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난다

in #kr5 years ago

손의 동굴.jpg

(모두가 힘을 합치면 불가능할 것은 없어! 이미지 출처)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 그렇지만 사람들은 때로는 연기가 아닌 것을 연기라 착각한다. 때로는 연기가 어떤 굴뚝에서 나왔는지를 착각하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실제로 연기를 본 사람, 연기를 봤다고 처음 말한 사람을 물으면 언제나 그 행방은 연기처럼 묘연하게 마련이다. 연기는 사실 연기일 뿐일 수도, 그 기원이 끝없이 연기되는 것일 수도 있다. 사람들 사이에 어떤 연기가 감돌기 시작하고, 그것이 무슨 힘에 이끌리듯 점차 의심할 수 없는 강제력이 되어 가는 광경을 보는 것은 언제나 섬뜩하다. 인간과 인간 사이를 감싸는 연기는 개별 인간의 이성과는 별개다. 그곳에서 인간은 자기로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연기의 입이 된다. 따뜻하고 달콤한 최면 가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하지만, 발을 빼도 괜찮지 않을까?

​친애하는 PC 투사들이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라는 속담을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난다」로 대체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들이 행해 왔던 어떤 언어 정화보다도 정의로운 일을 한 것이 된다. 유감스럽게도 그들의 영혼의 색깔은 어떻게든 연기를 찾아내려고 혈안이 된 이단 심문관에 가까운 듯하지만.

​누군가가 연기에 대해 떠들어 댈 때, 면전에서 「그건 좀 비합리적이지 않아요?」라거나 「확실한 근거가 있어요?」라고 똑 부러지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가장 비판적인 프로 불편러들끼리만 모아 놔도 그렇다. 가장 성실한 사람들만 모아 놔도 그중 다수는 불성실해지듯. 하여간, 그렇게 반론하지 않고 마냥 계속 듣고 있으면 그것은 어느새 마음 속에서 그럴듯한 실체가 되어 있다. 그리고 그 말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순간, 이제 그것은 확실한 진실이 되고 진실이어야 하는 것이 된다. 그는 한 말을 탄 것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고 합리적으로 따져 보는 것이 생각보다 많은 소모를 요구하는 짓이라는 점도 지적해야 한다. 사람들은 개별 메시지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개별 메시지 각각을 합리적으로 해부해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메시지를 범주화해서, 예컨대 그것이 어떤 입에서 나오는가로 인식하고 판단한다. 예를 들어 그것은 정부의 공식 발표니까 믿는다/믿지 않는다. 그것은 약자의 말이니까 믿는다/믿지 않는다. 이런 방식을 통해 사람들은 소모를 최대한으로 줄이고 빠른 판단을 내리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이 같은 것을 떠들어 댄다'는 것을 사람들은 어떤 범주로 인식할까? 한편으로, 합리적 담론의 관점에서 '많은 사람이 같은 것을 떠들어 댄다'는 어딘지 군중심리의 안 좋은 냄새를 풍기는 미심쩍은 것이다. 그러나 결국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이 떠들어 대는 같은 것을 믿게 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같은 것을 떠들어 대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와 가치의 절대적 원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양이 곧 질이다. 심지어 다수를 경멸하고 자신의 진실을 믿는 소수조차도, 자신의 진실이 다수와 일치하는 부분, 다수에 합류할 수 있는 부분을 본능적으로 끊임없이 찾고 있게 마련이다. 인간은 자신이 다수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견딜 수 없다. 다수를 믿지 않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엄청난 정신적·감정적 소모다. 다수가 같은 것을 떠들어 댈 때 평범한 사람이 휩쓸리지 않는다는 것, 전염되지 않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나마 다수 여론과 무관한 객관적 실체 그 자체가 명확히 밝혀질 수 있는 사건, 마녀사냥이었다는 것이 선명히 드러날 수 있는 구도면 낫다. 그러면 사람들은 「군중심리에 휩쓸리는 대중들ㅉㅉ」이라는 식으로 태세를 전환한다. 마녀사냥이라는 또 하나의 익숙한 서사. 그러나 오류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생겨나는 게 아닐 텐데. 마녀가 아닌 사람을 마녀로 단죄해서 마녀사냥인 것이 아닐 텐데. 목적과 결과만이 아니라 수단과 과정도 중시하는 감각은 사람들 사이에서 드물다. 어찌 되었건, 선명한 결과를 가질 수 있는 사건이면 그나마 낫다. 그러나 (주목받지 못하는) 많은 경우에는, 「다수가 그렇게 생각하게 만든 네게도 책임이 있어!」라는 결론이 나게 마련이다.

​다수는 따뜻할 뿐 아니라 좋은 방패기도 하다. 자신이 편승한 다수의 지껄임이 마녀사냥으로 드러나도 실질적으로 손해 볼 것은 없다. 책임이란 언제나 n분되기 때문이다. 다수 속의 개개, 대중 속의 개개의 책임은 한없이 0에 수렴한다. 「그때는 다 그렇게 생각했어!」 다수를 처벌할 수 있는 법은 이 세상에 없다. 피해자도 있고 가해자'들'도 있지만 책임질 사람은 없다. 모든 건 저 익명의 연기가 저지른 짓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사람들은 애초에 사실 그 자체 같은 건 원하지도 않는다. 함께 수다를 떨며 욕할 수 없는 사실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떠들 수 있는 것을 보고, 뭉칠 수 있는 것을 본다. 사람들에게는 차가운 사실이 아니라 연기와 굴뚝과 불이 필요하다. 모든 공동체가 마녀와 케이크를 필요로 하듯.

​소유물에 대한 집착과 불안은 주된 굴뚝 중 하나다. 왜? 소유물을 지키기 위해서는 합리적으로 사실을 분별해야 하지 않나? 무슨 소리! 그건 너무나 소모적이고 비경제적이다. 불안한 건 바로바로 태워 버려야 안심이 되는 법이다. Caedite eos. Novit enim Dominus qui sunt eius. 그 불을 쬠으로써 불안은 녹고, 함께하는 '우리'를 확인하며 따뜻해진다. 앞서 보았듯, 여기에 실질적인 책임이 요구되지도 않는다. 소유물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사람들은 마녀 정도는 얼마든지 만들어 낸다. 어미 곰의 합리적 광기.

​다른 사람에게 듣는 것만으로, 여럿이 함께 떠드는 것만으로 유의미한 실체를 직조할 수 있는 능력. 이것은 인간의 생존에 크게 기여한 것이며 어쩌면 인간성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을 다시 다른 사람에게 그럴듯하게 썰을 풀고 퍼뜨릴 수 있는 능력, 실체 없이 수다를 떨 수 있는 능력, 계속해서 살을 붙여 갈 수 있는 능력. 이것이 인간성의 본질일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타인을 믿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동물이다. 타인에, 다수에 온전히 몰입해 공감하고 공명하며 공통의 세계를 형성할 수 있는 동물이다. 그러나 모든 약은 독이기도 하다. 믿음과 공감은 그것이 광대한 공통의 세계를 형성할 수 있는 만큼이나 폐쇄적이고 맹목적인 원리기도 하다.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은 누군가를 불신한다는 것이고, 누군가에게 공감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공격한다는 뜻이다. 모닥불은 언제나 연기와 괴물을 낳는다. 그것은 사람들을 따뜻하게 덥혀 주고 결속시키지만, 잠재우고 질식시키기도 하며, 때로는 태워 죽이기도 한다.

Coin Marketplace

STEEM 0.28
TRX 0.13
JST 0.032
BTC 61095.28
ETH 2922.98
USDT 1.00
SBD 3.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