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프라인 전쟁 - 원유 운반 파이프라인의 탄생 (2부)

in #kr5 years ago (edited)

지난주 1부에서는 미국 펜실베이니어에서 원유가 발견되면서, 땅 밑에서 퍼올린 원유를 나무통에 담아 마차와 바지선으로 정유소까지 옮기던 시절의 얘기를 들려드렸습니다.

이번 주에는 드디어 유정에서 정유소까지 파이프라인 건설이 시도되는 얘기입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패를 겪게 됩니다.


최초의 원유 파이프라인은 오직 상상에 의존해서 만들어졌다. 웨스트버지니아 출신으로 공병부대에서 복무했던 사무엘 칸스 준장은 버닝 스프링스에 염정(塩井)을 가지고 있었다. 이 염정에서 원유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파커스버그의 오하이오 강까지 이어진 50마일의 내리막길에 직경 6인치 파이프라인을 깔려고 생각했다. 당시는 1860년 11월이었고, 아이디어는 이뤄지지 못했다. 1년 후 이리 출신 한 남성이 타이터스빌에서 오하이오시까지 목재 파이프라인을 깔자고 제안했다. 이 아이디어 또한 이뤄지지 않았다.

1862년 처음으로 실제 파이프라인 건설을 시도한 사람은 펜실베이니아의 J.L. 허친슨(J.L. Hutchinson)이란 사람이었다. 이 파이프라인은 사이폰 원리(출구가 입구보다 낮게 위치해 있는 한 계속 유체가 흐르는 원리)를 활용해 언덕을 넘어 정유소까지를 잇는 것이었다. 하지만 예외가 있었으니, 파이프가 기밀 상태를 유지하지 못할 경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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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대부분의 사람들은 긴 금속 파이프를 통해 원유를 옮기는 일을 "몽상 같은 계획"이며, 미치지 않았으면 여기에 돈을 대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분명 계획은 수포로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다. 금속 파이프를 하나의 틈도 없이 연결하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또한 마차 인부들은 이 파이프라인이 생존을 위협한다고 생각했고, 이를 막기 위해 격렬하게 저항했다.

이듬해 여름, 허친슨은 다시 파이프라인 건설에 도전해, 2마일 길이를 완성했다. 원유 유출이 있긴 했만, 펌프와 파이프의 조합은 충분히 잘 작동했고, 운영 회사 훔볼트 마이닝 앤 리파이닝 컴퍼니(Humboldt Mining and Refining Company)은 자랑스럽게 성공을 선언했다. 1864년 투자 설명서는 다음 같이 밝히고 있다:

타르 농장에서 훔볼트 정유 공장까지 이어진 파이프라인의 완성으로 24시간 동안 800배럴의 원유 운송이 가능해졌다... 현재 당사는 이 파이프라인을 통해 유정에서 언덕을 넘어 이전의 절반 비용으로 원유를 운송할 수 있게 되었다.

하퍼스 지에서도 이 파이프라인을 "참신한 시도"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허친슨의 그다음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듬해 유정에서 철도까지 3마일 길이의 파이프라인을 건설했지만, 유출되는 원유의 양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후 사무엘 반 시켈(Samuel Van Syckel)라는 인물이 원유를 팔아 번 돈을 5마일 길이 파이프라인 건설에 투자하겠다고 나섰다. 그리고 바로 사람들의 조롱거리에 올랐다. 친구들까지 나서 어리석은 생각은 버리고, 나서지 말라고 막아섰다. 일면식이 없던 사람들도 "지구 한 바퀴를 파이프라인으로 돌리시지?"라며 그를 놀렸다. 굴욕을 참기 힘들었던 그는 밥도 혼자 먹었고, 뒷문으로 드나들었다.


그때 야망 있고 자부심 강한 A.W. 스마일리(A.W. Smiley)라는 젊은이가 기발한 아이디어를 들고 반 시켈을 찾아왔다. 그렇지만 파이프라인 건설은 정말로 까다로운 일이었다. 당시 파이프라인 건설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이렇게 회상한다.

당시 수많은 파이프라인 건설 계획이 낙관적인 희망으로 시작했지만, 결국 파산으로 마무리되곤 했다. 그렇게 많은 계획이 똑같은 운명을 맞이했다는 점이 더 놀라운 일이다.

이윽고 1865년, 유정에서 철도까지 직경 2인치 파이프를 이어붙인 라인이 완성되었고, 성공리에 운전을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3개의 리드&콕스웰 싱글-피스톤 스팀 펌프를 사용한 이 파이프라인은 허친슨의 최대 용량보다 7배나 더 많은 원유를 운송할 수 있었다.

300개 팀 하루에 10시간씩 작업에 매달렸다. 피트홀 레코드에서는 이를 "상당히 참신한 시도"라고 불렀고, 이후 "경이적인 일 중에서도 경이적인 일"이라고 칭했다. 작가 타벨은 반 시켈의 파이프라인을 펜실베이니아 원유 역사상 두 번째로 중요한 사건이라고 불렀다. 가장 중요한 사건은 원유가 발견된 일이었다. 혁명의 시작이었다.

비록 중간에 다량의 원유가 유출되긴 했어도, 처음 성공을 거둔 허친슨의 파이프라인은 원유 회사들에게 배럴당 단 1달러의 운송비를 약속해 주었지만, 마차 인부들들에게는 직장을 빼앗아 갔다.

이 작은 파이프가 마차 운송 산업을 전체를 위협했고, 그들은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1861년 목재 파이프라인 건설 계획을 로비를 통해 저지한 것처럼, 그들은 도시 곳곳에 반 시켈의 파이프라인을 비난하는 표지판을 세웠다.

이어 곡괭이로 파이프라인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파이프라인에 쇠사슬을 묶고, 말로 끌어 서로 분리시켰다. 파이프라인을 지키기 위해 보안관이 무장 병력을 배치했지만, 위협은 그치지 않았다. 분노한 마차 인부들은 원유 회사 사장에게 익명으로 위협을 담은 편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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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2시, 무장한 마차 인부들이 한 원유 회사 탱크를 폭파시켰고, 그 화재로 5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누군가 주지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반 시켈은 뉴욕에서 소총을 사들여 왔다. 철도 노동자들도 분노하긴 마찬가지였다. 웨스트 펜 레일로드 컴퍼니(West Penn Railroad Company)의 노동자들은 철로를 가로지르는 파이프라인을 파괴했다. 파이프라인이 다시 개설되면, 철도 노동자들이 다시 파괴하는 일이 이어졌다.

유정에서 지역 정유소까지 이어졌던 초기 파이프라인이, 존 D. 록펠러(John D. Rockefeller)가 정유소들을 합병하자, 곧장 철도로 연결되게 되었다. 오일 크리크 튜브 웍스(Oil Creek Tube Works) 같은 곳들에는 수십 개의 파이프라인이 나란히 연결되기도 했다. 1872년이 되자, 펜실베이니아 지역 1,200개의 유정에서 연간 600만 배럴의 원유를 생산해 냈고, 전부 파이프라인을 통해 모아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파이프라인들이 철도와 경쟁하기 시작했고, 록펠러에게서 힌트를 얻어, 합병이 이뤄졌다. 페어뷰 파이프 라인(Fairview Pipe Line)이 처음으로 유나이티드 파이프라인 어소시에이션(United Pipe Line Association)이 되었고, 나중에 스탠더드 오일(Standard Oil)에 편입되었다. 1874년, 피츠버그까지 60마일 길이의 직경 4인치 파이프라인이 건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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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년 펜실베이니아 트랜스포테이션 컴퍼니(Penhylvania Transportation Company)이 주를 가로질러 동쪽으로 300마일이 넘는 파이프라인 건설 허가를 따냈다. 하지만, 우선 1차 파이프라인이 클리블랜드까지, 이어 2차로 버펄로까지, 마지막으로 뉴욕, 필라델피아, 볼티모어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타이드 워터(Tide Water)가 펜실베이니아 트랜스포테이션 컴퍼니를 제치고, 펜실베이니아 브래드포드에서 뉴저지 베이온의 정유소까지 직경 6인치 파이프라인을 완공했다. 1907년이 되자, 반 시켈의 다음 세대가 건설한 직경 6인치 및 8인치 파이프라인의 길이는 지구를 두 바퀴 돌 정도였다.

파이프라인 건설에는 펌프의 용량이 관건이었다. 하나의 파이프라인을 통해 앨러게니 산맥을 넘어 원유를 운송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따라서 중간 여러 곳에 원유 저장 탱크와 펌프장을 건설하고, 이들 사이에 파이프라인을 놓았다. 파이프 양단에 나사산을 만드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파이프 연결도 더 수월해졌다.

(3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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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나 현재나 다를게 없네요 ~ 흥미진진합니다. 잘보고 가요 ~ ^^

그렇죠. 역사는 같지는 않지만 비슷하게 반복되니까요^^

덕분에 항상 재밌게 역사를 이해하고 있습니다
보클하고 갑니다

재미있게 보셨다니 감사합니다^^

피우스님의 역사이야기와 국제유가의 흐름을 함께 보니 더 재밌네요 그레잇!입니다.
보팅과 디클릭으로 응원드려요!

유가가 상승분을 다 까먹고 있네요...

디클릭은 사랑입니다. 후원차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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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 감사드립니다^^

신기술의 개발 및 적용은 기존 노동자의 반발을 부르는군요. 예나 지금이나요.

어쩔 수 없는 시장의 작동 방식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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