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사진(fotografia vivante)

in #kr-art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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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갤러리 엠(Gallery EM)을 찾았다. 지난 4월 12일 오픈했던 이재용의 개인전 <기억의 시선(Memories of the Gaze)>을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김미래 큐레이터가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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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일단 전시된 작품들을 보았다. 갤러리 엠에 전시된 이재용의 작품들은 크게 일명 ‘불상’ 시리즈와 ‘청자’ 시리즈 사진들이었다. 오잉? 그의 사진들은 한결같이 마치 포커스가 빗나간 것처럼 찍혀있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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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시라? 혹 이재용이 삼각대를 사용하지 않고 카메라를 손에 들고 찍은 것 같다고요? 그런데 그가 카메라를 손에 들고 찍었다고 하더라도 피사체의 흔들림 현상이 이상하다. 뭬야? 혹 그가 피사체를 장노출로 찍은 것이 아니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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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의 사진들에서 나타난 흔들림 현상은 장노출이나 손의 흔들림에서 기인되는 것 같지 않다. 왜냐하면 그가 찍은 사진 속 피사체들은 포커스가 완전히 빗나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부처’의 얼굴 특히 눈, 코, 입 부분은 포커스가 정확히 맞혀졌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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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이재용의 사진들은 어떻게 작업된 것일까? 난 그의 사진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았다. 난 그의 사진을 마치 양파 껍질을 까듯이 하나씩 하나씩 벗겨보았다. 헉! 그의 사진은 열라 많은 사진들을 겹쳐놓은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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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이 피사체로 선택한 ‘부처’나 ‘청자’는 평면이 아니라 입체이다. 따라서 그는 하나의 피사체를 다양한 시점에서 촬영할 수 있다. 물론 그는 피사체를 단지 다양한 시점에서 촬영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다양한 시간대에 걸쳐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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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큐의 말에 의하면 이재용은 짧게는 몇 달, 길게는 몇 년에 걸쳐 하나의 대상을 수 백 장의 사진으로 기록한단다. 그는 카메라로 촬영한 졸라 많은 컷들을 컴퓨터에 다운받아 모니터 상에 띄워 겹치기 작업을 한다. 그의 욱성을 직접 들어보자.

“겹치기 작업은 하나의 오브제, 또는 형태의 변화를 갖는 대상을 촬영한 결과물들을 재구성하는 일이다. 시간적 계기 속에서 배열된 이미지들은 형태와 색채에 대한 고려를 통하여 취사, 선택된다. 먼저 표준 이미지를 바탕에 깔고 서서히 각각의 컷들의 농도 혹은 투명도를 조절하면서 원하는 조형과 색감을 탐색해 나간다. 이러한 재구성의 과정은 형사가 범인의 몽타주를 완성해 가는 방식과 흡사하게 선택과 배제가 반복된다. 이에 따라 맑은(淸) 이미지와 흐린(濁)이미지가 교차하면서 전체적으로 수채화 같은 깊이를 갖는 반투명의 복합적 이미지가 출현한다.”

혹자는 영화와 사진의 차이를 운동의 유/무에서 찾는다. 이를테면 영화의 이미지는 폐쇄된 프레임 안에 있는 사진과 달리 운동을 내포하면서 유동적이고 비약적인 전체를 향한다고 말이다. 그런데 이재용의 사진은 그 구분에 딴지를 건다.

사진은 흔히 운동의 ‘순간’을 포착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재용의 사진은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그의 사진은 쇼트(컷)들을 몽타주(겹치기)하여 운동이미지를 출현시킨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이재용의 사진은 폐쇄된 프레임을 넘어 운동이미지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란 말인가? 그는 ‘하나의 대상에게 보냈던 시선들을 어떻게 시각화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기억에 관한 문제의식’으로 보면서 자신의 사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지나간 시선들을 기억을 통해 현재 안으로 되살리는 작업은 사진의 정지된 순간성에 계기적인 시간성을 부여하는 활동이다. 사물 혹은 사태의 정체성은 그것을 바라보던 시선 하나하나의 입장에서는 비교적 뚜렷한 윤곽을 지니는 것처럼 보이나, 차후의 기억을 돌이켜보면 그것은 시간적인 계기가 공간적으로 변형 혹은 수렴된 결과로서 모호하게 나타난다. 과거의 파편적인 시선들은 기억을 통해 현재 안에 집결하여 ‘중첩된 하나’로 떠오른다. 겹치기(중첩)작업은 이렇게 사물을 보는 시각에 대한 인식론적 반성에서 비롯한다.”

이재용은 <기억의 시선> 시리즈를 2009년부터 작업해오고 있다. 따라서 그의 <기억의 시선> 시리즈는 10년이 된 셈이다. 내가 본 그의 <기억의 시선> 시리즈는 ‘기억의 문제’를 ‘사진의 문제’로 탈바꿈한다는 점이다.

그 점을 언급하기 위해 이번 갤러리 엠에 전시된 이재용의 ‘청자’ 시리즈를 사례로 들어보자. 그의 ‘청자’ 시리즈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겠다. 하나는 청자의 ‘순간들’을 겹치기 한 작업이고, 다른 하나는 천으로 감싼 청자의 ‘순간들’을 겹치기 한 작업이다.

후자는 마치 감싼 천이 서서히 풀려 청자를 드러나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다! 그것은 거꾸로 청자를 서서히 감싸 은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드러내면서 동시에 은폐하는 이재용의 ‘청자’ 시리즈는 ‘기억’과 닮았다.

와이? 왜 이재용은 ‘청자’를 천으로 감싼 것일까? 김큐가 나에게 팁을 준다. “‘청자’ 시리즈는 실재 유물인 청자를 촬영한 것이지만, 천으로 감싼 청자는 ‘짝퉁’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사진 속의 청자는 진짜/가짜의 구분을 해체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진-청자’이기 때문이다.

그 점에 관한 한 걸음 더 들어가기 위해서라도 전자의 ‘청자’ 시리즈를 보자. ‘청자’는 일종의 ‘죽은 자연(natura morta)’이다. 그러나 그 ‘정물(still life)’은 ‘순간들’의 겹치기를 통해 운동이미지로 출현한다. 따라서 그것은 마치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이재용‘의’ 사진은 작가로부터 독립해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그것은 관객으로부터도 독립해 있다. 이를테면 그것은 부모로부터 태어나 독립하는 인간처럼 작가와 관객으로부터 독립한다고 말이다.

사진은 자신을 관찰하는 나에게 ‘절대로 이해 못할 것’이라고 속삭이는 것 같다. 사진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해석하려고 하는 나에게 ‘뻘짓’을 그만하라고 당부하는 것 같다.왜냐하면 사진은 말할 수 없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갤러리 엠의 이재용 개인전 <기억의 시선>은 5월 12일까지 전시된다.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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