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주의 ― 1

in #kr5 years ago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jpg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이미지 출처)

개인주의란 무엇인가? 예컨대 오직 자기의 이익만을 챙기며, 타인을 돌아볼 책임 따위는 없다고 믿는 삶의 태도가 개인주의인가? 어떤 면에서는. 그렇지만 그런 식의 태도는 사실 인류 역사 내내 늘 흔하게 있어 왔던 것 아닌가? 사실 인간의 본능 그 자체 아닌가? 그렇다면 그들이 다 개인주의자들이었단 말인가?

개인주의는 근대적 현상이고 개념이다. 그것은 인간의 본능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본능은 철저히 집단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한다. 즉 인간은 오로지 집단적인 것에서, 집단의 이익에서 궁극적 의미와 가치를 발견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집단적이다. 개인주의 사회라는 현대지만, 아이들의 사회를 한번 관찰해 보라. 그들은 한편으로 지극히 이기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자연스럽게 집단을 형성하고, 그에 따라 일정한 의미의 질서를 형성하며, 그것에 위배되는 자들을 따돌리고 괴롭힌다. 아이들은 집단(다수, 여론, 평균)에 거슬러 자기 혼자 멋대로 튀는 것은 나쁘다고 본능적으로 느끼고 합의하며 법을 집행한다.

이런 집단주의적 세계관과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공존할 수 있으며 당연히 공존한다. 사실 집단적 쾌와 자신의 이익은 잘 구분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이익이라는 측면에서는,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집단에 녹아들지 못하고 자기 혼자 걷는 개인적 아이야말로 제 손해를 자처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에고가 강할수록, 머리가 클수록 이해관계에는 둔하고 뻣뻣하며 어리숙하게 마련이다. 즉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태도와 개인주의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개인주의는 이익 추구의 문제가 아니라 소신의 문제고 세계관의 문제며 철학의 문제다. 본능적 이익 추구가 아니라 의식적·이성적 태도고 체계다.

인간 역사의 어느 시기에나, 지구 어디서든, 인간이라는 관계적 동물의 단위는 무리고 집단이었지 개인은 결코 아니었다. 인간사를 집단과 집단의 끊임없는 투쟁으로 바라본다면, 집단으로 환원되지 않는 개인이란 배신자고 위험분자며 제거해야 할 트롤일 뿐이다. 이것은 관계적 동물의 본능적 시야고 감정이다. 이것이 그들의 도덕이고 공감이며 역사다. 영원히 끊임없이 되돌아와 사람들을 휘감을 지도다. 언제고 인간 사회 권력의 유효한 단위는 집단이지 개인은 아니다. 보수적 권력이든 개혁적·저항적 권력이든. 어디든 권력이 문제가 되는 곳에서는 개인은 장애물일 뿐이다. 언제고 사람들은 짚단에 머리를 묻는다. 사람들에게 옳은 것은 무엇인가? 집단에 옳은 것, 집단에 이익이 되는 것, 집단 안의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다. 짚단처럼 따뜻하고 푸근한 것이 옳은 것이다. 개인의 이성, 개인의 양심, 모든 차가운 것, 차갑게 하는 것은 저주를 받으라! 전근대에는 이것을 멍석과 바비큐 파티로 가르쳤다. 근대 이후에는 매스 미디어로 바뀌었을 뿐이다. 전자는 묶지만 후자는 스며든다.

집단이라는 개념이 애매모호하다고? 당연하다. 원래 애매모호한 개념이니까. 애매모호한 맛에 쓰는 개념이니까. 집단적 개념 중에 명석판명한 게 어디 있나? 명석판명은 르네의 문제지 우리의 문제가 아니다. 예컨대 다수가 같은 동작을 취하는 것은 의미를 자아내는 가장 자연스럽고 효율적인 스텝이다. 무슨 동작을 취하든, 그것은 그 자체로 춤이 되고 말이 되며 현실적인 것이 되고 합리적인 것이 된다. 그것은 집단의 이익이라고도 불린다. 사람들은 어떤 국민의 감정에 반대하기 위해 국민감정을 운운한다. 두 감정 사이에 어떤 의미의 차이가 있길래? 집단의 이익, 다수, 국민, 큰 목소리가 현실에서 구분되는가? 집단의 이익은 정말로 집단의 이익 그 자체던가? 오히려 반대로 드러나는 경우가 부지기수 아닌가? 때로는 집단 자살을 말리려는 사람을 반집단분자로 매도하지 않던가? 나중에는 「다들 그렇게 떠들어 대서 어쩔 수가 없었어!」라고 자기변명을 하지 않던가? 그럼에도 사람들은 집단이라는 개념을 훌륭하게 휘둘러 대며 반집단분자(찐따)들을 가려내고 응징한다. 모든 것이, 심지어 개체적 이해조차도, 집단이라는 회로를 거쳐 조직된다. 짚단 인형 주위로 안개가 끼고 의미의 세례가 저절로 쏟아진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집단의 상 아래에서 모든 걸 본다. 사람들은 자기조차 집단의 눈으로 본다. 집단감각은 놀라울 정도로 정밀하고 감탄스러울 정도로 기만적이며 두려울 정도로 실제적이다.

개인주의는 개인을 집단과 독립된 유의미한 주체로 인정하고, 그 영역과 활동의 독립적인 의미를 인정하며, 각자의 정신의 독립성과 모험심을 고취하고, 그를 위한 권리와 방패를 주장하는 개념이다. 예술가를 떠올려 보라. 예술가의 예술은 많은 경우 다수가 이해할 수 없으며 심지어 혐오스럽기까지 하다. 예술은 집단의 이익에 반하기도 한다. 사람들의 본능은 이런 예술을 나쁜 것으로 인식하고 공격하며 금지시키고 싶어 한다. 다수에게 불쾌감을 주는 것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이다 : 이것은 인간의 본능적 명제다. 개인주의는 이에 맞서, 개인의 활동에는 다수의 이해와 별개의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옹호하고 개인의 권리를 보호한다. 개인주의란 집단으로 환원되지 않는 개인 및 그 개인에 기반을 둔 질서 체계에 대한 신념이다. 개인주의는 지극히 인위적인 것, 본능에 맞서는 것, 근대적 작품이다.

따라서 개인주의는 한편으로 철저히 사회적이다. 개인으로서의 권리를 제도화·사회화하여 보호하고 교육하지 않으면 개인이란 공허한 소리일 뿐이기 때문이다. 개인도 사람들 사이에서 사니까. 그러나 개인주의는 한편으로 초사회적이기도 하다. 사회로 환원되지 않는 개인의 의미와 무게, 현 사회를 넘어설 수 있는 개인의 힘도 긍정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사회와의 영원한 불화, 영원한 거리, 영원한 경멸도 전제하기 때문이다. 낙원에는 개인이 있을 수 없다. 개인은 쇠사슬을 끊으려 들 뿐 아니라 그 쇠사슬로 쌓아 올리는 낙원에도 반대한다. 낙원에의 행진곡은 언제나 정신의 장송곡이다. 개인은 모든 집단적 낙원, 낙원에의 집단적 기획에 대한 영원한 불신자고 구토자다. 라파엘은 유토피아와 함께 있을 수 없다. 인간을 가장 비소하게 만들고 비참한 십자가를 지게 하는 것은 집단이 아니라 사회를 운운하는 반집단적 집단이다. 사회적 정의가 개인의 심연에 대한 겸손과 거리를 잊어버릴 때, 정의의 논리가 개인의 회의를 덮을 때, 인간을 영원히 구토케 하는 파국이, 어떤 사회적 불의보다도 무서운 인간성의 파국이 도래한다. 많은 경우 사회 담론은 가장 변태적으로 진화한 집단 논리가 된다. 사회와 초사회 사이의 이 아슬아슬한 긴장을 따라 개인주의의 오묘한 스펙트럼이 형성된다.

옆집이든 밑집이든 상관하지 않고 소리를 낼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은 개인주의자일까? 길거리를 걸으며 나 좋을 대로 유유자적 담배 연기를 내뿜는 사람은 멋진 개인주의자일까? 그냥 유아일 뿐이다. 개인주의란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태도가 아니라, 유의미한 실체이자 의미의 담지자로서의 개인의 영역 및 권리를 존중하는 태도다. 따라서 다른 개인들의 권리, 그들이 개인적 삶을 온전하게 추구할 권리를 침해하는 것은 오히려 철저히 반개인주의적인 태도다.

이는 앞서 보았던 예술의 불쾌와는 다르다. 예술이 아무리 불쾌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사람들의 개인으로서의 권리를 침해했다고 할 수는 없다. 예컨대 보기 싫으면 안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인간의 본능, 인간의 집단적 감정은 다수에 반하는 개인의 존재 자체를 참지 못하고 단죄하고 싶어 한다. 그의 존재 자체가 불쾌고 안녕의 침해다. 그것은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결코 주체할 수 없는 맹렬한 불길이다. 대중의 결벽증. 사람들은 개인의 권리를 제약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개인들과 공존할 수 있는 수많은 현실적 방도들은 말도 못 꺼내게 하기 마련이다. 현실이라는 만능 단어는 얼핏 이성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다수의 감정을 자신의 유일한 논리, 절대적 가치로 삼는다. 반사회적 개인에 대한 집단적 분노라는 뜨거운 힘과 현실이라는 차가운 합리적 단어가 결합하면, 현 인간 사회의 의식 구조 수준에서는 매장하지 못할 개인이 없다.

따라서 개인주의 부재의 결과는 마치 정반대인 것처럼 보이는 두 모습, 즉 다른 개인들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 철면피와 개인의 독립적 권리 따위 알지 못하는 집단 논리의 공존이다. 그렇기에 개인주의는 오히려 철저한 사회적 관념과 제도를 요구한다. 개인은 인간의 본능적 시야―타인의 권리고 뭐고 내 이익만을 추구하는 유아적 시야, 나와 가까운 이들을 편파적으로 챙기는 시야, 우리 안으로 따뜻하게 녹아드는 시야, 맹목적인 애국심·애족심―를 넘어서는 사회적 조망과 개념을 요구한다. 사회적 원시와 마찬가지로 몰사회적 근시도 개인을 보기에 부적합하다. 개인주의자가 차갑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그들이 자기만을 위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많은 경우,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그들은 「유도리」와 「인간적으로」를 거부하고 혐오하는 원칙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불쾌할 정도로 맺고 끊음이 확실한 것은, 그들이 자신의 이익을 철저히 챙겨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따뜻한 집단적 어울림이 전제하는 비합리적·반개인적 부조리를 혐오하기 때문이다. 사회를 집단(무리, 우리, 정, 끈끈함, 눈치, 정치)과 동의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개인주의자들은 「사회성」이 결여된 자들이다. 그러나 개인주의자들만큼 사회를 철저히 의식하고 요구하는 이들은 없다. 많은 예술가들이 얼마나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은지 떠올려 보라. 물론 그 관심의 질이 별로 좋지 못하다는 것과 별개로 말이다. 예술가는 사회를 요구하고 사랑하지만, 사회는 붓으로 그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 안에서 예술은 연극으로, 도덕으로 타락한다. 예술은 사회와의 심연적인 거리에 의해 성취된다. 하여간, 집단주의자건 개인주의자건, 인간이 바깥을 요구하고 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의미 형성의 경로가 다를 뿐이다.

물론 개인주의는 사회에 관심이 없을 권리도 보장한다. 다른 사람들의 개인으로서의 권리만 존중한다면 말이다. 그렇지만 이 문제는 끝없이 논쟁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개인으로서의 권리가 사회에 의해 보장되는 것인데 개인이 사회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배신 아닌가?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모른단 말인가? 하지만 그렇게 사회에 관심을 기울일 의무를 주장하기 시작하면 사회와 독립된 개인의 영역이 실질적으로 남긴 하는가? 사회적 개인의 이름으로 더 근원적인 개인을 덮어 버리는 것 아닌가? 논쟁이 시작되면, 한쪽에서는 개인주의라는 연약한 인공적 외피를 뚫고 집단 지향적 도덕이라는 인간의 본능이 뜨겁게 솟구쳐 오른다. 사회 문제에 관심이 없는 예술가에 대한, 권유나 비판을 넘어선 분노와 증오의 감정. 반대편에서는 개인주의자에게도 남아 있는 자연스런 사회에의 지향마저 죽여 버리고 더욱 철저한 순수 예술의 동굴로 틀어박히게 마련이다. 연인 사이의 싸움이 그러하듯, 이 역시 한번 꼬이면 답이 없다.

이는 개인이라는 인공물 자체의 어려운 성격, 누구도 100% 개인주의자일 수는 없는 부자연스런 성격 때문이기도 하다. 개인은 인간의 힘을 효율적으로 보호하고 흐르게 하기 위한 칸막이다. 그러나 모든 칸막이가 그러하듯, 그것은 어떤 관점에서는 힘의 자연스러운 흐름과 변화를 가로막고 가두며 썩게 만드는 것일 수도 있다. 개인은 위대한 발명품이지만 인간과 100% 합치하는 운명은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개인이라는 칸막이를 치워 버리는 게 답이 될 수 없음은 더더욱 명백하다. 아무리 자유로운 사회더라도, 개인의 정직한 입을 막고 양심을 비틀며 달달한 위선을 강요하고 정신이 나가게 하는 수많은 더러운 독들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화, 상식화, 평균화, 집단감각화. 개인을 양보하는 것은 대체 불가능한 필터를 버리는 것이다. 까탈스럽다고, 거추장스럽다고 코를 자르는 것이다. 그 빈 자리를 바보 같은 나무 막대기가 아닌 근사한 실리콘으로 대신한 채. 개인이 아니라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개인이 아니라 사회적 현상이 되는 것이다. 사회의 자유란 도덕가와 평론가, 연극가와 배우의 자유지, 철학자와 예술가의 자유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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