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넷 중 하나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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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실직을 했었다.
한창 아메리칸 드림에 부풀어 미래를 그려가던 20대 중반 시절, 한스럽게도 금융 위기가 터졌다. 초반에는 그저 망하는 은행이 있구나 싶었는데, 곧 대형 투자 은행이 망했다며 언론이 호들갑을 떨더니, 모기지 은행이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뉴스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건 그 즈음이었다.
동부, 중부, 서부에 있는 친지들도 시름에 잠기기 시작했고, 위기는 전방위로 확산 일로였다. 리테일, 자동차, 보험사 할 것 없이 Chapter 7 & 11 의 공포에 파랗게 질려 이 혼돈을 어떻게 수습해야 하는지 어쩔 줄 몰라 했다.

모두가 허둥댈 수밖에 없었던 게 위기의 불길을 잡으려 해도, 어디가 발화점 인지, 불길이 얼마나 큰 지, 그래서 어디까지 타게 놔두고 어디부터 살려야 할지 아무도 가늠할 수가 없던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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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에서 매일 만나던 사람들.
그 중 페이첵에 찍히는 숫자가 높은 순서부터 하나 둘 사라지는 수개월을 보냈는데, 첫 한두 명이 사라졌을 때 살아남은 자들은 사회의 냉정함과 떠나게 된 이들의 업적 그리고 그들과 함께 했던 추억들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며칠 후엔 대화의 상대방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우울함과 냉소, 무기력함이 모두를 컨트롤했다.
추가로 더 많은 사람이 떠밀려 나가게 되자 분노로 뒤바뀌었던 심리는 더더욱 줄어드는 동료의 숫자 앞에서 공포라는 최종의 진짜 모습을 드러냈다.

막연하게 느끼기만 했던 그 공포는 타인의 상황을 목도하자 몸서리 쳐질 정도로 선명해졌다. 무서웠다. 불과 석 달 전 한국에서 모든 것을 정리하고 가족과 함께 건너오셨던 분이 사무실을 떠나던 날은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최후의 최후 순간까지도 몸부림쳤던 회사는 결국 채권단에 투항할 수밖에 없었고, chapter 11 체제로 들어갔다. 나와 몇몇 막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회사의 소중한 전략적 자원으로 포지션이 강해져 있었다. 우리는 싸니까. 우리는 시키는 일이 뭔지는 아니까. 그리고 우리는 아직 H1 신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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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와야 했다.
회사가 아니라 미국에서 나와야 했다. 시민들과 그린카드를 소지한 사람들이 실직 상태로 쏟아져 나오는데, 돈 벌러 온 외노자의 비자를 미국 정부에서 연장해 줄 이유도, 여유도 없었다. 그만큼 미국은 절박했다. 차라리 잘 됐다. 무기력함과 가슴 졸임에서 해방돼 한편으로는 후련했다. 짝수와 홀수의 인터스테이트를 시원하게 누비며 남겨진 시간을 즐겼다.

흑백의 시선으로 즐긴 여행을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가족과의 기쁜 재회도 잠시, 돌아왔음을 실감하고 나니 그동안 눌려있던 억울함이 솟아났다. 그곳에 두고 온 열정이 있고, 아직 돌아보지 못한 12개 주가 남아있다. 다시 가야겠다. 함께 돌아와야 했던 사람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니, 전부 한국에서 구직 활동에 들어갔고, 속속 새로 자리를 잡는다. 그 모습에도 초조함을 느끼지 않는 내 자신을 확인하자, 다시 가자. 가는 게 맞구나 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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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땐 가더라도 가기 전까지 한량으로 지낼 수는 없는 노릇.
미국의 동향을 계속 체크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했다. 무엇보다 살아있는 얘기를 접해야 하고, 아직 선입견의 필터링이 없는 시선이 필요하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답은 유학생이었다.

미국에서의 이력에 38개 주를 쏘다닌 경험이면 충분하리라.
자신감을 바탕으로 이력서를 넣자 한 군데 빼고 전부 연락이 왔다. 10년도 더 전이었던 당시는 남들과는 다르게 누구보다 빠르게, 오지로 오지로, 구석 구석 YOLO YOLO 를 외치며 극동의 콜럼버스들이 파고들던 시기가 아니었다. 따라서 내 경험을 비싸게 쳐주는 고용주들이 꽤 있었다.

곧 떠날 것이기에 얽매일 직장을 찾지 않았다.
어느 정도 아르바이트의 개념을 가지고 구직을 하자 묘하게도 갑의 위치에 서게 됐고, 역으로 내가 고용주를 고르는 상황이 됐다. 착한 인상, 용이한 통근, 개인 시간 확보 가능의 조건 아래 리스트를 줄여나가, 결국 한 유학원을 간택했다. 배정된 업무는 미국 공립학교의 교환 학생 프로그램 담당. 우리나라 중고등학생들이 1년 동안 미국 공립 중고등학교에서 공부하게 될 프로그램의 담당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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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스팀잇 생활하시나요?
무더위야 가라!!!!

댓글이 바뀌신 것 보니 그래도 더위가 한 풀 꺾였나 봅니다.ㅎㅎ

다음 이야기도 궁금..
항상 아메리칸 드림의 성공기만을 들어왔기에 새롭게 느껴지네요. 성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만 널리 알려져 있기에 더 흥미로워요!

오잉.
재밌게 봐주시는 분도 있네요.ㅎㅎㅎ
감사합니다.ㅠ

스팀 가입했을 때 부터 아주 조금씩 써오던 게 있는데, 끝내려면 아직 한참 먼데다 제가 읽어도 별로 재미가 없어서 포스팅 안했었거든요. 글 잘 쓰시는 분들 많아서 민망하기도 하고.ㅎㅎ 근데 질러놓지 않으면 흐지부지 묻어버릴까봐 장고 끝에 일단 올리고 봤습니다.

여튼 감사할 따름입니다. xD

2편을 읽고 1편을 읽으니 뭔가 더 쏙 이해가되네요.

짜투리 시간에 끄적이던 걸 올리다 보니 너무 길어졌어요.
근데 또 알맞게 줄일 실력은 안되네요^^;

오오, 마셸린님 글 정말 좋아요..! 살아서 꿈틀대는 언어들. :))) 그 다음 이야기 곧바로 읽으러 갑니다!!!

칭찬 감사해요. :D
그 분이 오시어 얼른 후욱 다 쓸 수 있었음 좋겠네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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