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바람의 나날 10

in #kr6 years ago

"자네, 혹시 모르니까 당분간 몸을 좀 피하는 게 좋겠어. 위에서 문제를 크게 만들려고 하는군. 제기랄! 뭔가 있는 것 같아. 내 목을 죄는 뭔가가…….”

강재가 장현태 부장과 약속한 레스토랑의 밀실에 앉자마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장 부장은 울분부터 터뜨렸다. 장 부장 옆에는 인상을 잔뜩 구긴 천종수가 앉아 있었다. 미리 예상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곧 허물어질 판잣집같이 분위기에 침울하기 그지없었다. 나도 모르게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침에 신문을 보니, 마이클 로빈 테러를 규탄하는 집회가 대학생과 환경단체의 연합으로 여의도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경찰이 불법집회로 규정하고 원천봉쇄하기로 방침을 정했다고는 하지만, 이미 그 같은 집회 열기는 경인 지역을 넘어 전국적으로 확산될 기미마저 보였다. 마이클 로빈이 입원한 병원 입구를 쇠파이프와 각목으로 무장한 대학생들이 복면과 마스크까지 하고 조를 짜서 철야로 지키고 있는 사진이 기사 옆에 큼직하게 실려 있었다.

"시기가 좋지 못했다나? 위에 앉아 있는 놈들 모두 이기적인 새끼들뿐이야! 우리가 정확하고 신속하게 훼방꾼들을 제거해 줄 때는 좋았겠지. 이제 와서 제 놈들 덜미가 잡힐까 봐, 미리 발뺌을 하려고 난리들이야. 더러운 새끼들!”

언제나 냉정함을 쉽게 잃지 않던 장 부장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여과되지 않고 그대로 튀어나오는 것만 보아도 상황이 보통 심각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장 부장의 얼굴은 방금 관 뚜껑을 열고 나온 미라처럼 하얗다 못해 창백해져 있었다.

장 부장과 천종수는 벌써 위스키를 두 병째 비우고 있었다.

천종수는 일그러진 표정을 감추지 않은 채 말없이 앉아 있었다. 천종수의 얼굴은 장 부장과는 대조적으로 석류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의 눈알마저도 토끼의 그것처럼 빨갛게 달아 있었다.

"아무래도 이건 마이클 로빈 때문만은 아냐. 우리가 활동을 시작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위에서 압력이 내려오는 것을 보면, 뒤에서 누가 내 뒤통수를 치려는 게 틀림없어. 아마도 유종석! 그 놈인 거 같아.”

장 부장은 그렇게 말하며 술 한 잔을 단숨에 비웠다. 유종석 부장은 중앙정보부의 최고 지휘자였다. 장 부장은 비밀정보부의 실권자로서 서로가 보이지 않는 경쟁을 해오고 있던 터였다. 장 부장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나 먼저 가야겠네. 가 볼 데도 있고, 좀 알아 볼 것도 있고……. 나보다는 종수 군과 말이 더 잘 통하겠지? 나머지는 종수 군이 말해 줄 거야. 몸조심하고, 이번 일이 잘 마무리되면 그때 다시 만나자고. 그럼, 나 먼저 가네.”

장 부장은 내게 악수를 하는 둥 마는 둥 허둥거리며 황급히 밀실을 빠져나갔다.

장 부장이 그처럼 허둥대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장 부장은 고인돌과도 같은 크고 단단한 존재였고,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린 거목이어서 쉽게 동요되거나 흔들리지 않는 존재로 여겨졌었다. 장 부장의 모습에서 갑자기 지진이라도 난 것 같은 어수선함을 느꼈다.

장 부장이 자리를 뜨자, 천종수가 내 앞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그러자 천종수의 입에서 술 냄새가 고약하게 풍겨 나왔다. 생선이 썩는 것 같은 역겨운 냄새로 인해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나는 오물을 피하듯 뒤로 조금 물러앉았다.

"이제 우리 정보사업도 끝장나나 봐. 그저께 네가 마이클 로빈 처리할 때, 장 부장의 긴급명령을 전하러 내가 너한테 잠시 들렀잖아. 전화를 걸려다가 괜히 카페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끌까 봐, 내가 직접 들린 건데……. 그때 그 카페에 기자 새끼가 한 놈 있었나 봐. 그 새끼가 내 얼굴을 알아보고는 이번 사건이 중앙정보부에서 의도적으로 일으킨 사건이라고 신문에 까 발기려고 한 거야. 다행히 사전에 그 정보를 입수하고 일단 입막음은 했지. 그런데 문제는 저쪽 정보부에서 우리가 한 일을 자기들에게 덮어씌우려 한다고 펄쩍 뛰는 거야. 내가 정보 계통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은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기자가 뭘 알겠어? 나야 장 부장의 정보부 소속이지만 놈들이 우리 같은 정보부가 따로 있는 건지 알기나 해? 정보라면 무조건 유종석의 정보부로 생각하기 마련이지. 어쨌거나 결국 위에까지 이 문제가 제기되었지. 말하나 마나지 뭐. 일단 우리 측의 활동이 전면 중지된 거야. 저쪽이야 이미 공공연하게 드러나 있고, 우리야 세상에 있는 것조차도 모르니, 우리 쪽이 희생되는 것은 뻔 한 이치지. 앞으로 좀 더 두고 봐야 알겠지만, 신통한 결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거야.”

천종수는 연신 줄담배를 피워가며 이야기 도중에 양주를 물마시듯 벌컥벌컥 들이켰다. 천종수의 얼굴은 과음 탓인지 흥분 탓인지 시뻘겋게 달아 있었다.

나는 콜라만 한 모금 마셨다. 콜라는 술이라도 탄 것처럼 목이 콱 메게 독한 기운을 전해주었다.

늘 이런 자리가 싫었다. 나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무언가에 끌려가는 듯 한 탈진감과 무거운 것에 양어깨가 짓눌리는 듯 한 중압감이 방향제처럼 공간을 채우고 있는 이런 자리는 마치 도살장에 끌려온 소처럼 느껴지게 했다. 어쨌거나 이런 숨 막히는 상황이 정말 싫었다.

"문제는 누가 마이클 로빈을 테러했는가 하는 점에 집중되었어. 여러 가지 논의가 벌어졌고, 여러 가지 의견이 개진되었지. 마이클 로빈을 테러한 자를 찾아 속죄양으로 만들자. 그 자를 정신이상자로 꾸미자는 둥, 우스꽝스러운 조작극도 거론되었지.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자가 도대체 누구냐는 것이었어.”

천종수는 그 대목에서 말을 끊고 나를 쳐다보며 씩 웃었다.

나는 그 웃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라 어서 천종수가 하던 이야기나 빨리 계속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 애 타는 내 마음을 알기나 하듯 천종수는 곧 말을 이어갔다.

"장 부장은 끝내 네 신분을 밝히지 않았어. 지금까지의 모든 책임은 장 부장이 지고, 자기가 일단 물러서는 것으로 모든 것을 덮어버리자는 식이었지. 하지만 위에서는 그 테러리스트의 정체를 알고 싶어 하는 눈치였어. 격렬한 언쟁이 오가고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서로 간의 의견이 팽팽했지. 하지만 장 부장도 완강했어. 죽어도 말 할 수 없다는 것이었지. 나한테도 절대 네 신분을 밝혀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더라. 그 바람에 위에서도 두 손 두 발 다 들고만 거야. 하기는 위에서도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막막했을 테니, 그냥 덮어두는 게 낫겠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겠지.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었을 테니까. 하여튼 장 부장, 의리는 있는 사람이야.”

나는 멍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넋 나간 사람처럼 천종수의 말하는 입만 바라보았다. 이렇게 끝나고 마는가, 하는 허탈감이 전신을 엄습했다. 그러자 온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한 심정에 나도 모르게 천종수를 따라 빠른 속도로 술잔을 비워내고 있었다. 천종수의 한 마디 한 마디에 가슴이 조여오고, 또 안심이 되기도 하였다. 나는 천당과 지옥을 일 초에 수십 번씩 오가는 느낌이었다.

“도대체 마이클 로빈이 누군데 이렇게 난리야? 단순한 환경운동가는 아닌 거지?”

목표물에 대해 철저히 무관심해야 하는 것이 나의 의무였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처하고 보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 너는 모르겠지. 아무도 너한테 그걸 알려준 사람은 없었을 테니까. 마이클 로빈은 환경운동가로 위장하고 우리나라에서 활동하고 있는 미국의 CIA요원이야.”

“뭐? CIA?”

“그렇게만 알고 있어. 나도 최근에 안 사실이야. 그날 너한테 들렸을 때도 몰랐어. 왜 갑자기 양키지? 이런 생각뿐이었다고. CIA인 줄 몰랐지!”

“CIA를 왜 건든 거야?”

“나도 잘은 모르지만, 장 부장하고 맞지 않았겠지. 장 부장만 아는 일 일 테지만 내 생각에는 잘못 쑤신 것 같아. 장 부장이 미쳤나 봐. 건드려도 CIA를 건드렸으니 위에서 난리났겠지.”

천종수의 말을 듣고 있자니 숨이 콱 막혔다. 내가 엄청나게 큰일을 저질렀다는 두려움에 머리끝이 쭈뼛 서고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어쨌든 당분간 여길 떠나 있는 것도 좋아. 도망간다고 생각하지 말고, 어디든지 가. 산이고 바다고 계곡이고 마음대로 쏘다녀. 그냥 편안하게 여행한다 싶은 마음으로 네 여자와 즐기라고. 그러다 보면 여기 일도 잘 마무리될지 모르니까. 나도 당분간 머리를 식힐 겸 멀리 떠나 있을 생각이야. 그 동안 일에 시달려서 제대로 휴가 한 번 못 갔거든.”

천종수는 무엇이 지겹다는 것인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옆에 놓여있던 누런 봉투를 집어 들었다.

봉투는 꼭 대패 하나를 집어넣은 것 만한 두께였고, 잘 봉인된 봉투 위에 장 부장의 도장이 자혜의 빨간 립스틱 자국처럼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이거 어쩌면 장 부장의 마지막 배려일지라도 몰라.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그냥 죽으라는 법은 없으니까. 우리 삼촌이 군 장성 출신인 거 알지? 일단 이 일만 마무리되면, 삼촌한테 너와 내 자리 한 번 부탁해 볼게. 혹시 여기보다 더 나은 곳에 취직시켜 줄지도 모르는 일이잖아?”

천종수는 그렇게 말하며 봉투를 내 앞으로 내밀었다.

봉투를 받아드는 손바닥의 감각으로만 돈이 틀림없다는 게 느껴졌다. 나는 급한 마음에 봉투를 속주머니에 집어넣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여자 한 명이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살그머니 들어왔다. 천종수가 자주 가던 룸살롱의 호스티스였다. 전에 그 룸살롱에 두어 번 들렸을 때, 미스 장이라고 자기를 소개했던 것 같았다.

천종수가 미스 장에게 빠져있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술자리가 파하면 천종수는 미스 장을 불러 자기 차에 태우고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져버리곤 했었다. 그리고 이런 시기에 술집 여자를 호젓한 레스토랑의 밀실로 부르는 천종수를 보니, 아주 절망적인 상황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조급해지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두 사람을 레스토랑에 남겨두고 서둘러 그 곳을 빠져 나왔다. 마음 탓인지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발걸음마저 분주한 듯했다.

집에 도착하니, 자혜가 밝은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나는 자혜를 끌어안기부터 했다. 자혜는 내 품에 안겨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여행 준비나 해. 내일 아침 일찍 동해안부터 남해안까지 훑어보자고. 한 달 휴가를 받았거든."

"갑자기 웬 휴가고 여행이야? 휴가지만 일도 있나 봐? 그런데 강의는 어떻게 하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싫지 않은 눈치였다.

자정이 넘도록 우리는 짐을 챙겼다. 최소한 필요한 것들만 챙겼는데도 부피가 상당히 컸다. 아무래도 장기간의 여행이 될 것 같은 생각에 무리하게 많은 짐을 쌌던 모양이었다.

자혜는 신바람이 나는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다음 날 아침에 먹을 김밥을 미리 싸서 냉장고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나는 가슴속을 삐죽이 비집고 나오는 일말의 불안감에 가슴을 떨어야 했다. 배낭을 구석으로 치우는 내 손이 이상하게 뻣뻣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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