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별을 본다. 외롭지 않으려고. / 040

in #kr-pen6 years ago

별을본다_02.jpg
ⓒzzoya





  “이제 안심이 돼요?”
  “너무 그러지 마요. 간밤의 일을 정리도 안 하고 사라진 게 누군데요.”
  그녀를 사랑하더라도 할 말은 해야 했다. 그녀의 행동은 명백히 무책임했으며 성숙한 어른의 그것과는 거리가 있지 않았나. 그녀는 이번에야말로 어른답게 순순히 잘못을 시인했다.
  “그 부분은 인정할게요. 면담은 잘 끝났어요?”
  “뭐, 그런 셈이죠.”
  “그럼 이제 내가 걱정할 건 없는 거죠?”
  말코비치와 나 어느 쪽에 대한 건지 궁금했지만 나는 그냥 긍정의 대답으로 넘어가는 도량을 택했다. 일요일에는 파커 씨가 커피 트럭을 열지 않기에 우리는 UN 광장을 향해 걸었다.

  “그거 알아요? 당신과 짐은 다른 듯하면서 되게 비슷하단 걸. 물론 쌍둥이라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만, 내 말은 약간 달라요. 알죠?”
  그녀가 재밌다는 듯 말했다. 지미와 내가 비슷하다니. 당연한 얘기에 기분이 나빠진 나는 뚱한 표정이 되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요.”
  “당신과 짐이 비슷한 건 사실이에요. 쌍둥이라서가 아니라 좀 더 근원적인 부분이 닮았달까.”
  “사람들은 그걸 유전자라고 부르죠. 최신 과학과 너무 담쌓고 사는 거 아니에요?”
  “맞아요. 내가 과학자답지 않다는 말을 자주 듣는 편이죠.”

  뭐라고 대꾸를 해 줄까 고민하던 차에 그녀가 아까의 화제로 돌아갔다.
  “내가 말한 건, 그래요, 영혼이랄까. 이것도 좀 비과학적인 말이지만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네요. 둘 다 뭐랄까, 굉장히 순수하고 맑은 영혼을 가졌달까. 어렵네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이런 진부한 표현뿐이에요. 이해해 줘요.”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정말 오랜만에 재미있는 농담을 들은 것처럼. 그녀가 빤히 쳐다보는 바람에 얼른 해명에 들어가야 했으나 웃음의 여운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지미나 내가 그런 영혼을 가졌을 리 만무하잖아요. 녀석의 바보 같은 기질을 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 또 모를까.”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그럼요. 성인이 돼서도 순수하다는 소릴 듣는 놈들은 둘 중 하나예요. 엄청난 바보 아니면 엄청난 사기꾼.”

  광장에는 벼룩시장이 열려 있었다. 그녀는 딱히 사지도 않을 물건들을 흥미로운 듯 찬찬히 보며 느릿느릿 걸었다. 나는 잡동사니에 관심이 없었으나 인파에 섞여 그녀와 나란히 걷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짜릿한 성취감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는 한쪽에 모여 있는 푸드 트럭 중 딱히 파커 씨의 경쟁 상대랄 것도 없는 커피 트럭에서 커피를 사 들고 간이 탁자에 자리를 잡았다. 카페인이 중추 신경계를 자극하자 그녀를 만나면서부터 줄곧 잊고 있던 과제가 떠올랐다.

  “아 참, 다음 주말에 시간 있어요?”
  “왜요?”
  “불꽃놀이 하잖아요.”
  점심 먹고 좀 쉬다가 막차 타고 돌아오면 되겠지. 어차피 지미가 하룻밤 자고 올 테니까. 내가 없는 편이 엄마와 지미를 위해서도 더 나을 테고. 그런 계산이었다. 그녀는 컵의 뚜껑을 열고 햇빛에 반짝이는 까만 액체의 매끄러운 표면 위로 시선을 미끄러뜨렸다. 그러더니 뭔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다물었다. 어쩐지 부정의 대답이 나올 것 같은 분위기였다.

  띠띠- 띠띠-
  우리는 때마침 울리기 시작한 손목시계로 시선을 움직였다. 그녀가 말했다.
  “약 먹을 시간이네요.”
  “네, 또다시.”
  “기다려요. 물 한 병 사올게요.”
  “괜찮아요. 커피 있잖아요.”
  “아뇨. 약은 커피랑 먹으면 안 돼요.”

  그녀는 내가 더 말릴 새도 없이 푸드 트럭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나는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두었다. 그녀가 사다 준 물로 약을 넘기고 나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려다가 어이없어하는 그녀의 눈빛에 그만뒀다. 어색한 침묵이 우리 주위를 맴돌았다. 우리 사이에 오가는 말이 없어지자 사람들이 빚어내는 소란이 햇볕만큼이나 따갑게 느껴졌다. 나는 그녀가 애써 잊고 있는 걸 상기시켜 주는 것으로 불필요한 중간 광고를 끊었다.

  “아직 대답 안 했어요.”
  “뭐를요?”
  “불꽃놀이요.”
  “아, 그랬죠. 다음 토요일이죠? 그렇게 해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가 미소 지었다. 어딘가 온전치 않은 미소였다. 눈을 살짝 찡그린 건 햇빛 탓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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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 감상&잡담

The Fall by Rhye

이 노래 정말 오랜만에 듣는데 잘 듣고 갑니다. 오늘 밤이랑 진짜 잘 어울리네요.

실은 늘 처음부터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다가, 오늘은 왠지 모르게 에라 모르겠다!라는 심정으로 글을 읽어 봤어요. 이대로도 참 좋네요. 무엇보다 마지막 문단이 너무너무너무 좋네요!

한 편이라도 시간 내어 봐 주시면 감사하죠. 거기에 덧붙인 음악까지 좋아해 주시니 흐뭇합니다 :)

볼꽃놀이! 밤의 유혹! ㅋ

밤에 방점을 찍으시는군요...?

저-!!
드디어 정주행 끝났어요!!
와아아-!!
블베 보는 독자들이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이렇게 역지사지의 미덕이...

틀어놓고 읽을걸 그랬어요 ㅎㅎ 라이 넘 좋아합니다. 지난회부터 선곡이 의외라고 느낀다면 편견이겠죠.

어떤 점에서 의외인지를 말씀해 주신다면 성심성의껏 해명하겠습니다ㅋㅋ

아닙니다. 해명하지마세요. 편견을 가진 저의 잘못일뿐이어요 ㅋㅋㅋ

저도 언제부턴가 틀어놓고 읽고 있어요. :-)

점점 더 알면 알수록 비밀이 많은 여자같아요. 잭에게 흥미로울 수 있겠으나, 뭔가 불안해요 계속~ 뭔가 안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새벽기도를 다시 나가야 하나

몇년 전 마드리드에서 새해를 맞이했던 적이 있어요.
유럽의 불꽃놀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유난스럽더라구요.
저흰 시차 때문에 새해를 맞는 것도 못하고 자고 있었는데, 전쟁난 줄 알았더랬습니다.ㅋㅋ
잭과 클레어도 멋진 불꽃놀이를 보러가겠지요?
미국이니 더 화려할지도...

마드리드의 새해 불꽃놀이라니. 정말 멋진데요? 저는 프랑스의 공연 테마 파크에서 불꽃놀이를 본 게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관중석이 야구장 같은 구조인데 제일 높은 곳에서 봤더니 바로 눈앞에서 불꽃이 터지는 것처럼 보이더군요. 마치 3D 입체 영화처럼요.

순수하고 맑은 영혼이라.. 제 이야기 인줄 ㅎㅎㅎㅎㅎㅎㅎ...........

공대 오빠들이 순수하고 맑...죠?

어휴...............................................여기 와서 약 파시나요?!

왠지 클레어와의 만남에도 끝이 보이는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

영원한 건 없다죠...

지난 편부터 자꾸 거슬리는 "햇빛"...

자외선이 눈에 해롭습니다.

왠지 @sunwatcher님이 잘 아실 듯 ㅎㅎ

오... 흥미로운 분야에 계신 이웃이군요.

호출하셨네요. ㅎ
예, 태양의 자외선이 백내장이나 망막 손상을 유발할 수 있다고 알고 있어요. 제가 하는 어떤 나이드신 분도 캘리포니아 해변에서 어릴 때 썬글라스를 쓰지 않아서 백내장이 온 것 같다고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태양빛은 가시광만으로도 충분히 강력하니 가급적 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눈을 찡그리는 건 카메라의 조리개를 조여 빛의 양을 줄이려는 시도죠. ㅎ

상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

부끄럽지만 아직도 정주행을 못 끝냈사옵니다. 벌써 40회가 넘어갔으니 이것 참 큰일이네요!! ㅋㅋ

조만간 특단의 조치를 마련하겠습니다.

늘 이랬는데요 ㅋㅋㅋ

갑자기 든 생각인데 또 다른 잭이 느껴지네요. 수지 큐와 있던 잭과 클레어와 있는 잭.
영혼을 비추는 거울이 달라서 그런가...

영혼을 비추는 거울이 달라서다-
멋진 표현입니다. 때로는 누구와 함께하는가가 그 사람의 전부를 대변하기도 하죠. 존 스노우과 티리온이 대니와 함께해서 참 다행이라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다음 주 토요일 그녀와 함께 불꽃놀이에 가게 된 잭의 흐믓한 표정이 눈에 선합니다
영혼이 아름다운 사람이란 고독과 같은 자신만의 성찰의 시간을 쌓은 사람이지요
숙성된 감정의 훈련이 축적되면 좀 더 타인을 이해하고 타인을 물론 자신을 사랑하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연인들도 함께 박수를 치며 월드컵 축구 경기에 빠져들면 좋을 듯!

영혼이 아름다운 사람이란 고독과 같은 자신만의 성찰의 시간을 쌓은 사람이지요
숙성된 감정의 훈련이 축적되면 좀 더 타인을 이해하고 타인을 물론 자신을 사랑하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본문보다 더 멋진 코멘트. 감사합니다 :) 주말 잘 보내세요, 쌤.

그렇게 말하며 그녀가 미소 지었다. 어딘가 온전치 않은 미소였다. 눈을 살짝 찡그린 건 햇빛 탓이었다.

뭔가 잭의 새로운 연애에도 그림자가 드리우는 듯한 느낌이 드네요

다음주에 아마 뭔 일이 있을 거 같아요.
가족을 만나러 갔다가 갑자기 문제(예를 들면 엄마가 갑자기 아프셔서 병원에 입원했다던가 하는)가 생기는 바람에 돌아오지 못해서 클레어와의 약속을 못 지키는 거 아닐까요? 클레어는 하염없이 잭을 기다리다 바람맞고.. 아니, 혼자 기다리는데 말코비치가 나타나나요? 혼자 마구 상상의 나래를 펴봅니다. ^^

잭과 클래어가 가까워져야 하는데 웬지 멀어지는 느낌이 들어요^^

그녀가 눈을 살짝 찡그린게 과연 햇빛때문이었을지.. 궁금하네요

운명의 상대일 줄 알았던 클레어가 이렇게 불편해지다니.. 그럼에도 작업하는 잭이 슬슬 안타까운데요.

혼자 김칫국 마신 자의 말로... 또르륵

그녀의 눈을 자꾸만 찌부리게 만드는 건
단지 햇빛 탓인걸까요..
오늘은 왠지 짧게 느껴지네요..
앗!!신성한 곳에서 작가님께 늘 징징대는군요^^
눈을 찌뿌리시거 계시는건 아닐지~!!

괜찮습니다 :D 이번 편이 평소 분량이고 직전 3회가 두 배 많았죠.

흐음... 역시 뭔가 밀당의 달인 같은 느낌이 살짝 납니다 ㅎㅎㅎ
감정표현의 복선을 두시는걸 이제는 살짝 느낄것도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느낌적인 느낌을 느낄 것 같은 느낌이 드셨군요. 실제로는 전혀 못 하기에 독자분들과의 밀당으로 재미를 느끼고 있습니다.

제목 부터 외로움이 묻어나오는게
제 마음때문일까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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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이라 그런가 월드컵 때문인가. 아님 시세 하락 탓인가. 아무튼 한산하다. 프랑스에서 보내는 마지막 주말 역시 한산하다. 날은 흐리고, 아, 새소리는 참 좋지만 씁쓸하다. 마지막 주말이라고 하니 언젠가 이 소설에 썼던 대목이 생각난다. 인생의 모든 날은 다시는 없을 마지막 날이라고. 그래도 특정 지역이나 특정 연령대를 같이 놓고 보면 모든 날을 공평히 대할 순 없는 노릇이다.

어처구니가 없다.

음악들으면서 읽으니까 더 좋아요~ 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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