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외한 씨의 연재소설] 하얀방-3

in #kr6 years ago (edited)

문 밖은 방처럼 사방이 다 새하얀 복도였다. 벽에는 그림이 그려진 액자들이 걸려있었다. 하지만 그림 감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화장실을 찾아 빠른 걸음으로 복도의 끝으로 향했다. 곧 도착한 복도의 끝은 두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다. 화장실이나 출구를 가리키는 어떤 표지판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일단 오른쪽 복도로 걸어갔다. 그곳엔 또 다른 복도가 펼쳐져 있었다. 그는 다시 빠른 걸음으로 복도의 끝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또 다른 갈림길이 펼쳐졌다. 고민할 새도 없이 그는 오른쪽을 선택했다. 또다시 세 번째 갈림길이 나왔다.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뱃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당장이라도 내용물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이번에는 왼쪽을 택하기로 했다. 그는 이제 빨리 걸을 수조차 없었다. 조금씩 엉덩이 사이가 미끌미끌거리기 시작했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하지만 속도를 내서 걸어갔다. 그러자 갑자기 막다른 길이 나왔다. 머릿속에 하얘졌다. 그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그대로 바지를 내리며 주저앉았다. 그 바람에 주머니에 넣어놨던 식빵용 나이프가 바지를 찢고 튀어나왔다. 황급히 나이프를 주머니에서 빼내어 손에 쥔 뒤, 다시 바지를 마저 내리고 제대로 앉았다. 장마 덕에 난 산사태에 황톳물 넘치듯 설사가 쏟아져 나왔다. 수분 가득한 갈색의 내용물이 하얀 바닥을 적셨다. 묽은 배설물이 배출될 때 생성되는 특유의 마찰음과 함께 고약한 냄새가 풍겼다.

황홀한 쾌감에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입가에서 터널처럼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러나 그러한 황홀함도 잠시. 그는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비참한지에 대해 생각했다. 이 상황을 절대로 납득할 수 없었다. 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최대한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려 했지만 그런 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그는 그저 최대한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눈가에서 뜨거운 한줄기가 흘렀다. 그는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땀과 눈물이 섞여 입가로 흘러들었다. 체액 특유의 짠맛이 그의 혀를 자극했지만 그뿐이었다. 일을 마칠 때 쯤, 몸의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하마터면 몸의 중심을 잃고 배설물들을 위로 엉덩방아를 찧을 뻔 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자신이 온 갈림길의 반대편 쪽으로 개미떼가 지나가고 있었다.

개미들의 크기는 제 각각이었다. 어떤 녀석은 손톱만 했고 또 다른 녀석은 좁쌀만 했다. 크기에 상관없이 개미들은 까만 턱시도를 입은 신사처럼 단정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다. 절지동물을 대표하는 곤충답게 머리, 가슴, 배가 확연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특히나 머리를 들고 당당히 가슴을 내밀고 걷는 자세는 매우 위풍당당해 보였다. 개미의 그러한 모습은 그것을 지켜보는 축 처지고 맥없는 한 사내의 모습을 더욱더 볼품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런 것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는다는 듯 개미들은 여섯 개의 발을 리듬에 맞춰 디디며 가볍고 기품 있게 걷고 있었다. 미개한 곤충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을 만큼 질서정연하게, 일렬로 줄을 맞춰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칼로 손목 부분의 옷깃을 찢어 대충 뒤를 닦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현듯 동굴에 갇힌 주인공이 쥐를 따라가 그곳을 탈출하는 영화를 본 기억이 떠올랐다. 이미 그의 기억력은 믿을만한 것이 못되었지만, 그는 주저 없이 개미의 행렬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는 신사도를 발휘해 개미들이 다치지 않게 한쪽 벽으로 조심히 걸었다. 개미떼와 함께 걷는 복도는 끝없이 펼쳐진 미로처럼 얼기설기 엉켜 있었다.

걷고,

걷고,

걷고,

걷고, 또 걸었다.

그러나 한참을 걸어도 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다시 돌아갈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어느새 개미의 행렬을 따라 걷는 이 복도의 풍경에 익숙해졌다. 복도 천장에는 가끔가다 한 개씩 환풍구가 달려 있었다. 환풍구를 볼 때마다 그것을 뜯고 그 위로 올라가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천장은 생각보다 높았다. 벽 양편에는 똑같은 그림들이 좌우 대칭으로 드문드문 걸려있었다. 화려한 원색들로 가득 찬 소용돌이나 파도 같은, 형체를 확인할 수 없는 것들이 가득한 그림들이었다. 미술에 문외한인 그로서는 당최 무엇을 그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걷는 도중 잠깐 멈춰서 바라보기도 했지만 속이 메스껍고 울렁거리는 바람에 그 이상한 그림들을 외면하고 걷기로 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한참을 걷고 있을 때, 그의 건너편에서 누군가가 물에 젖은 맨발로 뛰는 소리와 함께 괴성이 들려왔다. 그는 본능적으로 칼을 꽉 쥐고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 소리는 그가 있는 쪽을 향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벽에 바싹 붙어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긴장한 탓에 식은땀이 흘러 실로 꿰매진 눈 위로 번졌다. 옷소매로 가볍게 두들겨 피와 고름이 섞인 땀을 닦아냈다. 가렵고 따가웠지만 거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개미들의 행렬을 따라서 또 한 번의 모퉁이를 도는 순간 그간 봐왔던 중 가장 긴 복도가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복도의 구석에서 똬리를 틀고 있던 불안감이 아가리를 열고 조금씩 그의 뒷덜미로 다가오고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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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테일한 묘사가 좋아요. 뭐 설사를 하는 장면의 디테일함도... 좋긴해요. 뭔가 마치 제가 저 장면에 있는 느낌을 받게 하는, 언젠가 설사를 하던 때를 떠올리게 하는 데요. 그 다급함, 낭패스러움, 애써 잊었던 것이 상기되는 ^^;;; 다음 편이 몹시 기다려 집니다.

하핫, 저도 공감하고 갑니다. :)

그 다급함을 살리기 위해 짧은 문장을 문단 나눔 없이 다닥 다닥 붙여 썼는데, 써놓고 보니 조잡해보이기도 하고 그렇네요 ㅎ지루한 글 매번 읽어주시고 좋은 말씀 주셔서 감사합니다.

흥미진진합니다. 오감이 자극되는.. 소설입니다 ㅎㅎ 근데 갑자기 왜 입에 침이 고이죠..

제 글이 오감을 자극할 수 있다니 참 감개무량합니다. 그런데 입가에 침이 고이시는 것은 저도 의아하네요ㅎㅎ

긴장감이 장난아니네요! 주인공과 함께 바짝 긴장하게 돼요~ 다음이야기가 기다려집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곧 다음 이야기도 포스팅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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