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룸.4 <미녀와 야수>, 진취적 여성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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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다음 영화 <미녀와 야수>(2017) 스틸컷

Feelroom.4 (film)


<미녀와 야수>, 진취적 여성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판타지를 판타지로 읽는 법


1.클리셰에 저항하는 클리셰


아름다운 동화들은 왕자와 공주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공주들은 어떤 위기를 겪고, 백마 탄 기사 혹은 왕자님이 기막힌 타이밍에 나타나 멋지게 구출하고 결혼한다. 동서양 어느 고전 동화에 집어넣어도 이상하지 않은 이야기다. 오히려 너무 고전적이라 지금 등장하면 파격적이고 색다르기까지 할 것이다.

그런데 <미녀와 야수>는 좀 다르다. 공주와 왕자가 나타나는 것은 같은데, 백마 탄 공주가 왕자를 구하러간다. 위기는 왕자가 겪고, 용감한 공주가 왕자를 기막힌 타이밍에 구한다. 다만 창과 방패로 적을 무찌르기보단, ‘사랑의 속삭임’이라 좀 풀이 죽긴 하지만 어쨌든 고전적인 남녀의 역할이 뒤바뀐 채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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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의 캐릭터가 아버지 대신 전장에 나간 뮬란에 대항할 수 있을까? *사진 : 다음 영화 <뮬란>(1998) 스틸컷


혹자는 이 같은 모습이 진취적인 여성상을 그리는 ‘디즈니의 스타일'이라고 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좀 다르다. 진취적인 여성을 그린다기엔 <뮬란, 1998>같은 임팩트도 없고 실존 인물인 잔다르크처럼 한 나라의 ‘운명의 창’이 되어 전장을 누비는 정도의 비범함도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재 디즈니는 <뮬란>도 <미녀와 야수>와 마찬가지로 실사화를 진행하고 있어서, 진취적 여성상을 내세운다면 두 작품 중 <뮬란>에 힘을 실어주는 게 합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미녀와 야수>는 진취적 여성상이니 하는 것 보다는 더 근본적인 것에 저항하는 듯 보인다. 바로 ‘전통’ 내지는 ‘고정관념’과 같이 더 폭넓은 개념에 대한 저항의식이다. 진취적 여성은 고정된 여성 성역할에 대한 반기를 듦으로서 ‘낡은 가치’에 대항하는 것은 같지만, 그 목표가 하나에 집중되어있다. 반면 <미녀와 야수>의 주인공 ‘벨’이 대항하는 것은 다소 넓은 대상을 향한다.

벨은 마을에서도 괴짜로 표현되는데, 그 이유가 ‘마을에 아무도 찾지 않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행위 때문이다. 초반 뮤지컬 씬에서 마을 사람들이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 집작하는 모습, 그에 대해 실증을 느끼는 벨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모습들을 볼 때 주인공 벨이 궁극적으로 대항하는 것은 ‘고리타분한 무엇’이지, 여성의 성역할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마을 최고 미남인 개스톤이 벨의 마음을 훔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 속에서, 능력 있고 잘생긴 남자에게 마음을 뺏기는 것은 그 마을에서는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개스톤과 르푸의 뮤지컬 씬에서 여성들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 모두가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개스톤의 구애 행동은 개인적인 돌출 행동이 아니라 마을의 어떤 관습 같다. 마을 처녀들이 개스톤의 마음을 빼앗기 위해 고군분투 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마을에서 ‘결혼하지 않은 자’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하니까.

그렇기에 여기선 여성의 남성에 대한 종속화는 어떤 ‘전통’의 힘이 더 큰 것이며 벨이 개스톤을 거부하는 것도 그 마을의 전통에 대항하는 것이지, 남성에 대한 종속까지 포기한 것은 아니다. 개스톤을 문전박대 하는 씬에서 벨은 ‘(개스톤이 아닌, 멋진 남자에게)시집가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지도 않으니까. 오히려 벨은 여성성을 적극적으로 취한다. 늘 아버지에게 ‘장미 한 송이’를 부탁하는 것이나, ‘야수의 성’에서 환심을 사고자 준비된 ‘화려한 것’들에게 마음을 뺏기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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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이 되어버린 우스꽝스러운 시종들 *사진 : 다음 영화 <미녀와 야수>(2017) 스틸컷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성역할에 대한 고찰보다는 그야말로 고리타분한 것, 클리셰로 굳어버린 우리의 부정한 낡은 가치, 그 자체인 것에 대해 저항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벨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왕자의 역할이 사라진 ‘야수’에게도 해당하는데, 권위 있고 찬란하며 멋진 왕자와 달리 야수는 짐승 같은 외모와 일그러진 자아, 비록 성이지만 저주로 인해 낡고 차가운 공간, 물건으로 변해버린 시종들, 모든 것이 말끔한 왕자님과는 동떨어져있다.

여기서 왕자의 성격 또한 일반적인 것과는 반대의 성향을 띠는데, 위풍당당하고 당찬 왕자님보다는 어수룩하고 소심한 모습, 신경질적인 모습 등 ‘보편적인 왕자’의 성격보다는 지극히 ‘일반적인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또 보편적인 왕자의 모습 중 나쁜 기질인 오만함 등도 보이지 않는데, 물론 야수가 되기 전엔 그랬지만 이 ‘동화’의 공격을 받아 그런 모습이 거세된다. 그런 까닭에 야수의 모습은 왕자(그에 준하는)의 통념적인 모습과는 달리 정 반대의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

이렇게 놓고 보면 벨이 야수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과정은, 매우 진부한 과정을 거쳐 이루어지지만, 그 결과물은 결국 통념을 부수기 위한 과정임을 보여준다. 그건 마치 오래된 길을 거꾸로 가며 드러나는 이질적인 풍경을, 하나하나 되짚고 고쳐나가는 과정과 흡사하다. ‘외면을 보지 말고 내면을 보라’는 말은 그야말로 동화적인 1차 기호이고, 실제로는 ‘우리의 가치를 정의하는 통념을 부수고 진실로 내가 원하는 것을 볼 줄 아는 눈을 떠라’는 것이 진정한 주제가 될 것이다.

영화 속에서 줄곧 벨이 좋아하고 사랑한 가치들을 주목하면 이 ‘낡은 동화 속 이야기’가 말하려는 진짜 가치가 보일 것이다. 그녀가 사랑한 것은 ‘자유의지(단순히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려는 게 자유의지가 아니다. 내가 원하고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의지다)’ 이며, ‘배려와 겸손(혹은 숭고한 희생이겠다)’ 이며, ‘정의’ 이며 끝끝내는 ‘사랑’이다.

이 아름다운 동화 이야기가 결국 진부하면서도 진부함과 싸우는 것은, 이처럼 자신을 정의하는 주제도 낡았지만 변치 않는, 그러나 영원히 간직해야할 가치이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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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배우, 물건들이지만 현실에서 볼 수 없는 몽타주적 이미지. 판타지의 영역이 우리의 오감을 자극하는 이유는 그야말로 현세계에 '없기' 때문이다. *사진 : 다음 영화 <미녀와 야수>(2017) 스틸컷


2. 판타지는 판타지일 뿐이기에


사실 이 영화는 딱히 왈가왈부할 것이 없는 이유가 앞서 말했듯, 이미 스스로가 줄곧 ‘나는 진부한 이야기를 할 거야’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는 주전자인 ‘미세스 팟’의 입을 빌려 부르는 아름다운 OST 'Beauty and the Beast'의 말미에 거듭 등장하는 ‘아주 오래된 동화’라는 가사로 증명된다.

영화관에서 <미녀와 야수>를 보겠다면서 엄청난 대반전 혹은 격정적인 사랑을 기대하고 표를 끊은 사람은 없지 않을까? 그리스인들이 ‘오이디푸스’ 이야기를 다 알면서도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눈을 찌르는 그 한 장면을 보려고 연극을 몇 번을 다시 봤듯이, 우리도 미녀와 야수가 어떤 좌절을 딛고 끝끝내 사랑하고 저주에서 풀리는 모습을 보고 싶을 뿐이다.


마법의 거울을 통해 바라본 벨의 내면속 그리움처럼, 우리는 우리 차가운 마음 속 어딘가 방치된 '무엇'을 그리워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진 : 다음 영화 <미녀와 야수, 2017> 스틸컷


그건, 이를테면 갈증이다. 물은 매일 마시지만 잠시라도 마시지 않으면 갈증이 나듯이. 사랑은 늘 뻔하고 열망과 이별의 연속이지만 늘 사랑하고 싶듯이. 스마트폰이니 VR이니 하는 시대에 공주와 왕자 이야기 하는 게 우습지만 가끔은 그런 환상적인 삶이나 이야기도 그리워지듯이. 다만 그 환상이 얼마나 환상적일까에 관심이 있을 뿐이지, 좋고 나쁨을 따지려 드는 게 아닐 게다.

그러니 현대에 쏟아지는 다양한 작품들의 내러티브와 비교하면 이 영화가 지리멸렬해지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그런데도 굳이 본다는 것은 그야말로 ‘자유의지’다. 내 마음 속에 완전히 죽지 않은 판타지, ‘어른아이’가 꿈꾸는 동화, 뭔지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뭔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 마음 속 한편에 자리 잡고 있는 ‘어떤 소중함’을 지키고 싶은 마음. 우리는 단지 그것을 지키고 확인하고 싶었을 뿐 아니었을까?

그런데 <미녀와 야수>같은 ‘동화 속 이야기’가 흥행을 이어갈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우리 현재가 환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무한스펙경쟁 사회에서 청춘의 낭만 같은 것도 과연 ‘옛말’이 된지 오래다. 낭만이 있기는 했었는지, 아니 이 사회에서 낭만을 즐기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건지, 의문스러워진 것이 한두 해가 아니다. 그런 사라져 가는 낭만에 대한 위기감을, 그 무엇보다도 단정적이고도 확실한 동화를 통해서 극복해보거나 위안 받으려는 것은 아닐까.

극중 야수와 벨의 이미지는 이런 상태에 놓인 사람들에게 더 깊은 유대감을 안긴다. 내면의 상처로 이기적인 인간이 되었다가 마침내 괴물이 되어버린 ‘야수’와 밝고 씩씩하지만 ‘자유의지’를 실천할 길이 없는 부재 속에 놓인 벨. 어딘가 엇나가버린 이들이 마침내 이해하고, 사랑해서 저주가 풀리길, 우리 스스로가 바라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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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이 디즈니 영화를 좋아해 함께 보러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진취적 여성의 느낌보다는 고정되어버린 관념을 깨려는 시도가 보이더군요. 크게 기대를 하고 가지 않았는데 만족하며 나왔습니다.

저는 디즈니의 작품들을 많이 보지 못해서 특유의 작품 특성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지만 마지막 물건들이 다시 인간으로 바뀌는 부분에서 다양한 인종을 다뤘다는 점을 흥미롭게 봤습니다. 오늘도 감사히 보고 갑니다 :)

네, 아무래도 벨은 자신이 여성이라는 사실에 대해 그 편견을 깨려는 것은 아닌 듯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듣고보니 다양한 물건 형태의 시종들이 다양한 인종의 화합을 다루는 것은 아니었나, 또 인종에 대한 시선을 (인간을 물건으로 객체화 하는) 다룬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좋은 의견 감사드립니다 :)

인종의 화합과 인종에 대한 객체화까지 확장이 되네요. 마지막 다같이 춤추던 장면이 생각납니다. 또 다른 생각을 보게되어 저도 감사드립니다 ! :)

미녀와 야수 영화를 페미니즘 적으로 해석하려 하면서 논쟁이 되는 부분이 많았는 데, 새로운 해석을 보니 흥미롭습니다. :)

사실 이 영화를 페미니즘 관점에서 보시는 분들이 많기는 합니다. 저와는 의견이 좀 다르기는 합니다만 다양한 관점에서 영화를 향유할 수 있다면 더욱 좋다고 믿습니다. 고맙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근에 가입한 노래 포스팅 하는 뉴비입니다^^
흥미롭고 유익한 블로그 정말 잘 봤습니다ㅎㅎ
팔로우하고 자주 찾아 뵐게요 ^_^

노래 포스팅이라니 스팀잇의 저변이 넓어지는 걸 새삼 체감하게 됩니다. 같은 뉴비로서 앞으로의 활약 응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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