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 쇼핑

in #kr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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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 페르메이르, <진주 목걸이를 한 여인>. 이미지 출처)

옷 쇼핑만큼 감정이 극에서 극으로 왔다 갔다 하는 일도 없다. 하기 전에는 귀찮고 짜증 난다. 헝겊 쪼가리 따위에 시간을 낭비하고 힘을 써야 한단 말인가? 아, 그리운 에덴이여! 아, 허물 입은 동물, 너를 저주한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갈수록 누구나 기대감 섞인 고민을 하게 된다. 옷은 감각적이고 즉각적인 쾌를 준다. 그 점에서 옷은 책도락보다는 식도락과 가깝다. 멀리 있을 땐 귀찮고 짜증 나더라도 가까이 갈수록 저절로 기대되는 것은 즉각적·감각적 쾌의 공통적 성격이다. 그것들은 그 자체로 안정적인 쾌를 약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옷은 나를 표현하고 기획하는 고차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안과 밖 양방향으로 동시에 향하며 또한 양방향을 엮기에 어렵고 즐겁다. 옷은 또한 일회성 쾌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장기간을 계획하는 문제기도 하다. 밥은 먹으면 그 순간 끝이지만, 옷은 계속해서 보관하고 입어야 하며 시간의 시험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맛만 있으면 그만인 밥에 비해, 옷은 챙겨야 할 게 정말로 끝이 없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밥도 많은 것을 챙기며 장기적으로 먹어야 하지만, 이상하게도 식도락은 그렇게 성립할 수 없다. 하여간, 옷 쇼핑 중에는 시간이고 힘이고 무한대로 쏟아부어 상품을 보고 또 보고 이곳 저곳 왔다 갔다 하며 이곳에 존재하는 엄청난 수의 상품들 중 '최선'을 고르고야 말겠다는 미친 계획을 열정적으로 실행한다. 공부를 그렇게 했다면 얼마나 좋았으랴?

돌이켜 보면, 그렇게 엄청난 양의 시간과 수고를 들여 골치 아픈 짐을 하나 더 늘릴 필요가 굳이 있었는가 회의하게 된다. 이는 우선 옷의 극단적으로 양면적인 성격 때문이다. 즉 옷은 가장 쉽고 즉각적이면서도 고차적인 쾌를 주는 것인 동시에, 사실 그 쾌를 추구하지 않아도 실생활 및 진정한 고차적 삶에는 전혀 문제가 없는 헝겊 쪼가리일 뿐이다. 반면 밥이나 책은 통상적 의미망 속에서 언제나 실용적·연금술적 의미를 부여하고 정당화할 수 있다. 속물조차 책을 읽지 않는 자신을 탓할 뿐, 사서 꽂아 놓은 책의 무의미함 자체에 우울을 느끼는 경우는 적다. 둘째로, 옷은 은근히 관리가 귀찮고 사용이 까다로운 물건이다. 일상적으로 쇼핑하는 물건들 중 옷만큼 귀찮고 까다로운 물건이 또 있는가? 공간에서, 이삿짐에서, 집안일에서 옷이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해 보라. 현자들의 소박하고 지혜로운 삶을 묘사할 때 '꼭 필요한 만큼만 있는, 어떤 장식도 부담도 없이 편하게 입고 관리할 수 있는 옷'이 단골 레퍼토리인 이유가 있는 것이다. 소유의 일반적인 우울은 소유할수록 오히려 내가 소유당한다는 빠져나갈 수 없는 감정이다. 이것은 다른 어떤 물건보다도 옷에 대해 많이 발견된다. 그럼에도 옷 쇼핑이 새하얀 현자 타임인 경우는 없다. 그것은 언제나 색에 사로잡혀 있다. 옷 쇼핑은 언제나 최고의 옷을 고르지 부담 없는 옷을 고르지는 않는다. 합리성의 비합리성. 이렇게 쓸데없이 소모적으로 '최선의 가능성'을 추구하게 만든다는 점이 또한 은근히 화가 난다. 아무리 합리적인 사람이라도 엄청난 가짓수의 화려한 옷들을 보는 순간, 시간과 힘을 있는 대로 낭비하며 최선의 가능성이라는 있지도 않은 허영을 쫓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미 여러 곳에 깊숙이 달라붙어 버린 휘드라-네소스의 독을 시원하게 벗어 버릴 수는 없다. 내 눈으로 선택하고 약속을 하고 기대를 하고 같은 시간에 입으며 길들여 버린 옷과 헤어지는 것은 나를 찢는 듯 아파서 눈물이 나니까. 옷이 가지는 장기성은 미니멀리즘적 지혜를 방해하는 '가능성의 미련'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것들은 불 한 방에 새하얗게 꺼지는 것이지만, 오직 불로만 꺼지는 것이기도 하다.

옷은 현대의 어떤 분야보다 다양하며, 그 어떤 다양성보다 쉽게 감별된다. 밥은 수고 대비 다양성에서 옷과 비교할 수 없으며, 책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똑같은 라면 받침일 뿐이다. 오직 패션 산업만이 눈에 보이는 개인을 제공하며 개인을 개인-소비자로 만든다. 물질적이고 관능적이며 모두의 눈에 보이는 실체의 조형. 개인이 개인-소비가 되듯, 그 거대하고도 쉬운 미궁 속에서 합리성은 나갈 길을 잊은 실이 된다. 쇼핑은 현대적 합리성이 추구할 만한 '눈에 보이는 것'을 얼마든지 제공한다. 근대적 합리성 그 자체인 시계만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을 뿐.

옷의 극단적 양면성과 우울·허무감의 본질은 철저한 타인 의존성이다. 옷은 자아의 허영 그 자체인 물건이다. 사실 남에게 보여 주지 않고도 인간은 살 수 있다. 남들이 나를 신경 쓰지도 않는다. 옷 앞에서 하게 되는 즐거운 상상(예컨대 타인들의 주목)은 곧 흔적도 없이, 정말로 내 기억에조차 남지 않고, 사라진다. 타인들이 바라보더라도, 타인의 눈에 의존하는 쾌 자체가 결국 피곤하고 허무하다. 거기에 무슨 알맹이가 있다는 말인가? 허영으로 인해 인간은 잠깐 즐겁지만 동시에 영원히 무거워진다. 모두의 눈에 보일 가장 아름다운 시각 효과는 인간에게 자신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진정한 나,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시간과 힘은 엄청나게 소모되어 버렸지만 말이다. 사실 그것은 실제 타인조차 없는 기이한 타인 의존성이게 마련이다. 하기야 타인이란 결국 자기의 마음이 빚어내는 해골이니까. 옷을 정리하면서 함께 정리하는 것은 자신을 타인에게 물질적이고 관능적인 형태로 표현하겠다는 허영이다. 껍데기는 가라.

그러나 이런 허영심과 바보 같은 기대감, 재앙적인 비합리성이 없는 나의 세계는 어떤 색을 띠고 있을까? 인간의 많은 불행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데서 옴을 누구나 알고 있다. 진정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누구나 지껄인다. 그러나 100개의 눈이 감긴 공작이란? 타인의 시선을 제거할 때 정말로 온전한 내가 남을까? 나라는 자아는 거울과 타인의 눈동자 없이 성립할 수 있는가? 머리카락 없이 머리만으로? 뱃속으로 꺼지는 밥과 허여멀건 책만으로? 타인에 의존하지 않는 나를 지껄이는 자들은 정말로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고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세계에 들어가 본 걸까? 화려한 현대 도시 속에서 유일하게 색을 찾을 수 있는 곳은 쇼윈도뿐. 설령 그것이 사막의 신기루라도, 신기루도 없는 방향 없는 사막보다는 나아. 적어도 그것은 가장 빠르고도 유일한 기분 전환 수단이 되지. 메아리의 세계에선 모든 것이 영원히 방향 없이 되돌아오니까. 많은 경우 오직 옷 위에서만 개인은 명시화되고 조직되며 방향을 가진 개인이 된다. 내가 옷을 입는 것일 뿐 아니라 옷이 나를 입는 것이며, 내가 거울을 보는 것일 뿐 아니라 거울이 나를 보는 것이다. 그것은 무서울 정도로 실제적 효과를 가진 매듭이다. 인간의 몸은 의식 이전에 이미 감각과 시선의 파도를 타고 있기 때문이다. 혹은 그것은 물을 댈 논이 된다. 물질적 관능은 많은 경우 유일한 개성의 길이다.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자신을 자신이 사랑한다는 것은 사실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정쩡한 개인의 이상은 옷과, 패션과 불가분의 관계로 묶인다. 그들의 패션-개인은 고정된 위치를 지정해 주는 전통적 결합에서도, 옷의 허영과 소모를 경멸하는 정신적 개인의 세계에서도 생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입을 옷이, 입을 옷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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