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임상심리전문가의 정신장애 이야기 #28] 연극성 성격의 인지 양식과 방어 기제
Gabbard가 쓴 역동정신의학과 낸시가 쓴 정신분석적 진단의 내용을 주로 참고하였고 제 개인적인 환자 평가 경험이 조금 섞여 있습니다.
두 책 모두 임상/상담 쪽 종사자들이 집에 한 권은 갖고 있을 법한 책 중 하나입니다. 그 중 역동정신의학의 가장 최근 판이 5판(2014년 출간, 역서는 2016년 출간)인데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한 번은 정독해야 하는 책입니다.
역동정신의학에 연극성 성격의 인지 양식(cognitive style)이 설명돼 있는데 최근 평가한 사례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인지 양식이라는 건 나와 타인과 세상에 관한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에 관한 것입니다. 정보를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input processing) 중재하여(mediation) 관념을 형성(conceptualization)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로샤(Rorschach)라는 투사 검사를 이용하여 이 과정을 살펴 볼 수 있는데요. 연극성 성격을 지닌 사람은 외부로부터 유입되는 정보를 구체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다소 어려움을 보입니다. 나무를 보기보다 숲을 보는 인상주의적인 접근을 하기 때문에 후에 자신의 경험을 복기할 때 디테일이 부족하기 쉽습니다.
유입된 정보를 중재하는 과정에서 낮은 지각적 정확성(low perceptual accuracy)이 나타날 가능성은 낮습니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과로 보는 것을 오렌지로 볼 가능성이 낮다는 것이죠. 심리적 요인들에 의해 외부 현실을 왜곡해서 지각할 가능성이 낮습니다.
다만 관념화 과정에서 논리적인 비약이 발생하기 쉬운 취약성을 지닙니다. input에서 이미 구체성이 부족한 상태인데, 결론 내기까지 필요한 중요한 정보를 사고 과정에서 간과할 가능성까지 높기 때문에 심사숙고해서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 눈에는 즉흥적으로 보이는 판단을 내릴 가능성이 높아지게 됩니다. 신속하게 상황 판단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이런 특성이 장점이 될 수도 있지만요. 추론 과정에서의 비약 가능성은 관심받지 못 하거나 거절 당하는 것에 대한 이들의 극심한 공포와 그에 수반되는 파국적 사고에 밀접하게 연관되는 취약성으로 기능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인지 양식은 Gabbard가 "global, impressionistic cognitive style"라고 표현한 것과 일맥상통하지 않나 싶습니다.
성격을 구성하는 작고 사소해 보이는 행동 패턴에도 한 개인의 총체적 역사가 스며들어 있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이런 인지 양식이 나타나게 되는 이유, 즉 발달적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마는 지면 제약(?)이 있으니(라기보다 제 임상 경험이 깊지 않으니) 연극성 성격의 주요 방어기제와 global, impressionistic cognitive style 간의 관련성을 간단히 짚고 넘어가는 선에서 그치겠습니다.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들여다보는 것이 연극성 성격을 지닌 사람에게는 매우 힘든 일입니다. 일전에 연극성 성격의 주요 방어기제 중 하나로서 부인(denial)을 들었는데 억제(supression)나 억압(repression)도 연극성 성격의 주요 방어기제입니다. 이 방어기제들의 공통점은 어떤 식으로든 감정을 경험하지 않으려는 의식적 및 무의식적 노력이라는 점입니다.
이미 지나간 일 혹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을 생생하게 경험하기 위해서는 구체성(=디테일)이 필요합니다. PTSD를 지닌 사람들이 시도때도 없이 출몰하는 외상 기억으로 고통을 받는 것은 그 기억이 마치 지금 여기서 벌어지는 일인 것마냥 구체적이기 때문입니다. 오감을 통해 매우 디테일하고 생생하게 재경험한다는 것이죠. 반대로 구체성이 결여된 피상적 기억이나 경험은 덜 생생한 감정을 야기하거나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않게 하는 방법이 될 수 있죠. 그렇기 때문에 PTSD를 지닌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트라우마에 연관된 생각이나 기억, 감정을 회피함으로써 피상성을 유지하고자 합니다. 이런 방법의 극단에 있는 것이 바로 해리 상태입니다. 실제로 PTSD를 지닌 사람 못지 않게 연극성 성격을 지닌 사람도 해리 경험(hysterical dissociation)에 취약할 수 있습니다.
연극성 성격의 인지 양식은 피상성을 핵심 특성으로 합니다. 즉, global, impressionistic한 방식으로 나와 타인과 세상을 봄으로써 그것들에 대해 갖는 진솔한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게 돕습니다. 부인, 억제, 억압이라는 방어기제에 수반되기 쉬운, 혹은 궁합이 잘 맞는 인지 양식이라는 말입니다.
...global, impressionistic cognitive style to keep the histrionic patient from being in tough with any genuine affective states or attitudes toward self and others.- 원서 5판 554쪽.
연극성 성격을 지닌 사람이 인지적으로나 정서적으로 피상적인 것은 스스로의 진솔한 감정을 직면하는 것이 이들에게 매우 두렵고 강한 불안을 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연극성 성격을 지닌 사람은 매우 사교적이고 감정 표현도 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불안이 많고 감정 접촉이 잘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앞서 말한 발달적 이유와도 관계 있는데, 그건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루겠습니다.
이런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연극성 성격을 지닌 내담자나 환자를 평가하거나 치료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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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이러한 연극성 성격을 자기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과거의 경험이 학습되어 무의식 중에 자연스레 저러한 성격이 된다면.. 스스로 내면을 들여다 보는 것이 가능할까요? 만약 스스로를 돌아보고 판단(?)할 수 있다면 자기 자신을 잘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될지도 모르겠네요. 어쩌면 이러한 유형의 사람은 스스로의 성격을 저렇게 변화시켜 감정을 직시하는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운걸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제대로 이해한 것이 맞는지 모르겠네요 ㅎㅎ
맞아요. ㅎ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능력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는데, 그 능력이 출중하다 하더라도, 아무래도 자기를 제대로 알려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필요한 거 같아요. self라는 게 결국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라.. 꼭 심리상담 아니더라도 연애나 결혼, 육아 등의 경험이 깊은 자기 내면과 만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는 것도 같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