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어뷰징과 스팀 백서, 그리고 나의 생각

in #kr6 years ago (edited)

 밖의 커뮤니티에서 갑론을박이 많았던 어뷰징 문제가 KR에서도 다시 논의가 되는 모양입니다. 여러 글들을 읽으며 착잡한 마음으로 출근을 했네요. 

여러 의견들이 있었고 각자의 논리가 있었기에 어느 것이 맞는 이야기인지 결정을 내리기가 힘들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회사에서 스팀잇 백서를 인쇄했고 퇴근해서 지금까지 한 글자씩 차분히 읽어봤습니다. 

백서라길래 왠지 블록체인 프로그래밍에 대한 기술적인 내용일 줄 알고 지금까지 외면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스팀잇을 만들게 된 배경과 세계관, 그리고 철학관을 논리적으로 설명해놓은 글이었습니다. 한글 번역판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영문판은 제가 읽어본 어떤 비즈니스 문서 보다도 훨씬 간결하고 이해하기 쉽게 적어놨더군요. 

읽다가 마음을 울리는 부분도 많았고 창시자인 댄과 네드의 선견지명에 무릎을 탁 치는 순간들도 많았습니다. 아직 백서를 보지 않으신 분들은 한 번쯤은 꼭 필독하기를 권장합니다. 몇몇 문장은 외웠다가 나중에 회사에서 써먹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와서, 역시 백서에도 보팅과 어뷰징에 대한 내용들이 담겨있었는데 이 부분을 읽으며 창시자들이 어떤 의미로 스팀잇을 만들었는지 이해가 됐고, 제 생각 또한 정리가 되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백서를 기반으로 어뷰징에 대한 제 생각을 몇 자 나눠볼까 합니다. 백서 자체는 나중에 따로 분석을 해보고 싶네요.



1. 비트코인은 Proof of Work 방식으로 채굴된다. 즉 마이닝을 하려면 해시 암호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해독할 수 있는 컴퓨터(정확히 말하면 알고리즘)를 돌려야 한다. 

스팀은 Proof of Stake 방식으로 채굴이 되긴 하지만 백서에서는 우리가 스팀잇이라는 공간에 시간과 노력을 들여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Proof of Work 비유하고 있다. 즉 우리는 매일 이곳에 글을 올리고 댓글을 달면서 간접적으로 스팀 채굴을 돕고 있는 것이다.

창시자들은 전기를 낭비하면서 무의미한 해시 암호를 해독하는 Proof of Work보다 SNS 기반의 플랫폼에서 사람들이 서로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사회 전체적으로 봤을 때 더 유익하다고 판단한 듯하다.


2. 하지만 문제는 채굴된 스팀을 어떻게 하면 가장 공정하게 배분할 수 있냐는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스팀잇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존해 유저들끼리 합리적으로 배분을 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설계했다. 

결국 스팀 유저들에게 더 높은 가치를 인정받은 서비스는 채굴되어 나오는 스팀을 더 많이 배분받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시스템이 바로 우리가 매일 하는 보팅이다. 


3. 모든 스팀 유저가 합리적이고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이 시스템은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안타깝게도 세상은 그렇지 않다. 스팀 백서 또한 이 문제를 경제학에서 나오는 "죄수의 딜레마"에 비유하고 있다. 

가장 극단적인 케이스로 모든 유저가 셀프 보팅만 한다면 스팀은 배분되지 않을 것이고 스팀잇이란 네트워크는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않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모두가 스팀을 위해 합리적으로 보팅을 하는 와중 배신자 한 명이 자신만을 위해 셀프 보팅만 한다면 배신자는 남의 이익을 희생하는 대가로 혼자 가장 큰 이득을 취할 수 있게 된다.


4. 스팀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시 시장경제에 맡긴다. 그리고 Negative voting이라는 기능을 추가해 유저들에게 어뷰징이 있으면 자율적으로 페널티를 물릴 수 있게  환경을 조성했다. 만약 한 고래가 어뷰징을 하더라도 수많은 돌고래와 피라미들이 몰려온다면 이를 저지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 거다.

이에 대해 백서에 다음 문장이 적혀 있었다:

"In fact, honest large stakeholders are likely to be more effective by policing abuse and using negative voting than they would be by voting for smaller contributions."

내가 이해를 제대로 못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선의를 가진 고래들이 작은 보팅을 여러 사람에게 나눠주는 것보다 어뷰징을 하는 다른 고래들을 잡으러 다니는 게 커뮤니티 전체를 위해서는 더 좋을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과연 오치님이 나 같은 뉴비들을 위해 1%씩 보팅 해주는 것보다 어뷰징하는 유저들을 저격하는 것이 커뮤니티 전체를 위해서 더 좋은 건지... 이 부분은 다른 분들의 의견을 더 구하고 싶다.


5. Negative voting을 통해 유저들이 서로를 견제하는 환경이 조성되면 어뷰저들을 처벌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어뷰징을 억제하는 역할을 한다. 

이 예로 백서는 "Crab Bucket" 이야기를 꺼낸다. 뚜껑이 없는 버켓 안에 게를 한 마리 넣어 놓으면 쉽게 달아날 테지만 게를 몇십 마리 넣어 놓는다면 서로 나가려고 발버둥 치다가 결국 아무도 못 나간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미국에서도 범죄율을 낮추는 데 가장 효율적인 것은 경찰의 수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각 동네 사람들끼리 서로를 지켜봐 주는 것이라고 발표난 적이 있다. 커뮤니티의 힘을 빌리는 것이 가장 강력한 억제 정책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건 사실 블록체인 기술의 핵심이기도 한 것 같다.


6. 재미있는 점은 백서가 "어뷰징을 완벽히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고 또 현실적인 목표가 되지 말아야 한다"라고 서술한 것이다. 어뷰징을 하는 사람조차 어떻게 보면 Proof of Work를 위해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게 가치가 없는 행위일 지라도). 

그렇기에 우리가 신경 써야 할 부분은 룰을 따르는 다른 사람들의 의지를 박탈시켜 커뮤니티를 파괴하는 심한 어뷰징만 골라서 막는 것이다. 범죄자를 다 잡아들일 수는 없다. 하지만 마피아 두목들을 감옥에 가두는 것은 가능하다.

Crab Bucket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뚜껑이 없으면 게 몇 마리가 도망갈 수는 있겠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버켓 안에 있는 나머지 게 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즉 새로운 어뷰징의 억제다.


7. 예전에 미국에서 포르노와 관련된 케이스가 대법원까지 올라간 적이 있었다. 문제는 과연 "포르노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였다. 누드신은 모두 포르노인가? 무조건 옷을 입다고 포르노가 아닌가? 결국 대법원장 한 명이 "법으로는 정의하기 어렵지만 누구나 보면 딱 알 수 있다"라고 포르노를 정의했다.

나는 어뷰징 또한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셀프 보팅의 비중이 50%가 넘으면 어뷰징인지 70%가 넘으면 어뷰징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고, 굳이 선을 긋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몫은 유저들이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8. 어뷰징은 어떻게 보면 현재 체제에서 불법은 아니다. 단지 편법일 뿐이다. 불법이 아닌 만큼 어뷰징을 하는 것에 대한 공식적인 처벌은 아직 없다 (물론 하드포크 20에서 이런 것들에 대한 제도적인 변화가 어느 정도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스팀잇은 "보이지 않는 손"인 우리들에게 그 처벌에 대한 결정권을 맡겼다. 그렇기에 우리는 설계되어 있는 것처럼 어뷰징이 있다면 소통으로 일단 제지를 시키고, 만약 대화로 풀리지 않는다면 제공받은 다운 보팅이라는 무기를 사용하면 된다.

물론 다운 보팅이 들어가기 전에 작게라도 담론이 있으면 좋을 것 같다. 그래야 다운 보팅이라는 권력이 남용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을 테니.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유저들이 이를 쉽게 판단할 수 있도록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데이터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clayop 님께서 제시하신 새로운 프로그램은 KR 커뮤니티에 유용한 도구가 될 거라 생각한다.


9. 서로의 이익만을 챙기기 전에 다들 스팀잇의 3가지 기본원칙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첫째, 공동체에 공헌을 하는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보상을 받야 한다.

둘째, 시간, 노력, 자본금 등 모든 공헌은 평등하다. 

셋째, 모든 구성원들은 어떠한 형태든 공동체를 섬길 수 있는 가치를 생산해야 한다.


이 원칙만 지켜진다면 스팀잇이라는 거대한 사회 / 경제적 실험은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두에게 건투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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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짱맨 호출로 왔습니다!
한주 수고하세요
코인거래소인 고팍스에서 멋진 이벤트중이네요!
https://steemit.com/kr/@gopaxkr/100-1-1

저도 한글판 백서를 읽고 있는 중입니다.
한달이 넘도록 백서를 읽지 않은 것은 한글판의 존재를 몰라서였는데 한글판이 있더군요.
아래글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https://steemit.com/busy/@partykim/6yascg

선대 스팀잇 유저들께서 잘 번역을 해주셨군요. 전문가들의 손을 거쳐서 그런지 번역도 기술적으로 잘 되어있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너무나 명쾌한 해석에 XX을 탁 칠 수 밖에 없네요.

위에서부터 진지하게 댓글을 읽는 중이었는데 뭡니까? 이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무릎을 쳤다고 말씀하시면 되는데 굳이 쑥쓰럽게 XX라고 쓰실 필요 까지야... ^^

역시나 예상한 대로 백서에 적혀 있네요..

기준이란 것을 만들기 어렵기 때문에 다운 보팅이랑 칼을 나눠주었네요.

멋진 글 잘 보았습니다.

이걸 다 예상한 댄과 네드 두명 다 정말 이 시대의 인재들인 것 같습니다.

참 좋고 알찬 내용입니다. 저도 백서를 계속 읽고 있는데 어렵더라고요. 앞으로 찬찬히 이렇게 풀어주시길 기대합니다

방금 두번째 완독 했습니다. 원문이 너무 좋아서 제가 소개하는 게 부담이 좀 가네요.

멋진 내용입니다. 근래의 분위기를 본다면 1프로의 기본소득보다 다운보트가 더 의미 있어질것 같은 생각이 들긴하네요.

KR에서 여러분들과 함께 논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좋은 글 감사합니다! 시간 될 때 백서를 한 번 읽어봐야 겠네요!

밑에 보니 한글 번역판도 링크가 되어있는 것 같습니다. 도입부라도 꼭 읽어보세요.

그렇지 않아도 오전에 좀 읽어봤는데 다 구현된 건 아니지만 사상은 대단하네요

백서를 읽어보지 않았는데 마지막의 스팀잇 3가지 기본원칙이 인상적이네요^^

기본 원칙 말고도 주옥 같은 문장들이 주구 장창 있습니다. 꼭 필독 권합니다.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 백서도 읽어보겠습니다. 밖의 커뮤니티는 어디를 말하나요?

KR 밖의 외국 커뮤니티를 지칭했습니다. 트렌딩 페이지 코멘트를 읽어보시면 난장판에 아주 가관입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글이네요.

스팀잇 하면서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하고 분배하는 공간이 되면 좋겠어요

말씀하신 가치의 "생산"과 공정한 "분배"가 백서의 핵심인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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