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에서 소바를 먹다가 생각난 러셀 아저씨 이야기.

in #kr6 years ago (edited)

작년 오키나와 ( 이쯤이면 글도 몇 개 없는데 또 오키나와냐고 하실까봐 걱정했는데 쓸데없는 기우죠? 제가 해외여행을 딱 한번 가본게 오키나와 뿐이라 매우 인상 깊었던 나머지 이 곳에서 경험한 기억들이 너무나 날카로워 모든 것을 오키나와라는 따끈따끈 칼로 재단해버립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 책이든 여행이든 사랑이든 처음이 가장 재미있고 강렬하죠.

덕분에 밍숭맹숭한 머리 속에서 가장 강렬했던 경험들이 유니콘의 뿔처럼 뾰족하게 튀어나와 영점조절을 하듯 우리의 온 정신을 그리로 인도하곤 합니다. 전그래서 어서 다른 곳도 여행하려 합니다. 소재고갈에서 이어지는 우려먹기는 누구에게나 죽음과 같죠. ) 에서 전 관광버스 ( 중국인, 일본인, 한국인이 모두 각자의 언어로 쏼라쏼라하느라 정신없지만 행복한 호기심이 넘쳤던 버스.) 가 어디론가 가서 어디에선가 내려주면 태양과 바다를 듬뿍 맞고 사진 몇 방 찍고 시간 맞춰 다시 타고 내리는 일을 반복하다가 들린 오키나와 월드(오키나와판 민속촌)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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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월드 입구입니다.)

오키나와는 한국에서만 생활하며 덥다덥다 하시는 분들(저같은..)을 입다물게 하는 압도적인 습도와 기온을 가진 곳이라 음식물이 금방 쉬어버리지요. 따라서 밀 같은 재료를 가루로 두었다간 알아서 금방 큼큼한 냄새가나는 떡(?)이 되버리는 곳이라 원주민들은 바로 면을 만들어 나중에 데워먹어도 너무 불지 않도록 조금 덜 삶은 후 높은 습도와 온도에 의한 부패를 막기위해 기름을 발라 보관했다가 국수로 삶아 먹고 했는데 이것을 오키나와 소바라고 합니다. 메밀로 만들지 않았지만 어쨋든 이름은 소바입니다.

가혹한 기후에 적응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 국수의 면발은 겉보기엔 칼국수와 같아 흐물흐물할 것 같으나 씹어보면 그 심지가 스타게티마냥 단단합니다. 겉에는 기름이 발라진 상태라 미끄덩미끄덩거리는 면발의 느낌은 매우 생경합니다. 돼지뼈와 가츠오부시로 만든 국물은 우동국물과 순대국밥 국물을 반반 섞어놓은 듯한 느낌이나 그 맛을 제대로 시간을 가지고 입속에서 굴려 음미하기엔 엄청나게 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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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국떡 2개, 돼지고기 2개, 650엔, 소금을 아껴선 안된다는 혹은 음식물이 상해선 안된다는 강박이 느껴지는 짠 맛... 어째서인지 분명히 찍고나서 바로 확인할 땐 정상이었는데 나중에 보니 남아있는 건 사정없이 흔들린 사진 ㅠ_ㅠ ;;)

이 맛 있지도 그렇다고 맛 없지도 않아 애매한 그리고 생전 처음 받아보는 신기한 자극의 총합인 토박이음식을 먹으면서 쿡쿡 웃음이 났습니다. 이럴려고 여행을 오는구나. 여기가 진짜로 한국이 아니구나.

이 더운 날에 뜨거운 면을 쿡쿡 웃어가며 후루룩 후루룩 하다가 러셀 형아가 쓴 <게으름에 대한 찬양> ( 실제론 부지런해야 도달할 수 있는 게으름에 대한 에세이지만요. ) 속 한 문단이 생각났습니다. 거기서 저자가 살구를 베어물며 떠올린 내용은 이렇습니다.

'살구는 고대중국 한 왕조 초기에 재배되기 시작해서 1c 경 로마까지 전달되었고 apricot라는 살구를 뜻하는 단어는 조숙하다 라는 뜻의 라틴어 precocious 에서 파생되는 중 어딘가에서 a가 떨어져나갔다는 소소한 이야기를 알고 있으면 과일맛이 한층 풍성해진다.'

제 웃음은 오키나와 소바라는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서 상상하던 맛이 실제와의 격차가 상당했고 따라서 제 상상력의 형편없음에 허탈한 깨달음을 얻어 기쁜 복합적인 웃음이었지요. (회사집회사집 로테이션을 돌며 사윈 일상과는 다른 자극에 대한 갈구가 해소됐음도 한 웅큼 들었을 겁니다. )

제가 소바를 먹기전에 이런 사전 지식을 알지 못했더라면 좀 덜 웃었겠다 싶었습니다. 이 재료들의 희귀한 조합에 대한 의문이 너무나 거대해지는 바람에 혀의 미뢰세포가 보내는 감각을 조금이나마 억눌렀을지 모릅니다. (물론 농담입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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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지 않은 사진을 인터넷에서 가져왔습니다.)

지식이란게 그저 있으면 좀 더 삶을 풍요롭게 바라볼 수 있게하는 도구쯤이라고 봅니다.
살구나 국수를 먹는 것과 같은 아무것도 아닌 일에 쉽게 웃을 수 있다면, 그리고 약간의 문장을 기억하고 있던 덕분에 조금 더 다른 면을 볼 수 있다면 족하죠. 그 다름에서, 전과 같지 않음에서 재미를 느끼는 거죠.

거꾸로 말하면 모를 수록 '자잘한 것은 많이 찾아오나 커다랗고 자극적인 것은 어쩌다 찾아오는 환경에서 오랜 시간을 살아야 하는 이 세상'은 인간에겐 재미없기 쉽상이고 그 재미없음을 보상하려고 열심히 다른 곳에 몸과 마음을 소비해야 할 지도 모릅니다.

이 글을 두드리고 있는데 연상된 다른 글귀가 노크합니다.

"시인의 재능이란 자두를 보고도 감동하는 것이다." - 앙드레 지드

감동받을 때 우리는 행복합니다. 그러나 일반인에게 쉽게 허락되지 않는 재능이겠죠. 우리는 시인이 아니라 자두만으로 감동받기 까진 힘드니 러셀아저씨처럼 소소한 재미를 사냥해야 할 듯합니다. 행복하려고 태어났는데 행복은 결국 지나가야 보이는 것이니 일단 뉍두고 재미를 추구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중에서 자극적인 재미는 우리 우주를 지배하는 한계효용법칙에 의해 얼마지나지 않아 아주 적은 양을 너무 많은 비용을 주고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그 전에 이 악순환이라는 악마의 수레바퀴가 굴러가기 전에 한 철학자가 준 깨달음을 고이 간직하고 세상의 작은 것들에, 그 사소한 앎에 좀 더 시간을 할해해보는 것도 효율적인 삶에 큰 도움을 준다는 걸 실질적으로 이해해 본 여행이 아니였나 싶습니다.

그런데 결국 저도 저 국수하나 먹으러 가기까지 많은 돈과 자극을 소비했네요-_-;; 크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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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먼지에 찌들지 않은 모습을 너무나 오랫만에 봐서 그런지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맑은 하늘과 구름을 배경으로 한 오키나와 월드 내부.)

글을 마치려는데 오키나와에서의 미칠듯한 햇살이 다시금 어른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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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정말 맑고 좋네요ㅠㅠ 사진 멋있어요!
저도 오키나와 딱 한 번 다녀왔는데 또 가고 싶어서 눈 앞에 어른어른거려요

제가 갔을 땐 기사분이 여러분은 행운아 라고 하더군요. 이번주 날씨가 워낙 좋다면서요.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또 가고 싶지만 여름은 피해야 겠다는 생각을 강하게 하고 있습니다.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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