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n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노동자 (중)]

in #kr7 years ago

안녕하세요?

어제에 이어 오늘도 똑같은 주제를

가지고 글을 쓰게 될 Min입니다!

마찬가지로 글의 내용이 잘못된 점이 있다면 부디 지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950년대

는 광복이후 증가했던 노동조합의 수와 활동이 1950년 6.25전쟁으로 인해

중단이 되며,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전쟁에 참여 하게 되고, 전쟁에 미참여한

노동자들은 전시 상황에 따라 장시간 노동들 감수하며, 임금 체불과

저임금으로 인한 생활고를 견뎌내야만 했던 시대였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51년~53년까지 인천부두노동자들의 노임투쟁,

광산노동자들의 쟁의, 조선전업노조의 체불노임 지불,

요구 쟁의 등이 계속되었습니다. 이러한 투쟁에 결과로 53년 해에

노동조합법 , 노동쟁의법, 근로기준법, 노동위원회법

이렇게 4개의 노동법이 공포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법들은 노동자들의 인권을 보장해준다기 보다

당시 쟁의들을 수습하기 위해 그리고 관리하기 위해 재정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1960년대

는 4.19혁명의 승리로 인해 이승만 정권이 물러나면서 그동안 억눌려 있던

노동쟁의가 폭발했다고 표현할수 있습니다. 어용노조 그중에서도 부두노조는

수많은 부패와 비리, 노조간부들의 제도화된 노임착취로 이률 규탄하는

노조민주화운동이 일어났으며, 또한 새롭게 교원들의 노조결성이

대구에 초,중,고에서 시작되고 서울, 부산 등 전국으로 확산이 되며

대학교수들 역시 합세하여 나중에는 한국교원노조연합회를 결성하였습니다.

이들은 각종 학원 비리로 꼽히던 사친회비와 기타 잡부급 폐지운동을 진행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1961년 5. 16 군사정변으로 인해 모든것이 無로 돌아갔습니다.

군사정부는 포고령 5호, 6호를 공포하여 모든 노동쟁의를 금지시키고,

5월 23일 모든 정당 및 사회단체를 해산시킴과 동시에 정치성 없는 구호단체와

노동단체 및 종교단체는 별도로 절차에의해 재등록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한국교원노조연합회 역시 허가를 받지 못해 해체되었고,

수백명의 노동조합 간부들이 구속되었습니다.

이후 8월 '근로자의 단체활동에 관한 임시조치법'을 공포하여 재건조직위원회 위원 9명을 지명하고

20일만에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이 출범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63년 공익 중심의 노동행정과 쟁의행위의 제한 등을 주요 내용으로한

노동법이 개정 되었고 경제개발이 시작되면서 저임금 장시간 노동 등으로

인해 노동자들의 불만과 투쟁이 점점 쌓여만 갔습니다.

1970년대


는 전체적으로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었다고 볼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378만명의 육박하던 임금노동자의 숫자가 648만명으로 증가한 것에 비해

최저임금이 61.5%에서 44.6%로 낮아지고 이러한 문제를 위한 노동조합인

한국 노총은 정치적 중립성을 포기한체 유신체제에 밑으로 들어가 있었습니다.

고도성장의 이면에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열악한 작업환경에 시달리면서

침묵만을 강요당해온 노동자들은 하나의 사건을 계기로 반전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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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은 통일사에 재봉사로써 일을 하였는데 그주변은 500여개의 제조업체가 모여있었습니다. 대부분이 여성이였던 노동자들은 아주 좁은 공간에 햇빛이 안들고 환기가 안되는 곳에서 14시간 이상씩 초과근무를 하여도 초과근무수당을 제대로 받지 못하였습니다. 전태일은 이들의 열악한 환경들을 보며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노동근로법을 알게 됬지만 이법이 제대로 실행되지 않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이에 주변 노동자들과 함께 1969년 '바보회'를 만들고 노동조건 실태를 조사하여 개선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경제성장이 우선이었던 정부는 그 의견을 묵살였고. 이에 1970년 평화시장에서 시위를 벌이기로 하였으나 경찰의 제지로 시위가 무산되려고 하자 자신의 몸에 휘발유를 두르며 이렇게 외치며 분신하였습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
"내 죽음을 헛되게 하지말라!"

이후 전태일의 죽음은 최소한의 법적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의 현실을 고발하여 사회적으로 노동문제에 대한

관심을 급속도록 높이고, 노동자들 스스로에게 인감임을 자각하고

인간다운 삶을 향한 투쟁에 나설 용기와 힘을 북돋아 주었습니다.

1980년대


1987년 6.29 민주항쟁에는 노동자 요구가 반영되지 않았고

80년대 초반에 위축되었던 노동운동이 활발해지면서 7월 부터 민주노조건설,

임금인상, 근로조건 개선 등을 요구하며 민주화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시작은 울산 현대그룹노조연합으로부터 시작하여

부산과, 거제 옥포 대우조선 노동자들이 길거리 시위를 전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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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서 이석규 노동자가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노동자들의 투쟁이 이석규 열사 투쟁으로 전환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대대적인 탄압을 시작하여 파업 농성자에 공권력을 투입하여

노동자들을 강제 해산과 대규모 구속을 시켰으며 제3자 개입, 위장취업,

좌경용공 등의 여론을 펼처 노동자들의 투쟁을 고립시키려 했습니다.

하지만 노동 운동은 수도권 중소기업과 비제조업으로 확산되며

운수, 광산, 사무, 판매 서비스 등의 직종에서 파업투쟁이 지속되었습니다.

이로인해 민주노조결성, 어용노조의 민주화, 임금인상 등의 성과를 성취했으며

이후 전국노동조합협의회의 건설의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원래 한번의 글로 안되면 2개의 글로 마무리를 지을려고 했는데

그렇게 못했네요.. 앞으로 글을 쓸 때는 간단히

한개의 사건만 또는 한명의 인물에 대해서만 역사글을 써야겠어요..

이렇게 길어질줄은 몰랐습니다..

지금까지 Min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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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한 번 쯤은 알아두어야 하는 내용이었는데 이렇게 정리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잘 읽고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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