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실화영화, 논픽션과 결합하다

in #kr5 years ago

(*월간 <한국영화> 101호에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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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수살인>은 고인이 된 피해자의 인격권을 침해했다. 유족의 동의가 없는 상영은 금지돼야 한다.” _피해 유가족

“영화 제작사가 유족의 동의를 받지 않고 촬영한 점은 변론에 앞서 사죄드린다. 이 영화는 범죄 피해자에 초점을 맞춘 게 아니라 믿을 수 없는 자백을 한 범인과 우직하고 바보스러운 형사에 초점을 맞췄다.” _쇼박스

지난 9월 20일 <암수살인> 속 실제 사건의 피해자 유가족은 영화 배급사인 쇼박스를 상대로 영화상영금지가처분 소송을 냈다. 쇼박스는 <암수살인> 개봉 직전까지 실마리를 풀지 못해 전전긍긍해야 했다. 개봉일을 이틀 앞두고 피해자 유가족의 소송대리인이 “영화 제작사로부터 진심 어린 사과를 받고 가처분소송을 취하했다”고 하면서 영화는 가까스로 개봉할 수 있었다. <암수살인>은 다행스럽게도 377만여 명(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집계)의 관객을 불러모아 흥행에 성공했다.일단락된 이번 다툼을 어떻게 봐야할까. 일처리가 꼼꼼하지 못해 벌어진 사소한 해프닝인가. 그보다 실존 인물이나 실제 사건 같은 실화를 세심하게 다루지 못해 발생한 구조적 문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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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인>(2013) <히말라야>(2015) <택시운전사>(2016) <공작>(2018) 등 최근 5년 동안 매년 박스오피스 10위권 안에 실화를 소재로 한 한국영화들이 한 편 이상씩 나오고,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많이 제작되고 있는 사실만봐도 실화가 가진 소구력은 영화산업에서 검증된지 꽤 오래됐다. 그럼에도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종종 법정 분쟁에 휘말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실화 아이템은 판권 확보만큼이나 시나리오로 개발하거나 영화로 제작하는 난이도가 소설, 웹툰, 웹소설 같은 다른 원천 콘텐츠에 비해 높은 편이다. 실화 아이템을 전문적으로 다룰 수있는 작가나 프로듀서가 부족하고, 그러다보니 시나리오 개발 및 영화 제작 진행 과정에서 이런저런 논란에 휘말리거나 법정 분쟁이 종종 벌어진다. <암수살인>이 그랬듯이, 고(故) 김훈 중위의 의문사를 다룬 영화 <아버지의 전쟁>의 경우도 유족이 김 중위의 명예와 사후인격권을 침해했다며 ‘촬영 및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내는 바람에 촬영이 중단된 상태다.

지난 10월 17일 서울고등법원이 촬영과 상영을 금지한 원심을 뒤집고 제작을 허가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지만, 후유증은 남아있다. 시나리오 작가 A씨는 “한국의 영화 및 드라마 작가들은 팩트를 취재하는 능력이 많이 떨어진다. 취재력이 떨어지면 가공이 늘어나고, 그렇게 되면 서사의 핍진성이 떨어지게 된다”고 실화 소재 영화에서 취재가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했다. 이 과정에서 영화개봉 전후로 발생할 수 있는 법적 분쟁의 위험을 관리하는 노하우도 필요하다. A씨는 “아무리 영화화 동의서를 작성했다고 해도 유가족의 마음이 바뀌면 분쟁으로 가게 된다. 분쟁이 생기면 한국시장은 감정적으로 유가족의 편”이라며 “그렇기 때문에 영화화 허락을 받을 때부터 개봉할 때까지 유가족의 태도, 입장변화,경제 상황 등 모든 것을 세심하게 챙겨야 한다”고 말했다.
한 변호사는 “<암수살인>은 극 중 주인공의 모델이 아닌 실제 사건 피해자의 유가족이 문제를 제기한 건데, 이런 경우에는 피해자들을 일일이 찾기 어려웠다고 해도 찾아서 동의를 구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며 “법원은 동의를 구했는가의 여부 만큼이나 동의를 구하려고 노력했는가의 여부를 중요하게 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사건의 내용, 유가족의 영화화동의조건,각색 허용 범위 등 실화 아이템마다 법적 분쟁을 해결할 방법은 제각각이지만, 분명한 건 제작사가 유 가족을 포함한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과 충분한 소통이 필요 하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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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볼>

실화에 대한 수요가 많고, 관련 문제가 꾸준히 발생함에도 한국에선 실화를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대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하지만 출판계에서(신문 및 잡지기사, 자서전, 회고록 등을 포함한) 논픽션이라는 장르가 오래 전부터 산업으로 형성돼 발전해온 미국이나 일본에선 전문작가가 이미 재구성한 실화 아이템을 제작사가 구매하는 일이 흔하다. <블랙 호크 다운>(2000) <머니볼>(2011) <히든 피겨스> (2016) 같은 할리우드 영화나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마인드 헌터>(2017)는 장르도, 매체도, 제작비 규모도 다르지만 모두 실화를 기반으로 한 작품이다. 이 작품들은 모두 논픽션 저작물을 원작으로 한다. 제작사가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된 논픽션의 영화화 판권을 사들여 영화나 드라마로 개발해 제작한 이야기라는 얘기다.

논픽션이 아직은 산업으로 형성되지 않은 한국에선 실화를 기반으로 한 아이템, 특히 일간지나 주간지의 뉴스 기사는 누구나 접근이 가능한 공공재라는 인식이강한 게 업계 현실이다. 그러다보니 소설, 웹툰, 웹소설과 달리 실존 인물이나 사건을 다룬 기사는 원천 콘텐츠로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많은 시나리오 작가와 제작자는 실화가 “공익성 성격이 강한 뉴스인 경우가 많고, 여러 매체가 같은 사건을 보도하며, 기사를 기반으로 하지만 극적 요소를 가미하 기 때문에 기사를 작성한 기자에게 사용료를 지급하기 애매하다”는 이유를 댄다.

시나리오 작가 B 씨는 “작가건, 프로듀서건 신문 기사나 방송 뉴스를 보고 아이템을 개발하는 경우가 많다”며 “아직 한국에서 기사는 상업적 목적으로 작성되고 배포되는 게 아니라서 기사, 특히 스트레이트 기사를 보도한 기자에게 사용료를 따로 지불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팩트를 바탕으로 인물을 가공하고, 실제 사건에 극적 요소를 가미하면 저작권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에 사용료 지불을 피해갈 방법은 많다”며 실화 아이템을 확보하기 위해 굳이 지갑까지 열 필요가 있냐는 의견이다. 최근 보도한 자신의 기사를 관심있게 본 제작사로부터영화화 판권 구매 문의를 받은 한 시사주간지 기자는“주간지의 긴 기사 또한 공익적 보도를 전제로 만들어졌지만, 기사가 나오기까지 기자가 쏟은 시간적, 금전적 비용이 엄연히 존재하고, 팩트를 바탕으로 기자의 관점과 해석이 가미돼 작성된 기사이므로 분명 저작권이 존재한다”며 “동시에 취재원을 보호해야 할 의무와 윤리를 가진 기자에게 기사 속 인물을 따로 만날 방법만 요구하는제작사의 행동은 여전히 기사를 공공재라고 생각하는 듯하다”고 말했다. 최근 영화사 집이 주진우 <시사IN> 기자가 이명박 전 대통령의 비자금 저수지 취재를 중간 정리한 책 <주진우의 이명박 추격기: 저수 지를 찾아라>의 영화화 판권을 구매한 건 메모해둘 일이다. 어쨌거나 해당 기사를 작성한 기자로선 저작권을 인정받기 위해 기사를 스트레이트가 아닌 서사 구조를 갖춘 형식으로 작성하거나 논픽션으로 각색하는 방법도 고려할 수 있다. 시나리오 작가 A 씨는 “픽션과 논픽션을 넘나들어야 한다. 제작사나 프로듀서가 (논픽션 혹은 기사의) 저작권을 사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며 “그러려면 치밀한 취재를 바탕 으로 소설을 만드는 방법이 가장 좋다”고 말한다. 제작사가 실화 아이템을 구매하는 가격은 아이템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보통 적게는 500만 원에서 최대 2천만 원에 이른다고 한다.

지난해 12월 설립된 실화 스토리 기획사 팩트스토리가 눈에 띄는 것도 그래서다. 이름대로 팩트스토리는 드라마틱한 실존 인물과 사건, 실화를 기반으로 한 웹소설, 웹툰, 인물 전기를 기획하고 제작하는 회사다. 영화나 드라마 판권 판매를 목표로, 기획 단계에서 실존 인물이나 사건을 작가와 공동으로 기획하고 취재해 아이템을 개발하는 시스템으로 사업을 운영한다. 쉽게 얘기하면 극적인 실존 인물과 사건을 확보해 영화나 드라마 묘사 허락을 받고, 그것을 웹소설, 웹툰, 시나리오 등 아이템에 어울리는 원천 콘텐츠로 기획·제작한 뒤 아이템에 관심을 보이는 영화·드라마 제작사에 판권을 판매하는 일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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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된 지 10개월 만에 팩트스토리는 경찰청 1기 프로파일링팀을 그려낸 논픽션 <악의 해석자-대한민국 1호 프로파일러>를 카카오페이지에 총 26화로 연재했고, 지난 9월에는 종이책도 발간했다. 현재 이 소설은 영화 제작사 한 곳과드라마 제작사 한 곳과 판권 판매를 논의하고 있다. 두 번째 논픽션인 <조선에온 일본 여자, 아오키츠네>는 8월 10일 모바일 플랫폼인 카카오스토리펀딩에 연재됐다. 식민지 시절 조선인 남성 과결혼한뒤해방이후한국에왔고,1965년한일국교정상화 이후에도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은 재한 일본인 이야기다. 팩트스토리는 지난 9월 초에는 영화사 명필름과 실화 공동개발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두 회사가 맺은 계약은 명필름이 취재비를, 팩트스토리가 취재력을 부담해 실화 아이템을 개발한 뒤, 명필름이 시나리오 개발권과 영화제작 권리를, 팩트 스토리가 웹소설·웹툰·종이책의 개발 권한을 가진다는 내용이다. 아직 밝힐 수 없지만 여러 실화 아이템의 영화화 판권 계약이 체결됐다. 실화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회사는 충무로 안팎에서 팩트스토리가 처음이다.

CJ, 롯데, 쇼박스, NEW 등 기존의 4대 대형 배급사로 형성된 시장 질서에 신규 투자배급사들이 뛰어들면서 라인업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해졌다. 실화 아이템에 대한 수요가 늘어난 시장 상황에서 팩트스토리의 시도가 신선한 바람을 불러올 수 있을까.
글 김성훈 <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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