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듭짓기

in #kr-psychology6 years ago (edited)

제 전공이 임상심리학(clinical psychology)입니다. 스팀잇에 임상심리학 전공한 분이 몇몇 있죠. 제가 스팀잇을 알게 된 계기인 @vimva님도 그렇고요. 오늘은 임상심리학 석사 논문 관련된 얘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임상심리학이든 인지심리학이든 심리학 석사 논문이란 게 뭐 거창한 게 아닙니다. 다양한 연구 주제들이 있는데 그 중 한 주제를 선택해서 열심히 파고 들면 자신의 가설에 맞닿게 됩니다. 만리장성 위에 자기 벽돌 하나 얹는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외국 저널에 실린 논문을 주구장창 읽는 게 대학원 생활의 전부인데,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과학적인 방식의 글 전개(서론-방법-결과-논의)와 글의 세부적 형식 같은 것을 체득하게 됩니다. 체득된 틀에 맞춰 자신의 가설을 검증하고 검증 결과에 관해 논하는 글 써서 교내 심리학 전공 교수님들로부터 인증 받으면 논문이 통과가 되는 식입니다.

인증 과정에서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교수들의 호평을 받는 학생은 극히 드물죠. 대체로 이래저래 까입니다. 프로포잘 과정에서부터 이미 지도교수님에게 수없이 까이지만, 논문 다 쓰고 심리학과 교수님들 및 선후배들 앞에서 발표하는 날에도 까입니다.

저는 설문지 돌려서 상관을 보는 것을 기본 틀로 하는 연구를 하지 않았습니다. 석사생이 진행하는 심리학 연구들은 어떤 세련된 통계 기법을 적용했든지 간에 상관 연구라는 틀에서 벗어나기 힘듭니다. 인과관계를 볼 수 있는 종단 연구는 많은 시간과 노력과 돈이 들어가기 때문에 lab 단위가 아닌 일개 석사생이 수행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상관 연구가 왠지 가오가 안 산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ㅎ '아 쉬바 그래도 쎄라피스트가 될 건데 치료효과를 보는 연구를 해보자!' 알량한 자존심으로 치료적 개입의 효과성을 검증하는 논문을 썼습니다. 그런데 발표날 사회심리학 교수로부터 호된 비판(거의 비난 수준으로 느껴지는)을 받았죠. 연구방법론이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원래도 깐깐하고 날이 선 어투로 유명한 교수님인데 제가 타깃이 되어 그렇게 호되게 까일 줄이야..

결국 졸업 논문 발표는 제게 트라우마로 남았습니다. 미리미리 데이터 준비해서 착실히 써나간 논문인데 멘붕이 와서 대학원 회식도 안 가고 집에 오자마자 불끄고 잤던 것 같네요.

임상심리전문가가 되려면 국내든 국외든 학회지에 논문 한 편을 실어야 합니다. 전문가 취득에 필요한 논문은 수련 과정에서 새로 썼습니다. 유능한 수퍼바이저를 만나서 데이터도 쉽게 구하고 지도도 잘 받아서 한 달이 안 걸려서 신경정신의학이라는 의학 저널에 게재했습니다. 하지만 늘 석사 논문을 출판하지 못 한 것에 대한 미진함이 남았습니다.

이걸 출판을 해야, 공부가 힘들었다기보다 돈이 없어서 여러모로 힘들었던 석사 생활의 매듭을 잘 지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현재 수퍼비전을 받고 있는 상담심리전문가는 인생의 매단계마다 매듭을 잘 짓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바 있습니다. 대나무에 비유했던 것 같은데, 대나무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매듭을 잘 지은 결과 비바람에도 쉽게 부러지지 않듯이 사람도 인생의 매단계마다 매듭을 잘 지어야 삶의 풍파에 쉽게 휩쓸리지 않을 수 있다고 첨언했던 것 같습니다.

시작을 했으면 끝을 봐야 하고 칼을 꺼냈으면 무라도 썰어야지요.

석사 논문의 논의 부분을 보니 정말 왜 그렇게 까였는지 이해가 됩니다. 졸업한 지 5년 지났는데, 다시 보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글 쓴 저조차도 잘 모르겠습니다.

5년 사이에 심상 재구성 관련하여 새로운 연구가 많이 나왔네요. 최신 연구들 찾아서 논의를 거의 새로 쓰느라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졸업하고 바로 출판하지 못 한 게 이렇게 또 배움의 기회를 가져다 주네요. 이제 곧 지도교수님을 찾아 뵙고 이 논문을 인지행동치료라는 학회지에 낼 생각입니다. 최신 연구를 많이 추가했지만 졸업 후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서 게재 거절 당할 가능성도 있습니다(사실 높습니다). 그래도 시도는 해봐야지요. 거절 당하면 다른 학회에 내고요. 공신력 있는 국내 저널에 싣는 게 목표가 아니라 어떤 저널이든 저널에 싣는 게 목표입니다.

게재 확정되면 소식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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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요건 정말 응원 드립니다. 가능해야 할텐데요...

헤헤 응원 감사합니다.(방금전에 반말덧글 달고 급 모드 전환)

학창시절에 심리학에 항상 관심이 있었습니다.ㅎㅎ

파고들수록 흥미로운 학문인 건 분명한 것 같아요.

매듭짓기. 그렇군요. 대나무의 비유가 확 와닿습니다. 저도 제 매듭을 언제 어떻게 지을지 고민 좀 해봐야겠습니다.

그쵸. 끝맺음을 잘하는 게 정말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인생의 과업에 매듭을 하나씩 지어야한다는 것에 동감합니다. 저도 아직 풀어헤치거나 놓아둔 매듭이 몇 개 있는데, 오롯이 보관중입니다.

세상에서 빛을 볼 수 있는 논문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응원해주시는 분들이 계시니 아마도 빛을 보게 되지 않을까 긍정적인 기대를 품어 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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