, 그리고 몰래카메라 등이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된 것은 결국 페미니즘 진영의 지속적인 문제제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건이 사회에서 이렇게 크게 공론화된 현상은 페미니즘 운동의 성취입니다.
 
 
그렇기에, 워마드의 그 여성이 신속하게 체포됐을 때 제가 페미니스트라면 ‘페미니즘이 바꾸는 세상은 이처럼 남성의 피해도 해결한다. 이제 세상의 룰이 이렇게 바뀌었다. 사법부와 경찰은 이제 몰카 범죄의 피해자 대다수를 구성하는 여성들에게 좀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식으로 논평을 냈을 것입니다.
 
 
담론형성 가까이에 있는 분들조차 ‘남자라서 이득봤다’, ‘여자라서 손해봤다’라고 말하는 것은 대중의 불안과 공포에 대한 부화뇌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몰래카메라 류 범죄의 피해자 대부분은 여성입니다. 하지만 워마드에도 이미 몰래카메라라고 의심되는 사진은 널리 유포됐습니다.

이번 사건이 신속하게 수사되고 가해자가 체포된 까닭은 피해자가 남성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시간 장소가 쉽게 특정할 수 있을 때에 신고가 이뤄졌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신고하지 않고 몇 달만 시간이 흘렀더라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포토라인에 세우고 구속수사한 게 과잉되었단 평가도 가능하지만 언론의 관심이 집중된 사건의 특성일 뿐입니다.
 
 
더구나 사태 초기 일군의 남성들은 ‘여성이 피해자인 사건’에 비해 진보언론과 홍대 총학 등이 너무나 미온적인 대응을 한다고 규탄한 바 있습니다. 다만 젠더의 차원에서만 바라본다면 서로 억울하다는 식의 ‘불행배틀’로 흘러가기 십상입니다.
  
 
어쩌다가 페미니스트란 분들이 그들의 전공영역이라 볼 수 있는 남성중심 사회 구조의 논리조차 맥을 엉뚱하게 짚게 된 걸까요? 저는 이유를 두 가지로 봅니다. 하나는 다소 관대한 해석이고, 다른 하나는 다소 불편한 해석입니다.
 
 
관대한 해석을 먼저 말씀드린다면, 동아시아 남성성의 특수성이란 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 포함 다른 문화권의 남성들을 보면 성취를 이루지 못하면 급격하게 권력이 줄어듭니다. 가정에 적용하면 남편이 소득이 없어졌을 때 아내의 권력이 금세 강화된다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 동아시아 문화권에선 남성성이란 걸 다소 형이상학적으로 치켜세워 올린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편이나 아버지나 아들이라면 어떤 무능력과 추태를 보여도 여성에게 멸시를 당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규범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런 구조를 잘 못 느끼고, 차별만을 느끼게 됐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남성중심 사회 구조의 핵심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앞서 설명한 바 남성이 남성을 대하는 방식 자체가 페미니스트 여성들이 상상하는 ‘남성연대’와 다릅니다. 남성들은 남성 일반을 보호하지 않습니다. 자기들 패거리라고 생각하는 이들끼리 협력할 뿐이고 다른 패거리 남성들과는 미칠 듯이 싸우고 경쟁합니다. 페미니스트 여성들이 상상하는 ‘남성연대’는 실제의 남성연대라기보다는 그들이 말하는 ‘자매애’를 남성버전으로 뒤집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불편한 해석으로 넘어간다면, 저는 한국 사회조차 이제는 남성중심 사회 구조에서 벗어나고 있기 때문에, 더 정확히는 남성중심 사회 구조가 무너지고 있기 때문에 저분들이 그 논리를 잊엇다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기에 그것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상상이 안 가서 엉뚱한 속성을 덧붙이고 있다는 것이지요.
 
 
거칠게 요약한다면, 남성성이 무너진 곳에 새로운 질서가 들어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만 세부 영역에서 암암리에 남성들에게 주어지던 혜택만 조금씩 남았습니다. 그래서 여성들이 억울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잣대로 본다면 남성들 역시 억울해 집니다. 자기들 눈엔 페미니스트들이 욕하는 대상이 안 보이고 이미 무너졌는데 여전히 그들을 기득권이라 비난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페미니즘은 '너희들의 시대는 갔다'면서도 '남성권력은 무너지지 않았고 강고하다'는 혼란스러운 주장을 합니다. 정세를 명확하게 파악하지 않고 후자를 말하면 말할수록 여자든 남자든 더 억울한 심정만 쌓이게 됩니다. 앞서 말한 ‘불행배틀’ 밖에 할 게 없습니다. 불안, 공포, 분노의 막대한 에너지로 문제해결의 방법을 강구하는 게 아니라 서로 비난만 해대는 것입니다.
  
 
번개의 에너지는 수천만볼트이지만 우리의 삶에 도움을 주지 못하고 여러 가지 것들을 부수기만 합니다. 저는 이 조류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최근 페미니즘 운동의 오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오류란 것은, 그들이 원하는 세상을 만들어나간다는 목적에 전략적으로 기여하지 못할 방책만 자꾸 내세워 상황을 어지럽힌다는 의미입니다. 그 오류를 지적하지 못하고 ‘개저씨’로 몰릴까봐 신주단지 모시듯이 뒷받침한 진보언론/담론의 책임도 적지 않습니다. ‘미러링’이란 담론으로 워마드의 폭주를 방치한 이들이 워마드발 사건 사고에서도 반성하지 못하는 모습은 안타깝습니다.
  
 
#journalism #feminism #kr #krnewbie #kr-newb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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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배틀에서 공감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

좋은 글이네요. 미약하지만 보팅 & 팔로잉 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

여성 혐오를 누가 만들어 내는데요?
글 읽는데 화가 다 치밀어 오르네요
마치 메갈리아가 일베랑 싸운다는 것과 같은 소리군요
홍대 사건 봅시다
이게 인터넷에 뜨고 메이저 언론 어디서도 이걸 다루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홍대에서 자체 진상 조사 한다면서 시간 끌고 피해자에게 2차 테러가 가해지고 나서야 경찰 조사 시작되고 언론에도 잠깐 소개되었죠
번면 이번 유튜버 사건은요? 언론에서 바로ㅠ메인 뉴스로 나오고 경찰 조사도 들어갔습니다.
여성부 장관은 이걸 또 공론화하네요
여성 피해자보다 남성 피해자가 훨씬 고통받는데 여전히 남여 차별 타령이군요
실제 같은 몰카 범죄도 여성 피의자에 대한 검거율과 처벌이 훨씬 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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