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속 인물이 자신을 창조한 작가를 부정할 수 있을까? - 폴 오스터의 <보이지 않는>

in #kr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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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의 책들은 대부분 지루한데 그 정도를 다음과 같이 구분하겠다.

  • 미치도록 지겨움
    <환상의 책>

  • 뭔가 있는 것 같아 계속 읽기는 하는데 어쨌든 지겨움
    <뉴욕 삼부작>, <거대한 괴물>, <보이지 않는>

  • 재밌지만 적당한 선에서 끝내줬으면 더 좋았을 지겨움
    <공중곡예사>

  • 완벽하지만 뒤에 실린 부록 때문에 지겨움
    <빵 굽는 타자기>

자, 이 책은 뭔가 있는 것 같아 계속 읽기는 하는데 어쨌든 지겨운 범주에 속한다. 이 범주에 속한 3권의 공통점은 모두 스릴러, 서스펜스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갑작스런 실종, 미지의 남자, 살인.

장르 문학의 속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게 포스트모던 문학의 특징인데 이는 언젠가 보르헤스 이야기를하며 상술할 것이므로 오늘은 생략하겠다. 어쨌든 보르헤스의 포스트모던이 신화적, 환상적 이야기에 뿌리를 대고 있다면 폴 오스터는 확실히 뉴야커다운 세련된 면이 있다. 그는 환상적인 이야기를 쓰지만 배경은 언제나 눈에 잡힐듯한 현실이다. 그런 면에서 보르헤스의 소설을 도저히 못 읽겠는 사람들도 폴 오스터의 소설을 읽는 건 가능하다.

<보이지 않는>은 그 동안 내가 읽어온 폴 오스터의 책 중 가장 노골적으로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포스트모던)를 하는 이야기다. 작품은 과연 작가의 손에서 완결되는가? 작가가 결론을 내린 이야기는 거기서 생명을 잃고 영원히 박제되는가? 책을 읽는다는 행위의 본질은 무엇인가? 독자는 이야기에 개입할 수 있는가? 독자는 작가가 박제한 진리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는가?

포스트모던 문학에서 이야기는 그 자체가 하나의 주제가 된다. 그들은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를 함으로써 이야기가 발화자의 입에서 완결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려 한다.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청자이자 동시에 화자이므로 작가와 독자의 관계를 흐릿하게 만든다. 그들에게 독자는 이야기의 신전에 앉아 작가의 계시를 받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자기가 받은 계시를 스스로 이야기하며 그 이야기가 계시와 얼마나 일치하는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폴 오스터는 자신의 자아를 두 개로 나눠 <보이지 않는>의 화자로 등장시킨다. 이 책의 1부는 대학 시절의 폴 오스터(작중 인물 워커)가 주인공이며 그가 보른이라는 정체불명의 교수를 만나 겪는 신비한 일을 다룬다. 2부는 성공한 소설가 폴 오스터(작중 인물 짐)의 시점으로 쓰였으며 한 때 대학 친구였던 워커가 자신이 쓴 소설 원고(이 책의 1 부)를 소포로 보내면서 시작한다. 둘은 편지를 주고 받으며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짐은 1부를 탈고한 이후 더 이상 진전이 없던 워커에게 중요한 실마리를 던져 그가 다시 원고 앞에 앉게 한다.

3부는 워커가 죽기 직전 남긴 원고인데, 온전한 문장이 아니라 일종의 개요였다. 아마도 3부가 온전한 문장으로 <보이지 않는>에 실린 이유는 짐이 워커의 개요를 토대로 3부를 완성했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 4부는 짐이 워커의 누나를 만나 그의 원고에 대해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누나는 짐에게 워커의 원고를 다듬어 한 권의 책으로 완성해주길 원한다. 그리고 짐은 수락한다. 따라서 우리가 읽은 <보이지 않는>은 워커의 원고를 토대로 짐이 쓴 소설일 것이다.

그렇다면 잠깐만.

<보이지 않는>의 작가라고 소개되는 폴 오스터, 책의 표지에 버젓이 자신의 이름을 올린 이 뉴저지 출신의 신비주의자는 무엇을 한 걸까?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포스트모던 문학의 백미를 느낄 수 있다. 짐과 워커는 폴 오스터가 창조한 허구의 인물이지만,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 속에서 마침내 자기들을 창조한 작가를 제거해버린다.

이 책의 진짜 작가는 누구인가? 짐? 워커? 폴 오스터? 아니면 그들 모두? 내 말이 말장난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폴 오스터가 실존하는 짐과 워커로부터 원고를 받아 <보이지 않는>에 그대로 옮겨놓은 게 아니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작가의 권위는 사라지고 오로지 무한히 확장하는 텍스트만이 남는다. 누군가에게 채점을 받지 않고선 인생에 확신을 얻지 못하는 불쌍한 우리들은 이 대목에서 모종의 불안감을 느낀다. 진실을 확증해줄 절대 권력의(작가의) 부재로 인해 세상은 모호하고 불확실한 혼돈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우리는 하나의 진리를 파기함으로써 수백, 수천 만개의 새로운 진리를 획득한 것이다. 진리는 오직 하나라고 누가 말했는가? 끊임없이 원본과의 대조를 강요하며 진실인지 거짓인지 추궁하는 독재자는 포스트모던의 유희에 단단히 묶여 단두대의 칼날 앞에 목을 드러낸다.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 포스트모던이 단순한 말장난처럼 느껴지는가? 하지만 이런 생각이 정치, 사회적으로 해석될 때 탄생하는 의미는 당신의 생각을 고쳐줄지 모른다.

  • 작가라는 절대 권력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화자가 되는 것
  • 권위를 부정하고, 이 세계를 자신의 손으로 재창조하겠다며 광장으로 나가는 것

포스트모던의 말장난이 정말 이것과 다르다고 생각한다면,

시간을 갖고 꼭 한 번 생각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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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텍스트를 읽어나가면서 나름대로 해석을 하고 받아들이고 싶은대로 받아들이는거죠.

사실 눈에 보이는 그 어떤 것도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 우리는 알 방도가 없습니다.

단지 데카르트가 모든 불확실한 것을 소거해나가면서 안 단 한 가지 확실한 것만을 알 뿐이죠.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PS: 제가 본디 철학충 사색충 진지충인지라 dPXs님의 글 언제나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 저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말장난을 좋아하거든요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고 해서 고로 존재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것도 의심해볼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런 의심을 가진 사람이 저 말고도 엄청 많았고 데카르트는 상당한 반론에 직면하게 됐죠. Cogito Ergo Sum은 역설적이게도 엄청나게 많은 회의론자를 양성하는 계기가 됐다고 합니다.

그냥 니나노~나 해야 하는건지... 생각이란 건 하면 할수록 복잡해져요...

빵굽는 타자기를 절반 좀 넘게 읽다 덮은 뒤로 기억이 나지 않는데 지루했다기 보다는... 음.. 이유가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지루했던 게 맞는 것 같기도 합니다.

와 저는 이 사람 책 다 지루했고 <빵굽는 타자기>만 엄청 좋아했는데 거기 진짜 기가 막힌 문구 하나가 나오거든요. 나중에 때가 오면 소개 한번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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