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축구] 축구와 정체성

in #kr-writing6 years ago

살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분야에서도 정체성을 찾을 수 있다.

축구로 하나 된 전국민이라고 회상하기엔 너무 어렸다.

나는 2002년 한일월드컵부터 축구에 푹 빠졌다.

좋아하다 보니 자주 하게 됐고, 자주 하다 보니 잘 하게 됐다.

친구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을 들었다.

축구는 ‘나’의 존재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해주는 수단이었다.

어렸을 적엔 내가 최고로 잘난 줄 알았다. 실제로 꽤 잘했다.


그러나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점점 커가면서 넓은 세계를 경험해보니 세상에는 나보다 잘난 사람들이 차고 넘쳤다.

‘선출(선수출신)’의 기본기는 따라갈 수 없었고, 성인이 된 나의 몸은 왜소한 편이었기에 피지컬적인 한계를 체감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축구 외에도 관심을 갖고 시간을 할애할 때, 축구를 꾸준히 한 사람들과 격차는 더 벌어졌다(개인적으로 나의 축구실력은 고3 때 정점을 찍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안 됐다. 이듬해 재수를 하게 되었고 이 시기에 축구실력이 많이 퇴보하지 않았나 싶다).


이제 나는 축구를 ‘쫌 하는’ 친구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내가 축구를 대단히 잘 하는 줄 안다는 게 문제다.

이게 왜 문제가 되냐면, 내가 여전히 축구를 통해 나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한다는 거다.

그러면 나는 취미에 불과한 축구 때문에 더 중요한 다른 것들을 놓치게 된다.

주객전도가 되는 셈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있다.

학교에 체육대회가 있었다.

우리 팀은 매번 1라운드 탈락을 면치 못하는 수준의 팀이었다.

여태까진 팀원들의 실력이 뒷받침되지 못해서 졌다고 탓해왔다.

그렇지만 이번 대회는 달랐다.

구성원이 바뀌고 수준이 올라갔다.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대회를 위해 매주 연습하고, 전술을 짜고,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다.

그리고 시합에서 언제나 그랬듯이 죽을 힘을 다해 뛰었지만 우리는 또 지고 말았다.

나는 경기 결과를 뒤바꿀 수 없었다.

브라질월드컵 결승전에서 패한 뒤 눈물을 보이는 메시. 천하의 메시도 아르헨티나에서는  아직까지 메이저 대회 우승컵을 들지 못했다. 축구는 혼자 하는 스포츠가 아니란 걸 다시 한 번 깨닫는다.

패배가 너무나 쓰렸다.

‘나’라는 존재가 한없이 무기력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이제는 ‘내가 정말 이 정도 실력밖에 안 되나?’ 싶은 자괴감만 커져갔다.

내 실력의 한계를 인정해야 하는 것이 너무 괴로웠다.

한계를 인정한다는 것은 내 정체성에 흠집을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가 가장 자존심에 상처를 받는 말도 내 축구실력을 비하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여태까지 내 객관적인 실력을 애써 외면하고 부정했을 거다.


그치만 이제는 인정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물론 스포츠에 있어서 건전한 승부욕은 바람직하다.

그런데 이 승부욕이라는 게 왜 축구에만 있냐는 거다.

나는 학생으로서 학업과 스펙, 회화능력 등 많은 지표로 평가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분야에도 승부욕을 가지고 덤벼들어야 하는 것이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않았다.

낮은 학점으로 무시 받아도 축구 못 한다는 한 마디보다 덜 상처받았다.

이런 상황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축구에 쏟아 부은 내 시간과 노력과 열정을 다른 더 중요한 곳에도 투자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 것이다.

사실 아직까지 내게 더 중요한 다른 게 뭔지 잘 모르겠다.

학점일 수도 있고 토익 점수일 수도 있고 대외활동이나 공모전일 수도 있다.

남들 다 하는, 그치만 나는 챙기지 못한 그런 것들.


어쨌든 내가 축구선수가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앞으로도 나는 축구를 사랑하겠지만 내 정체성을 축구 밖에서도 찾아 보기로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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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축구도 계속 사랑하시구 정체성도 잘 찾기를 바래봅니다 :)

감사합니다~~ 사실 오늘도 축구한답니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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