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잇 연재소설) [PANic Song -chapter 4] Lucifer Effect(2)

in #kr-writing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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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lude - Blackened
Chapter 1 - Dog King(1)
Chapter 1 - Dog King(2)
Chapter 1 - Dog King(3)
Chapter 2 - HERO(1)
Chapter 2 - HERO(2)
Chapter 2 - HERO(3)
Chapter 2 - HERO(4)
Chapter 3 - Vertigo(1)
Chapter 3 - Vertigo(2)
Chapter 3 - Vertigo(3)
Chapter 3 - Vertigo(4)
Chapter 4 - Lucifer Effect(1)

오후 들어 날씨가 한층 포근해졌다. 내리쬐는 가을볕이 농익어 따스했다.

강의를 마친 신일은 무기력하게 학교 벤치에 걸터앉았다. 무엇을 가르쳤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 엉망인 수업이었다.

다시, 눈이 감긴다. 간밤의 악몽 같은 불면증도 이 나른함에 한 몫 하는 걸 테지. 이런 복잡한 기분만 아니라면 풀밭에 누워 한가로이 낮잠이라도 청하면 좋겠다.

인자하게 웃는 한 대령의 얼굴이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군 생활을 함께한 사람이다. 누구한테 낯붉히며 소리 한 번 친 적 없는 유순한 사람이었는데. 그가 기억하는 한 대령과의 추억은 이미 며칠 전의 영정사진에 뒤덮여 버렸다. 시큰해진 콧날을 가리기 위해 신일은 셔츠 앞주머니에서 구겨진 담뱃갑을 꺼냈다.

담배 한 모금에 군에서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난다. 3년이라는 시간은 딱 그만큼의 새삼스러운 무게를 지녔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혀끝을 누르는 니코틴 향이 오늘따라 묵직하다.

뒤엉킨 상념이 결국, 독이 되어 돌아왔다.

의구심은 늘 이렇게 인간의 의식을 지배한다. 투명한 컵에 떨어진 먹물 한 방울처럼 불쑥 찾아든 불신의 씨앗. 그건 순식간에 사람의 머리에 똬리를 틀곤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심란한 마음을 달랠 수 없어 신일은 담배 한 모금을 깊게 빨아 당겼다.

한 대령은 정말, 부정에 연루될만한 사람이 아니었나? 정녕 나는 그 사람을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나? 신일이 아는 한 대령은 기껏해야 일상에서 보아온 단편적인 모습이 전부다. 설령 그에게 이면(裏面)이 있었다 한들, 신일이 그걸 알았으리란 보장은 없다. 무엇보다 그가 평생 몸담았던 조직, 그곳은 명령에의 복종이 최선의 가치로 통하는 곳 아니던가.

30년. 무려 30년이다.
한 대령이 군인으로 살아간 시간은 신일이 감히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무게를 지녔다. 그 세월동안, 그는 모든 일을 오롯이 자신의 신념과 철학에 따라서만 결정할 수 있었을까? 애꿎은 담배연기를 내뿜어 봐도 신일은 마뜩한 항변의 말을 떠올릴 수 없었다.

인격체로서의 개인과 구성원으로서의 인간은 얼마나 무관한 존재던가. 성인(聖人)의 인품을 가진 자도 처한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흉측한 악마로 변할 수 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누군가를 몰아붙여야 하는 위치에 있었더라도 그는 여전히 선인으로 기억됐을까. 크세노폰(Xenophon)이 사형 집행관이었다면, 그는 끝까지 제 스승인 소크라테스에게 독배를 건네지 않을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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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 프란체스코 바사노(Francesco Bassano), 선한 사마리아인(The Good_Samaritan), 1651~1656
(下)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 소크레테스의 죽음(The Death of Socrates), 1787

마지막 담배 한 모금을 길게 내뿜는다. 그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이젠 정말 모르겠다. 그는 어쩌다 부정한 침묵이 낳은 괴물, 미노타우로스의 저주를 받게 되었나.

비틀어 쥔 담배꽁초를 쓰레기통에 던지며 신일은 습관처럼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그제야 그는 수신하지 않은 문자가 있다는 알림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투박한 개조식 문체, 김 소령이다.

낯익은 짜증에 신일은 겨우 추스른 마음의 고삐를 다시 놓치고 말았다. 그의 마음이 다시 심란하게 헝클어지며 춤을 춘다.

「경찰에 따르면 범인은 군 출신일 가능성 높다고 함. 경찰 개별 연락 시 최대한 수사 협조할 것.」

지금 이따위 걸, 수사진행 경과랍시고 떠드는 건가. 콧김 사이 성난 울분이 뿜어져 나온다.

아, 글쎄 30년이라니까! 그 기간 동안 한 대령과 연이 닿은 군인이라면 못해도 수백 명은 될 거다. 경찰은, 정말 이 정도 정보만으로 용의자를 추릴 수 있을 거라 믿는 걸까.

한심하구만. 답답한 마음에 신일은 담배 한 대를 더 꺼내 물었다. 담배필터를 잘근거리며 불을 붙이려는 순간, 전화기가 격한 진동을 전하며 울리기 시작한다. 담배를 걸쳐 문 채 내려다본 화면 속, 이름 없는 낯선 번호가 깜빡거린다.

이건 경험이기 이전에 상식의 문제다. 이런 전화가 즐거운 소식을 전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느낌이, 좋지 않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나신일 씨 되시나요?”

“예, 누구시죠?”

“안녕하세요. 전, 며칠 전 뵀던 정혜원이라고 합니다.”

“예?”

놀란 마음에 제 목소리가 어긋나 갈라지는 줄도 몰랐다. 정혜원이라면, 그 날 식장에서 만난 그 여자 수사관이 아닌가. 신일은 그녀에게 따로 연락처를 가르쳐 준 적이 없다. 심장이 쿵쾅거린다. 내가 건네준 적 없는 연락처를 이 여자가 알고 있다는 건.

“김상원 소령 통해 연락드려요. 그 날은 잘 들어가셨나요?”

슬픈 예감은 이번에도 틀리지 않았다. 김상원, 이 빌어먹을 개자식. 어금니를 빠득거리는 소리가 수화기 건너 혜원에게까지 들렸을지도 모르겠다.

“아… 예…”

분을 삼키기 위해 일부러 말을 아꼈지만, 그의 짜증 섞인 침묵은 비단 김 소령을 향한 것만은 아니었다. 용의자 신상에 관한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걸려온 담당 수사관의 전화라니. 누구에겐들 이런 전화가 반가울까.

“신일 씨에게 간단히 여쭤볼 게 있어서 연락드렸어요. 혹시 통화 가능하신가요?”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죠?”

“예, 수사 과정에서 새로운 단서가 발견돼서….”

“그런데요?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죠? 새로운 단서를 보다보니, 제가 유력한 용의자라도 된다, 뭐 그런 말씀이십니까?”

결국 신일은 치미는 분을 삭이지 못해 혜원을 쏘아붙였다.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어가는 그녀의 차분함이 외려 얄밉게 느껴졌기 때문일까.

“하하, 솔직히 아니라고는 말씀 못 드리겠네요.”

그건,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상대의 성난 달구침을 이렇게 받아칠 줄이야. 그가 어리둥절 머뭇거리는 사이, 벌써 몇 초간의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그 기회를 놓칠 혜원이 아니었다. 그녀는 상대의 빈틈을 파고들어 대화의 주도권을 잡는 게 심문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임을 알만큼 노련한 수사관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오늘은 그것 때문에 전화 드린 게 아녜요.”

“…”

“부검 결과 새로 알게 된 단서 중에 신일 씨한테 자문을 구해야 할 게 좀 있어서 말이에요. 지금, 통화 가능하신가요?”

“예… 뭐….”

한 방 먹었군. 신일은 마음속으로 겸연쩍은 탄성을 내질렀다. 역시 이 수사관, 보통내기가 아니다. 이토록 쉽게 대화의 주도권을 뺏겨 버리다니, 이 여자와 대화할 땐 평소보다 긴장할 필요가 있겠다. 대화에 집중하기 위해 휴대폰을 반대편 손으로 옮겨 쥐며 신일은 침 한 모금을 꿀꺽 삼켰다.

“혹시, 범인이 군인 출신일 것이라는 얘기는…”

“예, 이미 들었어요. 하지만…”

“하지만?”

“솔직히 그 정도의 정보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군요.”

“별 영양가 없는 정보라고 생각하시는 거군요.”

“당연하죠. 생각을 한 번 해보세요. 한 대령님은 사관학교 때부터 군에서만 30년 가까이 계셨던 분이라고요. 범인이 군과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정도의 추리는 수사 초동 단계에서 당연한 전제로 깔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한 대령님과 같이 일했던 사람, 같이 일하다가 부대를 옮긴 사람, 저처럼 같이 일하다가 전역한 사람까지 합치면, 잘은 몰라도 용의자가 수 백 명은 될 텐데요?”

“아니에요. 범인은 그런 평범한 군인이 아니에요.”

방금 전까지 보이던 재기발랄함이 무색해지는 말투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미 바늘 한 땀 들어가지 않을 만큼 단단해져 있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부검 결과 말인데요. 결정적인 사인은 추락사가 맞는데, 부검을 집행한 의사 말로는 등에 꽂힌 자상의 삽입 부위가 인상적이라고 하더군요.”

“인상적이라고요?”

“예, 우선 범인이 사용한 칼은 군용 M-7 대검으로 밝혀졌어요. 범인이 피해자를 찌른 부위는 정확히 등 오른편 아래, 신장 부위였고요. 의사 말로는 아마도 범인이 왼손으로 피살자의 입을 막은 채 오른손에 쥔 칼을 사용해 피해자의 오른 등 아래 신장 부위를 찔렀을 거라고 하더군요.”

“오른쪽 신장…”

“신일 씨도 전술학 교관 출신이라고 들었어요. 이게 뭘 의미하는 지 기억하시겠어요?”

시간의 태엽이 하릴없이 되감긴다. 신일의 기억 속 또렷이 남은 상흔, 그건 전술학 교관으로서의 트라우마였다. 적(敵)이라 불리는 또 다른 인간을 제거하는 기술을 가르쳐야 할 때, 그의 가슴은 까닭 없이 먹먹해지곤 했다.

그녀 말대로다. 한 대령을 살해한 방식, 그게 무얼 뜻하는지 그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신일의 눈앞에 낡은 전술학 교범 한 권이 펼쳐진다.

대검을 활용한 야간 급습 요령

신일은 책 한 귀퉁이에 적힌 문구를 찬찬히 읽어 내렸다.

「기도비닉 상태로 적의 후방을 제압해 왼손으로 입을 막고, 목과 쇄골 뼈 사이의 대동맥 또는 오른편 등 아래의 콩팥을 단호하게 찌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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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눈에는 연속동작을 설명하는 마지막 수식어가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

「단호하게」

자기보다 상대의 삶을 먼저 끝내야 하는 전장에서 망설임은 독(毒)보다 치명적이다. 그곳에서의 생존법을 체득시키기 위해 신일은 솜털이 채 가시지도 않은 젊은이들에게 대검을 단호하게, 적의 콩팥에 쑤셔 넣으라고 교육해야 했다.
수사관에게서 전해들은 타격 기술, 전술학 교범에 쓰인 내용 그대로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그 단호함마저 범인의 살인 기법은 교범의 모범답안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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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보상 1.46스달 찍혀서 보내드립니다. 감사해요 : )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화이팅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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