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집 4화: 블록체인 부부

in #kr-pen6 years ago (edited)

A short summary in English is to be found at the end of this 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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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적으로 보아 혼자 살기에 넓은 집이지만, 웨딩 사진이 거실을 꽉 채우고 있어 그렇지만도 않다.

'치워 버릴까.'

같은 생각을 연속으로 일주일 째 하고 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자마자, 일부러 힘을 주어 말한다.

"치워줘."

시선은 돌리고 있지만 턱으로 사진을 제대로 가리켰는지, 다행히 되풀이할 필요 없이 작년에 새로 들인 로봇 도우미 H204가 금새 알아들었다. 좀 더 예쁜 이름으로 교체해줘도 되지만, 되도록 주변 존재들에 신경쓰지 않는 편이 내 취향에 맞다. 그러면서도 H204가 사진을 들고 윙윙대며 사라지는 것을 흘끔 확인한 후에야 대형 모니터를 켠다. 컴패터블(Compatible: 양립/호환/화합이 가능한) 1025가 자동으로 켜진다.

컴패터블 1025는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기에 이름을 붙인 몇 안 되는 대상 중 하나이자, 사실상 나와 남편 M의 관계의 기록, 아니 어쩌면 관계 그 자체이다. 이것이 없어지면 '우리'도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세간에서는 컴패터블 1025와 같은 장치를 프라이빗 블록체인이라고들 부르지만, 사용자인 내 입장에서는 21세기 초에도 썼을만한 커플 일기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게 느껴진다. 조금 더 꼼꼼할 뿐.

웨딩 날짜가 아닌, 지역 정부에 혼인을 신고한 날짜 10월 25일을 따서 '1025'을 붙인 것은 내 취향이고, '컴패터블'은 나와 그가 보기에 가장 적절한 가치를 내포한다고 여겨서 선택한 단어이다. 결국 컴패터블 1025라는 이름에는 내 취향이 좀 더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나와 M은 따로 산다. 내가 혼자 살고 싶어하는 이유가 "남편이 싫어서"도, "언제든 다른 남자를 집에 끌고 오고 싶어서"도 아니라는 것을 많은 객관적 데이터로 확인하자마자 M은 그에 선뜻 동의했고, 그러는 바람에 나도 그만 이 결혼에 동의해버렸다. 우리 세대에서 결혼이라는 걸 하는 일 자체가 드물기는 하지만, 하는 경우에는 옛날처럼 둘이 한 집에 같이 사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이가 생겨도 양육 전문 기관에 맡기면 되기 때문에, 굳이 같이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면 애초에 결혼이란 걸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같이 살지 않는 관계에는 거의 모든 불화의 씨앗이 애초부터 심기지도 않는다. 부딪치지 않기에 싸울 일도 없다. 물론 가끔 서로 뜻이 맞을 때 한 집에 하루 이상 머물 때도 있지만, 그럴 때조차도 갈등은 거의 전무하다. 갈등 요소를 미리 알려주어 방지할 뿐 아니라, 갈등으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 생기면 바로 분위기 전환을 돕는 컴패터블 1025가 없었다면 달랐을지 모르겠지만.

몰두하는 일이나 취미가 지겨워질 때쯤이면 M이 내 집에 나타나는 일이 잦다. 물론 내 생활의 기록에서 언제가 적절한 때인지 암시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장거리 이동을 싫어하기 때문에 찾아가는 일이 거의 없는데, M은 타이밍 뿐 아니라 방법도 내 무의식적인 바람에 잘 맞추는 편이다. 어제가 그랬다.

쌀쌀한 날씨를 즐기며 일찍 산책을 다녀와, 습관처럼 손을 소독하는데, 등 뒤에서 지나치게 놀라지 않을 정도의 옅은 숨결이 느껴져왔다. 뒤돌아보려다가 살짝 휘청이자, 딱 맞는 강도로 그리고 불쾌하지 않은 자세로 끌어 잡아준다. 마침 불쾌지수가 낮은 날씨에 내가 딱 좋아하는 향을 풍기면서 나타났기 때문에, M과의 오랜만의 조우는 즐거울 수 있었다. 시작부터 이러니, 오랜만에 만나서 하고 싶을만한 일들에 대해서도 서로 생각이 일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컴패터블 1025에는 우리의 관계와 상관이 있는 것 뿐 아니라 언뜻 보기에는 별 상관 없어 보이는 것들도 전부 기록된다. 상대방에게 하고 싶은 말뿐 아니라 매일 매일 그 날 하루에 대한 소감, 불현듯이 드는 생각이나 추억, 식자재와 상품 소비 내역, 통화 상대와 시간 등도 다 기록이 되며, 꽤 쓸만한 AI 기능을 통해 정보에 대한 올바른 해석도 같이 제공된다. 같이 사는 데서 오는 번거로움은 없애고, 같이 살아야지만 알 수 있는 사소한 정보들은 숙지하게 해주는 것이다. 직접 타이핑해서 써넣을 수도 있지만, 성능 좋은 마이크 기능으로 모든 말과 통화 내용 등을 간략하게 해석, 요약해서 기록을 하는 편이다. 다시 말해, 이 기록의 총합은 나와 M의 관계 그 자체이다.

컴패터블 1025에는, 내가 그를 만나기 훨씬 전부터 했던 모든 기록 가능한 일이 다 반영되어 있기도 하다. 예전에 썼던 전화번호들과 그 명의 및 주소, 그에 따른 수많은 메시지들, 살면서 온갖 기관이나 학교에 제출한 글과 문서, 온라인에 써둔 글들이 전부 M만 조회 가능한 상태로 남아 있다. 물론 M의 삶의 기록 역시 나만이 열람 가능한 형태로 존재한다. 사실 '결혼하자'는 합의는 이 기록을 서로에게 넘겨줄 마음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어떤 감정의 유무와 상관 없이, 이 행위에 따른 신뢰란 흔들기 굉장히 어려운 류의 것이다. 물론 우리가 애초에 이러한 신뢰를 서로 가질 수 있을만한 사람들인지, 상호 이해와 존중이 쉬운 사람들인지 평가해주는 AI 서비스를 통해 만났다는 점도 중요하게 작용할 것이다.

하여튼 컴패터블 1025의 기록을 통해, 나와 M은 서로에게 직접 하는 말보다 훨씬 진실에 가까운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정말 아이를 갖고 싶은 마음이 없는지, 정말로 따로 떨어져 있기를 바라는지, 같이 있고 싶을 때는 언제이고 정기적인지 아닌지, 어떨 때가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등등. 서로에게 굳이 그걸 표현해가면서 벌일 수 있었을 수많은 말다툼은 발생하지도 못하고 사그라든다. 기분이 내킬 때 상대에 관한 기록을 직접 읽거나, H204를 통해 요약 보고를 받으며 훨씬 깔끔하게 상대의 생각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상대방의 과거 인연들, 이상형과 취향의 변천사 등 이전 세대였다면 민감하게 느꼈을 수도 있을 정보도 컴패터블 1025 상에서는 과한 감정과 오해의 여지가 차단된 기록일 뿐이다. 물론 그렇다 해도 감당을 못 할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나와 M이 이 프라이빗 블록체인 상에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 둘 다 이성적인 존재라는 증거가 된다.

물론 그런 객관화된 과거의 기록은 그렇다 치고,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생각은 반드시 전적으로 솔직하게 기록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약간의 거짓은 기록되는 각자의 생활 패턴, 즉 수면과 알콜 섭취, 쇼핑 등을 포함한 데이터에서 암시가 되게 마련이다.

암시만이 아니다. 현재의 행동들을 적나라하게 찍어 기록하는 비디오 기능도 탑재되어 있는데, 예술성 옵션이 있어서 보기 좋은 각도로만 찍히고, 찍은 영상은 따로 암호화되어 또 다른 종류의 기록이 된다. 물론 영 찍히고 싶지 않은 사생활에 가까운 영상은 거부 옵션이 있어 거를 수도 있고, 기분이 내킬 때 조회해볼 수 있도록 남겨두기도 한다. 영상이란 따로 사는 M과 나에게는 유용하면서도 굳이 서로에게 숨길 이유도 없는 자료이다. 모습은 보고 싶지만 같이 있기는 귀찮을 때, 재생해보기도 한다. 많은 이들이 낯선 이와의 영상 속 연애관계를 지향하고 또 유지하기도 하는데, 나나 M은 조금 보수적인지, 전문적으로 영상을 공유하는 이들이 대부분 로봇이라는 사실을 아직도 꺼림칙하게 생각하는 편이다.

최근에는 향취에 대한 반응 장치를 추가로 구입해서 연결했다. M이 전통적인 남성의 의처증 증세를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어릴 적부터 은연중에 무방비로 노출된 전통적 서사들의 잔재, 청소년기부터 직간접적으로 겪은 경험, 그리고 인류라는 종 자체의 오랜 경험과 기억에 따른 불신을 조금도 갖고 있지 않다고는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의심이 들 때마다 따져 묻느니 애초에 '정보'의 형태로 빨리 알 수 있게 해두는 것이 피차 간에 편한 일이다. 옛날 영화에서처럼 날 의심하는 거냐고 울고 불 필요도 없고, 그냥 당연하다는 듯이, 기술적으로 진보한 신상품을 두말 없이 사들이는 행위로 충분하다. 만일 누군가가 이 집에 다녀가거나 내가 누군가와 시간을 오래 보낸다면, 그에 따른 유의미한 향취의 변화도 다 기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만일 내가 아주 자그마한 불만이라도 속에 품고 있다면, 내 의도와는 무관하게 그리고 어쩌면 나 자신도 모르게 어디에선가 티가 나리라는 점이다. 어제는 좋았지만 오늘은 어딘가 지겹다던가...M은 객관적으로 내게 이상적인 파트너이기 때문에 그가 지겹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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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는 방금 H204를 시켜서 웨딩 사진을 치우라고 명했다. 물론 M이 내 이 행동에서 지나친 의미를 읽어내지 않으리라는 점은 잘 알고 있다. 가끔은 아무 것도 없는 깨끗한 벽이 보고 싶다거나, 벽 자재를 새로 갈고 싶다거나 할 수 있다는 요약된 정보까지도 받아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은 딱히 그런 이유가 없다. 그냥 다 귀찮아졌다. M이 어제 낮에 와서 오늘 아침까지 계속 같이 있어서일까. 내 공간에 대한 침투를 원래 싫어하기는 하지만, 일단 가버린 후에도 귀찮은 감정이 격해지는 경우는 없었는데...

컴패터블 1025의 모든 수신기를 꺼버리고 싶어졌지만, 이유를 설명할 생각을 하니 더 답답해진다. 내가 자리를 피하는 것이 보다 쉬운 선택이다.

일단 어디로든 나가보기로 결정한다. 애꿎은 H204의 전원을 꺼버리는 걸로 분풀이를 했다. 컴패터블 1025에 그 사실도 기록이 되겠지만, 어차피 내 이런 이유 모를 짜증은 M도 알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M에 대한 반감이 생기거나 한 것은 아니다. 단지 내가 미리 생각하거나, 평소에 선호하거나, 앞으로 선호할 거라고 예상되는 것을 죄다 알고 있지 않은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은데, 그것이 꼭 M에 대한 배신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물론 배신일 수도 있을 것이다.

순간 내 귀를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조절된 벨소리가 울리면서, 현관을 찍는 스크린이 크게 펼쳐진다. 생화 배달이다. 아무래도 내가 H204를 끌 때쯤 그 상황에 맞는 상품이 배달되도록 하는 내용이 컴패티블 1025에 기록된 모양이다. 조금 우습기도 하지만, 괜한 짜증이 더 커진다.

컴패터블 1025의 비디오 기능과 향취 수신기를 애써 무시하며, 괜히 공들여서 씻고 차려 입는다. 안 쓰던 향수를 꺼낸다. 그러고도 거울 앞에 서서 옷을 세 번 이상 갈아 입고는 한참을 또 망설인다. H250가 갈아 입을 옷을 바로바로 대령하지 않으니 시간이 한참 걸리지만, 누군가에 의해 파악 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덜 받아서 좋다. 어쩌면 내가 평소에 싫어하는 스타일로 하고 나가볼까 하는 생각도 든다.

거실을 나가면서 흘낏 뒤돌아 본다. 원래는 무음에 가깝던, 컴패터블 1025을 돌리는 서버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M의 시점)

"예상한 날이 왔네. 가보도록 해."

M의 덤덤한 말투에 이어 한 형체가 일어선다. M이 간부로 있는 회사에서 수 년간 공을 들여 제작한 로봇으로, 외형 뿐 아니라 지능과 행동 패턴에서 어지간한 인간과 맞먹는다. M이 다소 급히 덧붙인다.

"기억해. 더 뛰어난 게 아니라 불규칙한 게 필요한 거야."

자연스레 웃음으로 답하며 사무실을 나서는 로봇의 임무는 복잡하지만, 한 마디로 표현하면 '간헐적 의외성 제공'이다. M001은 오늘부터 M과 그 아내의 프라이빗 블록체인에 사용자로 참여할 것이다.

For @sndbox:
This is a short story, slightly dystopian but not without humor, about a possible future marriage sustained through a private blockchain. Everything about the couple is shared and recorded onto their own blockchain system called Compatible 1025. In this setting, all possibilities of conflict are predicted and prevented by AI; this results in a data-driven type of trust between the couple. Written from the wife's viewpoint, the story questions our feelings for the random elements in life. As she sets out to be a stranger to someone, the husband, having been aware of such a scenario all along, sends out a robot; it is soon to become the 3rd user on their private blockchain, to make their wedded life seem 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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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막히는 세상이군요 ㅎ

하지만 달리보면 꽤나 쿨한 부부생활 이란 생각도 해봅니다.
제이미님이 추구하는 연애 방향(?)이 많이 투영되어 있는것도 같구요 ^^

몰입해서 잘 읽었습니다 ! 빠져드네요.

아 사실 자조의 의미도 있는 게 맞습니다. 아무런 갈등의 여지도 주지 않는 관계를 상정해보니 저런 디스토피아가! ㅎㅎ

잘 읽었습니다~ 흥미롭네요. 팔로우하고갈게요 자주소통해요~

소설이니 클라이막스가 있겠군요 ㅋㅋㅋ 기대됩니다

가 아니라 이게 하나의 단편이구나

아 마지막 겨우 이해

ㅋㅋㅋㅋㅋ현웃

오... ㅎㅎㅎ 흥미롭네요. 저런 연애방식이 있다면 가장 먼저 베타서비스로 신청해서 체험해보고 싶네요.

용감하시네요. ㅋㅋ

첫 줄부터 몰입해서 읽었네요...
다음 이야기도 궁금해지네요... '부딪히지 않으면 싸울 일도 없다...'

다음엔 또 전혀 뜬금없는 이야기가 되겠지만...감사합니다. ㅎㅎ

흥미로운 소재네요 ㅎㅎㅎ
부부사이를 이어주는 아이가 아니고 로봇 ㅎㅎ

아이가 그런 거였군요. ㅋㅋ

잘 읽었습니다.

1ㆍ2ㆍ3편을 읽어야 하는지 살짝 고민이 되네요^^

ㅎㅎ 참고로 말그대로 단편이라 서로 연결고리는 없습니다. ㅎㅎ

읽어보다 깜짝 놀랐네요.
누군가에게 나의 모든 패턴이 읽혀지고 분석되어 있다는게
처음 접했는데 재미있네요 ^^

감사합니다. ㅎㅎ

이름 의미심장하네용~ ^^

bluengel_i_g.jpg Created by : mipha thanks :)항상 행복한 하루 보내셔용^^ 감사합니다 ^^
'스파'시바(Спасибо스빠씨-바)~!

아 제목 얘기하시는 건지...ㅎㅎ

컴패티블1025
M

^^

bluengel_i_g.jpg Created by : mipha thanks :)항상 행복한 하루 보내셔용^^ 감사합니다 ^^
'스파'시바(스빠씨-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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