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바람의 나날 7

in #kr6 years ago

나는 곧바로 학교 안까지 차를 몰고 들어갔다. 차를 도서관 옆 주차장에 세우고 문과대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좁다란 길을 따라 길게 세워놓은 게시판에는 대자보가 연극포스터처럼 빽빽하게 붙어 있었고, 대자보에는 마이클 로빈 테러에 대한 규탄내용으로 넘쳐나고 있었다.

나는 게시판 앞에 놓인 입원비 모금함에 지폐를 몇 장 집어넣었다. 모금함 옆에서 모금을 호소하던 키 작은 여학생이 고개 숙여 답례를 했다. 걸음을 멈추고 대자보를 건성으로 읽어가다가, 나는 무디어진 내 심장에 스스로 놀란 채, 자혜가 기다리고 있을 문과대 앞 잔디공원으로 걸어갔다.

싸늘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문과대 앞 잔디공원에는 앉아서 담소를 나누는 학생들이 제법 많이 눈에 띄었다. 자혜를 찾지 못해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구석에서 자혜가 손을 번쩍 쳐들고 원을 크게 그렸다. 자혜는 그녀의 단짝 친구인 소정과 나란히 앉아 자동판매기에서 뽑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나는 그녀들이 있는 곳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강재 씨! 오늘 한 턱 낸다면서요? 그래서 중요한 약속도 다 취소하고 강재 씨! 오기만 목이 빠져라 기다렸어요.”

소정이 기다렸다는 듯이 발딱 일어나 내 소매를 잡아끌었다.

나는 엉겁결에 당한 일이라 어쩌지 못하고 소정이 당기는 쪽으로 조금 끌려갔다. 하마터면 중심을 잃고 소정을 끌어안을 뻔했다.

"아니? 이 계집애가……. 강재 씨가 자기 애인인 것처럼 아양을 떠네? 그리고 언제 강재 씨가 한 턱 낸다고 했니, 이 계집애야? 그리고 네가 또 무슨 중요한 약속이 있냐? 허구한 날 갈 데가 없어 도서관에나 처박혀 지내면서.”

자혜가 소정을 따라 일어서며, 소정의 머리에 가볍게 알밤을 한 방 먹였다. 소정이 눈치를 채고 요령껏 막아보려고 했지만, 자혜의 주먹이 이미 소정의 머리에 닿은 다음이었다.

"아야! 얘가 이러다가 살인내겠네? 야! 치사해서 안 얻어먹는다. 나도 돈 있어. 치…….”

소정은 얻어맞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혀를 쏙 내밀었다.

여자가 혀를 내미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좋았다. 그 혀를 입 속으로 쏙 빨아들이고 싶은 끈적끈적한 욕망 때문에 아랫도리가 다 후들거릴 지경이었다. 갑자기 가벼운 빈혈을 느끼며 나는 잔디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는 잔디에 앉아 깔깔대는 자혜와 소정의 모습을 보며 소리 내어 웃었다.

니체는 인간과 동물이 다른 점은 웃을 수 있고 없고 에 달려있다고 설파했다. 물론 니체도 알았겠지. 웃음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고, 웃는 사람과 그 사람이 처한 상황에 따라 웃는 모양과 웃음이 가지는 의미도 달라진다는 것을. 지금 그가 웃은 웃음은 도대체 어떤 웃음이었던가,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어디 갈 것인지 한참 실랑이를 하는 둘을 태우고 인천으로 달렸다. 경인고속도로는 군데군데 만나는 보수공사 때문에 짜증이 났다.

하지만 뒷좌석에서 재잘대는 두 여자의 수다를 들으며, 지금 이 길이 끝나는 곳에 예견하지 못한 어떤 커다란 운명이 나타나 나를 맞이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기이한 생각에 몰두해 있었다. 내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 줄 그 무엇이 나타나 나를 덥석 물고 멀리 달아나 주었으면 좋겠다는 애매한 상념에 젖어 들었다.

그런데 이정표는 곧 월미도에 도착한다고 훈육주임과도 같이 딱딱한 글씨로 알려주고 있었다.

월미도에 거의 닿을 무렵, 카폰이 울렸다. 장현태 부장의 전화였다. 시끄러운 잡음에 섞여 장 부장의 바리톤 음성이 묵직하게 깔려나왔다. 장 부장의 목소리는 여전히 암울한 갈색이었다. 오늘따라 그의 목소리에 갈매기 울음이 묻어나고 있었다.

"어제 일은 정말 수고 많았어. 좀 심하게 처리하는 바람에 위에서는 약간의 우려를 표시하더군. 나는 최소한의 폭력은 불가피하다는 점을 강력히 피력했지. 위에서도 폭력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견이 없었어. 돈은 제대로 입금되었지? 그렇게 알고, 며칠 내로 한 번 만나 술이나 한 잔 하자고. 다시 연락하지.”

이 전화 역시 장 부장의 일방적인 통보로 끝났다.

나는 폭력이 불가피하다고 피력했다는 그 말의 숨은 의미를 생각하느라 두통까지 생겨날 지경이었다. 폭력의 불가피와 불가치. 언뜻 동의어처럼 보이는 두 낱말은 선과 악처럼, 낮과 밤처럼 엄청나게 상반된 의미를 지니고 다가왔다.

차는 자혜와 자주 가던 횟집의 주차장에 세웠다. 차에서 내리며 바라 본 바다에는 유람선 한 척이 검푸르게 넘실대는 바다 한가운데 익명의 섬처럼 떠 있었다. 횟집으로 걸어가며 하늘을 쳐다보니, 조금 전과는 달리 날씨는 잔뜩 흐려져 곧 비라도 한줄기 쏟아질 것만 같았다.

주인 여자는 나와 자혜를 알아보고 친절히 맞이하며 따뜻한 방으로 안내했다. 모듬회를 시키고 술은 소주를 시켰다. 자혜와 소정은 매운탕에 공깃밥까지 시켜서 부지런히 먹어댔다. 내가 운전을 핑계로 술을 사양하자, 술은 모두 자혜와 소정의 차지였다. 회덮밥을 먹는데, 장 부장이 말한 ‘폭력의 불가피성’이라는 말이 자꾸 생각나 머리를 어지럽혔다.

"강재 씨, 오늘 이상타…….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사람 같네?”

소정이 안경 속에서 동그란 눈을 말갛게 빛내며 강재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싱긋이 웃으며 그녀의 눈을 외면했다. 아마도 신이 인간에게 눈을 만들어 준 것은 단순히 피사체를 보는 용도 이상의 다른 의미가 있지는 않았을까? 웃음에도 각기 나름대로 색깔이 있듯이.

"자, 제 술 한 잔 받아요. 한 잔 정도야 어때요? 어휴, 팔 떨어지겠네…….”

벌써 술기운에 얼굴이 빨갛게 상기된 소정이 자기 잔을 자꾸 내 앞으로 내밀었다. 나는 빙긋이 웃으며 오히려 소정의 잔에 술을 가득 채워주었다.

"무슨 남자가 매력 없게 자꾸 뒤로 빼요?”

그렇게 말하며 소정은 내가 채워 준 술잔의 술을 단숨에 마셔버리고, 내게 계속 술을 권해 왔다. 자혜가 마시지 말라는 눈짓을 보내왔지만, 한 잔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 소정이 건네준 술을 받아 단숨에 마셔버렸다.

"한 잔 주면 정이 없대요. 딱 한 잔만 더 해요.”

이번에도 소정이 내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바로 마셔버렸다. 자혜가 곱지 않은 눈길로 나를 흘겼지만, 어떠랴 싶었다. 가슴을 누르는 이 답답함이 가셔진다면 차라리 술독에라도 들어앉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자혜의 눈길을 무시하며 연거푸 몇 잔을 더 마셨다.

낮에 재호를 찾아갔을 때 마신 술 때문인지 몰라도 술이 몇 잔 더 들어가자, 몸이 자꾸 허공으로 붕붕 떠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발동이 걸린 나는 소정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여러 병의 술을 단숨에 마셔버렸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나중에 어떻게 되든지 간에 지금 이 순간만큼은 취하고 싶은 것이 내 심정이었다.

물론 술을 마신다고 해서 마음속의 근심이 사라지기야 하겠는가마는 술 마시는 그 순간만은 그런 고뇌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어 좋았다. 심장이 멎은 사람에게 전기충격을 가해 심장을 뛰게 하듯 내게 술은 옆에 없어서는 안 될 청심환과도 같았다. 과용하면 바로 죽음에 이르게 되는 독약이 가끔은 급사를 모면케 하는 양약이 되듯이.

"어디 조용한 곳으로 가서 차라도 한 잔 하고, 술이 깨거든 가요.”

자혜가 내 팔을 잡아 찻집으로 이끌었지만, 나는 자혜와 소정을 거의 반강제적으로 차에 태우고 바다를 끼고 달렸다. 백미러에 비치는 자혜의 얼굴은 무척 화가 나 있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가슴속에서는 심술궂은 악동처럼 반항심이 꾸역꾸역 밀려나왔다.

어린 시절, 하지 말라고 하면 이상하게도 더 하고 싶을 때가 더러 있었다. 그런 날이면 할머니한테 종아리에 피가 맺히도록 매를 맞았다. 나는 절대 울지 않았고, 할머니는 그런 나의 모습을 질린 표정으로 바라보며 중얼거리곤 하셨다.

“이 숭한 놈을 좀 보소.”

천천히 가자는 자혜의 말을 무시하고 과속으로 달려 그녀를 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심신이 썩어간다’는 재호의 말과 ‘폭력은 필요하다’는 장 부장의 말이 마구 뒤섞여, ‘폭력은 필요하되, 심신을 썩게 한다.’는 이상한 글귀를 만들어 내, 머릿속을 더욱 혼탁하게 했다.

날이 흐리더니, 결국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윈도우브러시가 한 번씩 지나칠 때마다 앞 유리 너머로 검푸른 바다가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창에 부딪치는 빗줄기가 유리를 깨고 안으로 쳐들어 올 듯이 맹렬해졌다. 뿌연 물안개도 시야를 막아섰다. 마치 다른 세상에 내던져진 것처럼 낯선 색채가 주위를 감싸 어쩐지 으슬으슬한 추위가 느껴졌다.

바다를 끼고 달리면서 핸들을 꺾어 비가 쏟아져 내리는 저 검푸른 바다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이 자꾸만 일었다. 그러면 이러한 번민과 고뇌도 파도에 삼켜져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텐데…….

소정을 그녀의 집 앞에 내려주고 자혜와 아파트로 돌아왔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자혜는 노골적으로 나를 질타했고, 나는 홧김에 집에 있는 술이란 술은 모두 마시고 그만 통곡을 하고 말았다. 느닷없이 일어난 사태에 놀란 자혜는 나의 울음소리가 행여 옆집으로 새어나갈까 봐, 내 입을 틀어막는 둥 소란을 떨었다. 그러다가 그녀마저 울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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