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가, 가지 마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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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나갔다, 회사로. 둘째를 낳고 일년쯤 육아휴직했던 아내가 복직했다. 아내가 집에 있어서 나는 좋았다. 다 좋지는 않았지만, 좋은 점이 더 많았다. 아들들은 엄마를 좋아했다.

나는 시한부 외벌이 가장이었다. 지난해 말과 올해 내 목표는 ‘존버’였다. 몇 번 위기가 있었다. 때마다 거짓말처럼 통장은 채워졌다. 어찌저찌해서 아내 복직 때까지 버텨냈다. 나새끼야 장하다.

복직을 앞둔 아내는 예민했다. 아내는 머리를 새로 했고 화장품과 옷을 몇 벌 샀다. 나는 집에서 고생한 아내에게 이벤트를 해주고 싶었다. 짱구를 좀 굴리다가, 접었다. 남세스러워서.

대신 선물을 했다. 귀걸이를 사주려고 했었다. 아내와 연애할 때 나는 귀걸이를 많이 사줬었다. 아내는 그걸 죄다 잃어버렸다. 선물로 몇개를 골라놨는데, 역시 접었다. 아내가 지갑 얘기를 해서.

아내는 핸드폰이 들어가는 지갑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돌려 말했다. 여성들은 지갑에 휴대폰까지 넣는 모양이구나. 백화점 매장 직원에게 “핸드폰 들어가는 지갑 주세요”라고 말했다.

직원의 동공이 흔들렸다. “해... 핸드폰이요?”라고 그가 물었다. 내가 그렇다고 답했다. 그가 그런 지갑은 없다고 혹시 클러치가 아니냐고, 되물었다. 나는 그 브랜드에서 제일 큰 지갑을 샀다.

이 일화를 아내에게 말해주었다. 아내가 크게 웃었다. 아내는 “보통은 클러치를 들지”라고 했다. 아내는 아이폰을 쓴다. 아내의 아이폰이 지갑 안쪽에 겨우 들어갔다.

나는 이튿날 술 약속이 있었다. 너무 오랜만에 술자리라 감을 잃었던 모양이다. 오후 11시에 술자리에서 일어났어야 했다. 나는 자정쯤 일어났다. 집에 들어가니 오전 1시 30분이었다. 아내는 격노했다.

다음날이 아내의 복직 D-1일이었다. 고급 호텔 베이커리에서 초콜릿을 잔뜩 바른 케잌을 샀다. 아내에게 세리모니를 해주고 싶었다. 나는 베이커리 직원에게 “초 큰 걸로 두 개 주세요”라고 말했다.

직원이 동공이 흔들렸다. “네까짓 게 스무살 짜리를 만난다고?”라고 그가 속으로 묻는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애가 둘이라 초 두 개다, 인마”라고 답했다.

문 여는 소리를 듣고 현관으로 마중 나온 만 4세 큰놈이 케잌을 보고 “오늘 내 생일이야?”라고 했다. 나는 “쉿, 엄마 주려고 샀어. OO도 주려고 샀어. 생일은 아냐”라고 했다.

초를 붙이고 노래를 했다. 내가 “‘OO아 복직 축하 합니다’라고 불러”라고 말했다. 큰놈은 복직을 축하한다고 했다가 생일을 축하한다고 했다가, 제멋대로였다. 초도 제가 불어 껐다.

큰놈이 우렁차게 노래를 부르는 동안 아기 의자에 앉은 작은놈은 시계추처럼 몸을 좌우로 흔들며 박자를 탔다. 큰놈이 초를 끄려고 일어나자 작은놈도 의자에서 일어났다. 작은 놈을 초를 불 줄은 몰랐다.

아들놈들을 보면서 아내가 웃었다. 아내에게 빵집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아내가 또 웃었다. 케잌이 맛있다고 아내가 말했다. 너무 달았는지, 큰놈은 케잌 한 조각을 다 먹지 못했다.

아내가 다시 사회로 나왔다. 아내는 아마 여기저기 부딪치고 치일 것이다. 그걸 생각하면 속이 아프다. 그래도, 아내가 웃는 날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아마 내가 잘 해야 할 것이다.

아들들을 생각해도 마음이 아프다. 오후 5시면 어린이집에서 하원 했던 아들들은 이제 오후 7시까지 어린이집에 있어야 한다. “어쩔 수 없다, 다 그렇게 큰다”고 혼자 되뇌어도 마음이 스산하다.

우리 부부가 집에 도착할 때까지 사내아이 둘을 봐주셔야 할 장모님께도 송구스럽기 그지없다. 장모님께 진, 또 질 이 빚을 어떻게 다 갚을 것인가. 이것은 도무지 갚을 도리가 없는 빚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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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사람사는 이야기가 제일 따뜻하네요. 베이커리 직원의 동공지진은 꼭 현장에서 보고싶네요.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갑자기 깜짝 놀라며 당황해 하더군요. 이자식아!

“네까짓 게 스무살 짜리를 만난다고?”

너무 자신감 넘치시는 상상 아니십니까? ㅎㅎㅎ

으악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뭔가 귀여운 일상 맘이 너무 예뻐요+_+!
아내분이 행복한 사회생활하게 되심 좋겠어요. 그럼 아들분들도 이해해주실거에요-외벌이로 버티시느라 수고 많으셨어여!!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수고는요 뭐 다 하는 건데요(라고 괜히 말해본다.)

남 얘기 같지 않습니다. 특히 와이프 격노 부분. ㅋㅋㅋ 크크거리며 읽었는데 마지막 세 문단에 afinesword님 마음의 복잡미묘함이 느껴지네요.

크크...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재미있는 일들, 웃을 수 있는 일들이 더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이 참 이쁘시네요.
가족이 서로서로 마음을 합하고 보태고 밀고 당기고 해서 아이들은 잘 자라고 가족력은 튼실해질꺼예요. 저 역시 울 엄니에게 진 신세를 어찌 갑나하는 생각이 드네요~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욱 잘 해나가야 하겠지요. 돌이켜보면 참 철이 없었다 싶기도 하고. 뭐 그렇습니다. 장모님께는 정말 휴. 어떻게 그 빚을 갚아야할지. ㅠㅠ

초두개는 투스트라이크 라는 뜻 아닙니까??

아... 아재요...

가족분 복직 축하드립니다. (존칼님은 힘들어지시겠지만..)

감사합니다! 그래도 재정적으로는 좀 숨통이 트일 것 같습니다.

여보 못난 남편이라 미안해...

빚이 빛이 되는 날이 올거에요.
근데 동공 너무 흔들고 다니시는 거 아닙니까 ㅎㅎㅎ

빚이 빛이 되는 날이 올거에요

아아 넘나 이터널님과 딱 맞는 좋은 말씀이옵니다. 감사해요.
동공은... ㅋㅋㅋ

아직 아이는 없지만 남일 같지 않아요. 1년의 육아휴직, 참 턱없이 짧은 기간인데.. 아마 어떤 분들은 그마저도 누릴 수 없는 경우도 많겠지요. 일을 하자니 아이가 걸리고, 아이를 보자니 통장이 무섭고.. 칼님, 잘 버티셨어요 :)

감사합니다! 쓰고보니 제 얘기는 글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ㅠ

맞습니다. 휴직 쓸 수 있다는 것만도 감사한 일이지요. 실은 권리인데. 그 권리를 행사하는 데에는 참 많은 눈치가 보이는 것입니다...

사랑 가득한 마음이 전해지는 글이네요~ 가즈앗!!! ㅋ

원장님 감사합니다. 다같이 가즈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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