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체적 근황들 2

in #kr5 years ago

어떤 공연 날, 만나던 이에게 "사랑받으러 가네."라는 말을 들었다. 그때 나는 공연하기 싫다고 징징대고 있었는데, 그 말 한마디에 금세 행복해져 즐겁게 공연을 마친 기억이 난다. 어제는 공연 날이었다. 예쁘게 차려입고 거울을 보는데 그 말이 다시 떠올랐다. 오늘은 사랑받는 날.


최근엔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었다. 언제까지 방탕하게만 살 수는 없어 하루키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책을 읽다 보면, 어떻게 그렇게 내 상황과 딱 맞는 이야기인지, 또 그런 책을 고르게 되었는지 신기할 때가 있다. 실은 책 속에서 내가 원하는 내용만을 찾아 읽는 것이지만, 이 책은 유독 지금의 나와 더 맞닿아 있었다. 공감도 하고, 배우기도 하고, 다시 또 의지를 불태웠다. (언제나 이 게으름이 문제지만)

하루키는 집필뿐 아니라 번역일도 함께하는데, 번역에 대한 내용들이 유독 인상 깊었다. 그 부분을 읽으면서 내가 부업으로 하는 채보, 사보, 편곡일을 떠올렸다.


그 일을 부업으로 시작하게 된 것은 악보 만드는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 일을 좋아하지만, 태생적 게으름 탓에 쉽게 피아노 앞에 앉기 힘들고, 그래서 의무감으로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나서서 일을 벌이게 되었다.

좋아서 시작했지만, 이 일은 내겐 정말 돈을 버는 일이라 작업에 들어가는 노동 시간과 내가 생각하는 내 시급을 적당한 정도로 상정해 금액을 말하곤 한다. 가끔 정말 듣기 싫은 곡은 일언지하에 거절하기도 하고, 내가 생각한 적당한 금액에 터무니없는 액수를 덧붙여 말할 때도 있다. 이 일에서만큼은 제멋대로 폭군이다.

몇 년간 일하다 보니 얼굴을 본 적은 없지만, 단골이 돼 공연 때마다 내게 작업을 맡기는 이들도 있다.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서로 신뢰가 쌓이게 되는데, 그런 과정을 거치면 일이 작품으로 이어질 때도 한다. 몇 번의 작업을 함께한 사람들은 내게 꽤나 자세한 요구를 하기도 한다. 그럴 땐 퀘스트를 깨는 기분이 든다. 신뢰에 기반한, 또 거기에 세월이 쌓인 의뢰인과의 작업은 오히려 즐거워 돈을 터무니없이 저렴하게 받기도 한다.

이 일은 예술이라기보단 기술에 더 가까운 작업이다. 늘 단련해야 하는 기본기와 같은 일.이 일에 있어 나의 신조는 '돈 받은 만큼은 한다'인데, 그것을 지키기 위해선 부단한 공부가 필요하다. 가끔은 좀 고되도 그 공부의 과정이 즐거워 이 일을 계속 할 수 있다.


최근엔 큰 작업이 들어왔다. '단골' 중 한 명이기도 하고, 작업 자체도 재밌을 것 같아 넙죽 수락했다. 그 곡은 아는 후배가 편곡한 곡인데, 듣다 보니 괜히 그 후배가 느껴졌다. 곡을 들으면서는 잔기술을 부렸다고 생각했다. 자꾸 듣다 보니 결국 그 잔기술에 넘어가 그 곡이 좋아져 버렸다.

이런 작업을 하다 보면 창작의 욕구가 샘솟는다. 나도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새로운 걸 해보고 싶다는 생각... 늘 머릿속을 맴도는 이런 생각이 이어지게 하려면 당장 나가서 달려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어제 공연의 레파토리는 수없이 많이 했던 곡들이었었다. 다들 바빠 공연 날 아침에 모여 합주를 했다. 무슨 정신인지 합주 전까지 공연 곡들을 한 번도 쳐보지 않았다. 이미 백 번도 더 친 곡들이긴 하지만...

올해는 또 바쁜 시기를 보내고, 그 속에서 크고 작은 상처를 받았다. 이젠 정말로 공연을 하지 않겠다 생각했는데, 오랜만에 무대에 서니 또 즐거운 마음이 들었다.

공연에 대한 부담감이 줄어서인지 편한 마음으로 연주할 수 있었다. (내 딴엔) 가장 예쁜 @ab7b13의 모습으로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연주에 집중했다. 그 안에서 즐거웠다.


한참 영어 공부를 하던 내게 "너는 세상 모든 사람과 통하는 언어를 알고 있잖아."라는 말을 했던 사람이 있다. 그때 나는 말뿐인 말이라는 생각이었는데, 공연을 마치고선 그 말이 다시 떠올랐다.

며칠 전 누군가와는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이 하나라도 있다면, 그 사람의 삶은 어찌 됐건 행복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잠깐 나와있는 나는 당장 집에 가서 밀린 작업 끝내고 게임 하고 싶어 죽겠지만, 그래도 게임보다 더 좋아하는(어쩌면 사랑하는) 음악이 있고, '어쩌다 보니' 그 음악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살 수 있어 행복하다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덕질을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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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글에서 힘들지만 행복이 느껴집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 되세요.

카푸스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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