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의 담론

in #kr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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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공감?)

나는 공감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성적인 논쟁의 과정을 쉽사리 대체하는 수단이 되는 공감을 좋아하지 않는다. 심지어 어떤 특정한 감정을 「공감하라」고 강요하는 수단이 되는 공감의 담론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식의 공감이 대체 무슨 개념인 걸까? 그것은 이성이 아닌 감정의 관점에서도 저질이다. 수련회의 눈물 같은 식의 공감이 감정이라 칭하는 건 감정에게 모욕이다.

애초에 이런 식의 공감 담론, 오늘날 사회에 만연하며 강요되는 공감 개념이 공감이라는 개념을 제대로 다른 개념들과 구분하고 정의하며 사용하고 있는 걸까? 누구에게 공감해야 하고 어떻게 공감해야 하며 어느 정도나 공감해야 하는지, 그 정당성은 어디에 있는지, 그 의미와 가치는 궁극적으로 어디에 있는지, 그 원리와 한계를 명확히 하고 사용하고 있는 걸까? 만연한 공감론자들은 오히려 이런 식의 질문을 낯설어하거나 불쾌해하지 않을까? 일종의 차가운 부도덕, 신성모독으로 말이다. 공감의 결여로 말이다. 오늘날 공감이라는 단어는 마치 모든 사람이 제대로 공감을 할 수 있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사용되고 있다. 공감은 그 자체가 도덕적 선인 것처럼 사용되고 있다. 그 말은 즉, 이 공감이라는 개념부터가 제대로 정의(한계)지어진 채로 사용되고 있지 않다는 의미다. 모든 약은 동시에 독이며 그러므로 효용이 있다. 따라서 어떤 약도 만병통치약일 수는 없다. 그것은 약장수일 뿐이다.

공감이니 감정이니를 운운하는 이들의 절대적인 공통점은, 이들이 실제로 '타자'의 감정은 안중에 없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사실 '우리'만이 있을 뿐이다. 많은 선량한 공감과 감정이 빠져드는 함정. 예컨대 약자,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던 도덕적 감수성 및 당위에 의해 '우리 편'으로 전제되는 그 약자라는 대상에 쉽게 감정 이입하는 자신의 감정은 의심 없이 선이 되고, 그렇지 않은 타자의 감정은 의심 없이 악이 된다. 논증이나 논쟁, '이해'의 여지 따윈 없다. 공감하는 이들은 공감하지 않는 이들에 공감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결여'된 것이고 '열등'한 것일 뿐 이해해야 할 '다름(=잠재적 우리 편)'이 아니게 된다. 왜 그들에게는 공감하려 하지 않지? 공감이 대체 무엇이길래? 누구에게 공감하고 왜 공감해야 하며 어느 정도나 공감해야 하지? 그 의미와 정당성은 어디에 있는데? 공감이라는 것이 대체 어떤 도덕적 전제와 지형, 어떤 도덕적 당위와 의미 체계 위에서 이루어지길래? 전혀 다른 감정과 세계관과 결론을 가진 집단들에 대해, 타자와 타자의 갈등과 충돌에 대해, 공감 담론은 어떤 화해책을, 건설적인 대안을 내놓을 수 있지? 오늘날 공감이라는 개념은 그저 우리 편의 결속을 다지며 재생산하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지 않은가? 공감하지 못하는 자들에 대한 짜증과 증오와 단죄의 용도로 사용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타자에 대한 또다른 방식의 폭력일 뿐이다. 그것은 도덕의 얼굴을 하고 있기에 더 폭력적이다.

모든 따뜻한 우리는 공기를 읽지 못하는 자들에 대한 차가운 배제를 전제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너무 쉽게 망각한다. 가장 따뜻한 얼굴과 가장 차가운 선긋기는 늘 같은 사람에게서 나타난다. 그에게서 공감은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그가 아무리 타자에 대한 공감을 운운한다 해도, 그는 그저 먼 거리에 사는 우리에 공감하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공감이 공감의 대상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있기는 한 걸까? 예컨대, 많은 경우 그것은 약자라는 익숙한 캔버스 위에 자신의 감수성의 물감으로 전형적인 수난의 이미지를 재현한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사람들은 공감을 동정, 연민, 측은지심 등과 혼동하곤 한다. 사람들은 공감을 평면화하곤 한다. 사람들은 공감에 정답을 설정한다. 따라서 공감은 쉽사리 公感이 되고 空感이 된다. 공감론자들이 그 부드러운 구호와 달리 폭력적으로 느껴지곤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사실 상상력이 아닌 정답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감정적 동물이 이성이라는 불편한 도구에 익숙해지려 억지로 노력해 온 이유는 무엇인가? 서로 다른 인간들끼리 감정만 내세우면 가능한 답은 전쟁뿐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세계관이 만날 수 있는 공통의 지점을 찾고, 서로가 가진 것을 불완전하나마 계량하고 평가하는 기준을 약속하는 것. 자신을 그에 따라 정리하겠다고 약속하고 의지하는 것. 그것이 오늘날 박대당하는 이성, 공감과 달리 차갑고 '비인간적'으로 느껴지는 이성의 역할이다. 그리고 실제 공감 개념은 결코 이 이성을 배척하는 것이 아닐 터이다. 공감의 본질이 편들어주기와 편짓기가 아닌 들여다보고 이해하는 것에 있다면, 이성이 빠지고 오직 알량한 감정과 유치한 도덕적 당위만 남은 공감 개념은 이미 제대로 작동할 수 없는 것이다. 이해에서든 대안의 도출에서든 말이다. 예컨대 그것은 이해와 편들어주기라는 전혀 별개의 것을 마치 처음부터 동일한 것인 양 공감이라는 하나의 구호로 환원한다. 그것은 그저 수련회의 눈물 같은 감정의 피상적 전염에 그치게 된다. 우리 편끼리의 따뜻한 공명에 그치게 된다. 감정의 편파적 전염, 고찰 없는 전염에 그치게 된다. 인간과 사회와 세계에 대한 통찰의 확장이 아니라 「왜 너는 공감을 못하니? 너는 공감 능력이 결여돼 있어!」에 그치게 된다. 서로 다른 이들끼리 대화할 수 있는 다리를 놓고 함께 살 수 있는 대안을 도출하는 것이 아니라, 또다른 우열을 가르고 넘을 수 없는 도덕적 울타리를 치는 편한 기준이 된다. 다른 감정을 가진 '소수'를 다수의 감정 공동체의 권위로(체온으로) 쉽사리 찍어 누를 수도 있다. 소수란 다수가 공감하는 것을 공감하지 못하는 열등한 무리, '사회성'이 떨어지는 무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공감은 그저 우리 편의 동일성을 강화하는 색깔일 뿐, 모닥불의 범위를 넘어서는 보편성을 생산하는 것일 수는 없다. 그것은 우리로 환원되지 않는 범주에 대해 무능하다.

오늘날 공감은 마치 이성과는 반대되는 개념처럼 사용되고 있다. 이성은 제대로 공감하지 못하는 것, 개개 인간에 대한 이해 없이 그저 차가운 원리 원칙을 기계적으로 강요하는 개념인 것처럼 사용되고 있다. 이런 식의 구분은 공감에게든 이성에게든 재앙이다. 사람들은 공감에 대해서든 이성에 대해서든, 그것이 근본적으로 어떤 도덕적 전제 위에서 어떻게 배치되어 있고 어떻게 관계를 가지는지 성찰하지 않는다. 공감이라는 직관적 단어의 손쉬운 사용, 공감이라는 단어의 놀라운 유행은 그저 깊이 생각하지 않는 시대, 심각하게 회의하지 않는 시대의 증거일 뿐이 아닌가? 공감한다는 것은 곧 생각을 멈추는 것, 머리 대신 가슴과 눈물샘에 전권을 주는 것처럼 사용되고 있지 않은가? 공감하자는 요구는 더 이상 꼬치꼬치 따지지 말자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지 않은가? 공감의 요구는 더 이상 소크라테스의 한가한 진지함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의, 쉽고 빠르며 경제적인 유인원적 대체물일 뿐이 아닌가? 사람들은 이제 아테나의 올빼미 대신 보노보의 평화를 믿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따뜻한 도덕적 도그마의 편리한 재생산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다수의 진부한 도덕 감정의 재생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따뜻함을, 더 정확히는 자기(우리)의 따뜻함을 곧 도덕적 선 자체로 선언하게 마련이다.

약자를 위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를 위해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어내고 설득하는 방식이 과연 공감의 레토릭뿐일까? 그것은 가장 쉽고 따뜻하다. 적어도 내 마음에 가장 쉽고 따뜻하다. 그래서 그 뜻대로 안 되는 차가운 타인은 쉽사리 악마가 되는 구도다. 그래서 현대 사회에서는 감수성이라는 기준이 이성을 대체한다. 어느 때보다 많은 말을 하면서도 서로 대화와 토론은 하려 들지 않는 동일한 감수성의 집단들만이 난립한다. 서로 공감할 수 없는 집단들끼리는 대화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감 담론이 다른 감정과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단절시키고 증오케 하는 울타리가 된다. 공감은 각자의 감수성의 신전에 모셔진 토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공감의 담론은 상대를 다른 의견을 가진 것이 아닌, 공감 능력이 없는 악마로 보이게 만든다. 오늘날 진보 리버럴의 사회적 전망이라는 것이 이것과 다른가?

공감은 중요하다. 그러나 공감이라는 것이 오늘날 공감 담론이 강요되는 방식으로 행해져야 하는 걸까? 자신의 유아론적 세계를 확장한다는 듯이 말하는 공감 담론은, 사실 자신의 유치하고 편협한, 숙고되지 않은 도덕적 당위와 감수성을 타인들에게 덧씌우는 데에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신의 힙한 감수성을 마치 이타적이고 보편적인 것처럼 포장하는 아이템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저 편들어달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닌가? 진정으로 타자를, 자신에게 '혐오스러운' 타자들까지 공감하고 이해하고 통찰하며 진정으로 세계를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공감은 어떤 최신의 도덕적 감수성의 수용 능력처럼, 우생학 시대의 지능 담론처럼 사회적 우열이 나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약자에게 공감하는 것의 따뜻함에 대한 열변과 공감하지 못하는 열등한 것들에 대한 차가운 멸시가 한 사람에게 공존하는 것을 보고 있자면 보는 이가 대신 조울증에 걸릴 지경이다. 공감이 정확히 무엇이고, 왜, 어떻게, 어디까지 행해져야 하며, 그 정당성은 어디에 있느냐에 대한 엄밀한 고찰과 논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 혼란스러운 촌극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그것을 만병통치약처럼 사용하는 진보 약장수들의 촌극, 자신의 힙한 감수성에 취한 나르시시스트 리버럴들의 술주정이야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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