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방랑] 낯선 여행, 혹은 방랑하는 삶으로의 초대 - 에콰도르 2편

in #kr-travel6 years ago (edited)

삶은 어떤 우연에 의해 전혀 다른 곳으로 방향을 틀곤 하지. 오늘의 슬픔이 내일의 기쁨이 되어 돌아오기도 하고, 오늘의 고통이 내일의 환희가 되어 돌아오기도 하고. 강도 사건으로 키토를 떠나왔는데, 도착한 도시에서 만난 떠돌이 히피들. 모두가 초면이었지. 중남미 방랑 국제서커스단?내 앞에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삶이, 또 다른 세계가 기다리고 있었어...[남미방랑] 태어나려는 자는 알을 깨뜨려야 한다 - 에콰도르 1편에 이어...

“자, 이리로 모이세요. 아메리카, 유럽, 머나먼 아시아의 코리아에서 온 국제서커스단이 멋진 서커스를 보여드립니다. 10분 뒤에 공연을 시작하니 얼른 와서 앞자리를 잡으세요. 세계 각국에서 온 친구들이 펼쳐 보이는 국제서커스단이 왔습니다!”

마리는 손바닥을 모아 나팔을 불 듯 소리쳤어. 주말 시장을 맞아 부모님을 따라온 아이들이 귀를 쫑긋하더니 부모님의 손을 끌었어.

“아빠, 나 저거 보고 갈래!” 

“엄마, 국제서커스단이래!” 

“삼촌, 코리아는 어디에 있는 나라야?”

시장 옆 공터로 사람들은 모여들었어. 뽀송뽀송한 날씨, 관객들은 마리 앞에 줄지어 앉아 공연을 기다렸어. 우리는 국제방랑서커스단. 서커스 천막이나 입장료 같은 건 없었어. 시장이 서고, 공터가 있다면 어디든 우리의 무대였지. 얼굴에 연지 곤지 분칠한 마리가 자기소개를 한 뒤 소리쳤어.

“이제 곧 국제서커스단을 소개하겠습니다. 콜롬비아에서 온 존! 칠레에서 온 케노! 아르헨티나에서 온 파블로! 스페인에서 온 나노! 코리아에서 온 로!” 

마리가 차례차레 호명하면 무대 앞(?)에서 우리는 손을 흔들었어. 아이들은 그때마다 환호성을 지르며 손뼉을 쳤지. 

케노가 디아블로 묘기를 부리기 시작했어. 작은 절구통 같기도 하고 커다란 요요 같기도 한 디아블로를 케노는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알았지.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돌던 디아블로가 중력을 거스르며 줄을 타고 수직으로 오르면 아이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탄성을 질렀어.

파블로 역시 디아블로 묘기를 부리는데 줄을 튕겨 디아블로를 하늘 높이 던졌다가 받는 게 특기. 높이 치솟았다가 떨어지는 디아블로를 잡아낼 때마다 아이들이 행복한 비명을 질렀지.

나노는 데블스틱으로 묘기를 부렸어. 마치 막대기가 살아있기라도 하는 듯 춤추는 걸 보며 아이들은 숨 죽인 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 그 다음엔 내 차례.

 

케노가 빌려준 저글링공을 갖고 나섰어. 밀가루를 고무풍선 안에 채워 만든 공 3개. 떨어뜨려도 튀거나 굴러가지 않아서 저글링 연습으론 딱 이었지.

더구나 누런 갈색이라니!!!

무대 앞에서 두리번대며 나는 “돈 데 에스 바뇨? 돈 데 에스 바뇨?(화장실이 어디죠?)” 똥마려운 사람처럼 소리쳐. 화장실을 가리키는 사람, 깔깔거리는 아이들. 마리가 나의 어설픈 연기를 거들어. “한국에서 온 로가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더니 배가 아픈가 봐요. 화장실이 어디 있나요?” 나는 한손으로 아픈 배를 움켜쥐고 몇 걸음 걷는 척 하다가 등 뒤의 다른 손에 쥐고 있던 공을 떨어뜨려. 마치 그 자리에서 똥이라도 싼 것처럼.

툭, 

툭, 

툭,

내가  찌푸린 얼굴을 활짝 펴자 아이들 입에서 웃음이 터졌어. 하하하 하하하. 나는 떨어진 공을 주워 내 코에 갖다 대지. 아이들은 갈색공이 진짜 똥이라도 되는 양 인상을 찌푸리며 비명을 질러. 난 냄새가 난다는 듯 인상을 찡리고선 맨 앞줄에 앉은 아이들을 향해 내밀어. 온몸을 비틀며 도망치는 아이. 도리도리 고개를 휘젓는 아이. 비명을 지르는 아이. 소동이 벌어지고 그 모습을 보고 자지러게 지게 웃는 관객들. 그렇게 한바탕 장난을 친 뒤 저글링을 시작하는 거야.

     

그 다음엔 외발자전거에 올라탄 존과 마리가 관객 앞에 섰어. 우리 국제방랑서커스단의 하이라이트! 외발자전거도 쉽지 않은데 두 사람이 불붙은 곤봉을 주고받기 시작하면 커다란 환호성이 터졌지. 

다같이 마무리 인사. 

모자를 들고 관객 사이를 돌면 아이들이 부모님에게서 받은 동전을 내밀었어. 하루공연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기 전엔 시장으로 들어갔어. 피에로 복장을 한 존이 시장 아주머니와 흥정을 시작하지.

“외발자전거에 올라탄 채 라임 6개를 떨어뜨리지 않고 저글링을 하면 이걸 주실래요?”

온 시장 상인의 이목이 집중되면 파블로가 바이올린을 켜기 시작하고, 존은 초보인양 너스레 피며 외발자전거에 간신히 올라타는 척, 하고선 마리가 던져주는 라임을 하나, 하나 받으며 저글링을 하는 거야. 외발자전거가 넘어질 듯 말 듯. 시장아주머니는 깔깔깔, 시장아저씨는 하하하. 선량한 시장상인들은 우리 품에 저마다 팔고 있던 사과, 바나나, 토마토, 고추, 양파, 마늘, 감자를 한아름 안겨주었어.

 

조선시대 '사당패'나 '광대패'의 삶이 이랬을까?  

서커스로 벌어들인 동전으로 그날 그날 숙박비를 치르고, 시장상인들이 준 갖은 야채로 숙소 부엌에서 저녁밥을 짓던 밤들. 숙박비를 내고도 수입이 넉넉한 날엔 술도 마셨지. 마당에 숯불을 피우고 고기를 굽고, 바이올린을 켜고, 북을 치고, 삶은 여행이자 동시에 축제였어. 그렇게 우린 함께 에콰도르의 도시를 떠돌기 시작했지. - To be Continued.


[남미방랑] 태어나려는 자는 알을 깨뜨려야 한다 - 에콰도르 1편

Written by @roadpherom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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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털리고 충격이 크셨을텐데 서커스라는 방식으로 알을 깨는것을 시작하셨네요 대단하십니다!

한동안은 트라우마에 시달렸지요. 그동안 아무렇지도 않게 떠돌던 남미의 도시고, 마주치는 길거리의 청년들이었는데...맞은편에서 몇 명의 패거리가 나를 향해 다가오기만 해도 저도 모르게 움찔하는. 결국 낯선 나라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 회복할 수가 있었죠. "세상에 친구란 게 이토록 좋은 거구나!"라는 걸 새삼스레 깨달았던 날들.

정말 특이한 여행을 하셨네요.
진짜 여행다운 여행을 하신것 같습니다. 다음편도 기대됩니다.^^

그렇게 남미를 떠돌기를 2년 반, 두 바퀴를 돌았군요. '틀을 벗어난 사람들'을 만나며...

아닐 비
형식 틀
복수 [z]

오늘도 호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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