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것이 엄청나게 중요하다 ]

in #kr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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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것이 엄청나게 중요하다 ]

= 낭만에 대하여 =





감정에 과학적 이론을 들며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의 작용일’뿐’이라고 말하는 것을 싫어한다. 장황한 논리로 설명되는 것은 재미있지만, 어떤 것은 아무래도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영역으로 남겨두고 싶다.
내가 간직한 감정과 기억이 바로 그 영역이다. 그것이 특별한 이유는 소중하다는 것 외엔 없는 쪽이 더 근사하기도하다. 게다가 실제로 다른 이유를 꼽기도 어렵다. 불현듯 떠오르곤 하는 그리운 기억은 대부분 일상의 한 순간이기 때문에 이러쿵저러쿵해서 설명하기엔 영 모양만 빠진다.


방과 후 본 붉은 하늘, 늦은 밤 자전거를 타고 달리며 맞은 찬 바람, 혼자 어둑한 거실에 누워 듣던 빗소리. 지금도 얼마든지 작정을 하고 연출하면 똑같은 상황에 나를 집어넣을 수 있을 테지만, 내가 기억하는 그때와 다를 것이다.


한 번은 그 시절의 내가 그리워 그때를 장식했던 음악과 영화들을 몽땅 꺼내보았다. 하지만 꺼내면 꺼낼수록 기억으로 남은 내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 볼 뿐, 그때의 내가 될 수 없다는 것만 분명해졌다.


내가 그리워한 것은 그때의 내가 아니라, 내가 세상을 감상했던 방식일지 모르겠다.
그 시절은 석양과, 밤공기, 빗소리만으로도 낭만이 넘실댔다. 특별한 기분을 만들기 위해 애쓰지 않았다. 내가 존재하는 모든 곳이 내가 원하는 자리였다.
더 똑똑하고 더 자유롭고 더 부유한 지금, 어째서 나대로 존재하는 것은 더 어려워져 어린 나를 흉내 내봤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최근 한 칼럼을 읽었다.
우리가 10대 때 듣던 음악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글이다. 우리는 -아마도- 앞으로 계속 10대 때 들은 음악을 최고의 음악으로 기억하게 될 거라고 한다.
어렸던 나에겐 좋은 노래가 너무 많아 죽기 전에 모두 들을 수 있을지 걱정했다. 지금의 나는 이제 들을 노래가 없다고 생각한다.


무엇을 듣고 무엇을 봐도 나를 만족시키기가 쉽지 않다.
더 까다로워지고 더 게을러져서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나와 함께 지내온 나의 뇌가 이제 자랄 만큼 자라서 성장보다는 안정을 원하고, 내 몸은 성장호르몬이 나오면 문제가 되는 나이가 됐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장기의 뇌와 몸은 나를 둘러싼 세상을 몽땅 흡수하려했다. 독립된 자아로 기능을 시작 할 때엔 모든 것이 엄청나게 중요해진다. 굴러가는 낙엽만 봐도 웃는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지금의 내가 그 정도로 기능을 하려면 부자연스러운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자연스러운 일상 중 하루였다고 생각했던 강렬한 낭만적 순간이 사실은 뇌와 호르몬이 터트린 불꽃놀이였다는 말이 어째선지 이번만은 홀가분하다.


한 때는 차고 넘칠 만큼의 감수성을 가지고 있어 걱정없이 방치했다가 어느 날 찾으러 갔더니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졌더라. 당황했지만 열심히 구석구석 살피다 보면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지난 날의 음악과 영화를 더듬거렸나보다.


나에게 낭만이란 단어는 과거형이다. 어떤 감정은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금방 아득하고 아름다움만 가득한 곳으로 나를 데리고 간다. 내가 어떤 삶의 장면에, 어떤 멜로디에 실려갈지는 시간이 흐른 후에 알게 된다. 그러니 지금 부지런히 씨를 뿌려야 한다. 그 중에 몇 가지는 양지 바른 곳에 들어앉아 햇빛을 쬐며 숨어있다 언젠가 씨를 터트려 꽃 피울테고, 그 때 나는 고개 숙여 여기가 낭만이었구나 할 것이다.


감수성이 더 이상 예전 같을 수 없다면, 더 대단한 자극을 위해 적극적으로 부를 축적 해야 겠다는 결론을 내리는 30대가 되었지만, 여전히 매미가 찢어지게 우는 여름이면 에반게리온의 주제가를 패기롭게 따라 부르고, 매 년 찬 겨울이 오면 결론을 빤히 아는 영화를 본다.
수 백 번은 들었을 후바스탱크의 피아노 전주에 여전히 마음이 일렁이고, 비 내리는 밤이면 왠지 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아름다웠던 시절은 그리운 대로 낭만으로 남기고, 나는 지금에 더 알찬 씨앗을 뿌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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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좋은하루 되세요~ :)

현재가 더 낭만적일수있도록...

저의 10대는 HOT와 김동률, 조관우가 함께 했네요.ㅎㅎ;; 지금도 사실 왜 결이 다른 그들을 한꺼번에 좋아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요.ㅎㅎ

그때가 아니라 지금입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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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으면서 가만 따져보니 전 아직도 호르몬이 주책을 부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얼마나 좋아요 저도 좀 쥐어짜내고싶네욬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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