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에 내가 미쳐 - 천수만 모섬, 보름달 아래서!

in #kr6 years ago (edited)

언제 누가 지었는지 알 수 없거나, 만든 이 스스로 이름을 밝히지 않아 작자미상으로 남아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노래들이 있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도 그런 노래다. 이 노래 첫 소절을 모른다면 한국인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누구나 어디선가 들어본 가락이다.  그치만 대부분 첫 소절만 알고 전체 가사는 모른다. 인터넷 검색으로 확인하니 전체 가사는 다음과 같다. 

달아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저기 저기 저달 속에 계수 나무 박혔으니

옥도끼로 찍어내어 금도끼로 다듬어서 

초가삼간 집을 짓고 양친 부모 모셔다가

천년 만년 살고 지고 천년 만년 살고 지고 

여름밤 보름달이 뜨기라도 하면 아버지께선 하늘을 바라보며 그 노래를 (앞 소절만) 흥얼거리셨는데 하루는 아버지께 물었다.    

- 근데 이태백은 누구에요? 

- 중국 시인이란다. 술에 취해 물속에 뜬 달을 잡으려다 빠져 죽었다고 하지.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아버지께서 말씀해주신 이태백의 죽음에 얽힌 사연은 시인이 ‘술’과 ‘달’을 무척 좋아했더래서 생긴 전설. 실제 이태백은 병사했다고 한다. 아무튼 술과 달을 사랑하며 중국 곳곳을 방랑했던 그의 이야기는 고교시절 술을 배우기 시작한 나를 매료시켰다. 오죽하면 친구들과 막걸리를 마실 때도 그의 시를 읋곤 했을 정도니. 

근데 술이 있는 곳이면 시장통이든 저잣거리든 어디라도 좋지만 - 밝은 달 아래, 바닷가 절벽, 한적한 누각에서 술 마시는 것보다 더 멋진 풍류가 있을까? 이태백도 <월하독작>이란 시에서 달빛 아래 홀로 술 마시는 즐거움을 찬탄하지 않았던가? 물론 마음 맞는 벗과 함께 라면 더없이 좋을시고!   

천고의 시름이 씻어지도록 / 한자리에 연거푸 술을 마시네.

좋은 밤 얘기는 길어만 가고 / 달이 밝아 잠에 못 들게 하네

취하여 고요한 산에 누우니 / 천지가 곧 베게이고 이불이어라.   

그래, 그날의 여행은 풍류에 미치고 싶은 일념으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지난해 여름 서해안 임해관광도로를 지난 적이 있어. 모섬이란 섬을 우연히 만났는데, 산이 바다로 잦아들다가 갑자기 솟구치면서 생긴 조그만 섬이야. 육지에서 목조다리를 건너 면 섬으로 이어져. 봉우리가 높지도 않고 마루가 편평하게 깔린 전망대가 있어. 북쪽으론 간월암, 남쪽으론 어사리, 맞은편으론 안면도가 마주 보이는 명당이지. 게다가 절벽 아랜 일몰 사진으로 유명한 천수만이니 저녁놀을 감상하기에도 좋은 장소지, 언젠가는 그 섬에 다시 가서 밤을 보내고 말거야!   

한 여름의 호프집에서 내 얘기를 듣던 Y가 날짜를 확인하더니 주말에 보름달이 뜨니 이번 주에 당장 떠나자, 라며 재촉했다.    

- 좋아, 그럼 내가 텐트, 버너, 코펠 등등 야영장비는 다 챙겨갈게.  넌 먹고 마실 걸 준비해.

- 알았어, 마침 어머니께서 담근 오디주가 있던데 그것도 챙겨가야겠다.    

풍류에 목마른 도시인. 우리는 보름달이 뜬다는 주말 서울을 떠나 서해안으로 향했다.  먼저 태안 신두리 사구에서 낮 시간을 다 보낸 뒤 해질 무렵 한산한 시간대에 맞춰 충남 홍성의 속동 전망대 주차장에 도착했다. 날은 어둑해도 작년에 왔던 터라 모섬으로 넘어가는 길은 환했다. 우선 배낭 메고 송림 지나 목조다리를 건넜다. 전망대 데크엔 예상대로 아무도 없었다. 

완전 무인도구나! 

너른 전망대 마루 한 켠에 텐트를 치고 매트를 깔고, 밥도 짓고 찌개도 끓였다. 소나무 가지 사이로 우리를 엿보던 달이 덩실 덩실 위로 솟아올랐다. 나는 랜턴을 껐다.   

- 불은 왜 꺼?

- 이렇게 환한데, 보름달에게 미안하잖아!

- 그렇지! 달에게 미안하지.   

풍류가로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Y도 맞장구를 쳤다. 이제 슬슬 오디주를 꺼내 마셔볼까? 분위기에 어울리는 술병도 아니고 술잔도 없지만, 뭐 어때! Y의 어머니께서 1.5리터 맥주 페트병에 담아두셨다는 오디주를 코펠에 콸콸콸 따랐다. 우리는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술 한 방울이라도 흘릴까봐 살짝 잔을 부딪곤 단숨에 들이켰다, 벌컥. 

.

.

.

5초 후. 우리는 달밤 아래 데굴데굴 뒹굴었다. 마치 사약이라도 마신 사람처럼. 켁, 컥, 켁. Y가 어머니 몰래 가져왔다는, 1.5리터 페트병에 든 건  ‘잘 익은 오디주’가 아니라 ‘잘 익은 조선 간장’이었던 것이다. 이미 간장은 목젖을 넘어갔고 그 짜고 강렬한 맛이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으니....달밤의 풍류는 그걸로 끝이었다. 일단 랜턴부터 켜, 물, 물, 물!   

풍류에 너무 미치면 후각이 마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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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jangjjangman 태그 사용시 댓글을 남깁니다.)
호출에 감사드립니다! 즐거운 스티밋하세요!

풍류량들은 대부분 술을 사랑하는 가봐요~~

둘이서 마시노라니 산에는 꽃도 피었어라
한 잔 한 잔 기울이면 끝없는 한 잔
취해 나는 이만 자려니 그대는 돌아가시게
내일 아침 술 생각 나거든 거문고 안고 오게나
- 이백

술 빠진 풍류를 본 적이 없군요 ㅎㅎㅎ

캬~ 분위기 좋았는데 그놈의 조선간장이 다 버려버렸군요..우선 냄새부터 맡앗어야 하는데..ㅠㅠ

오디주만 믿고 다른 술은 챙겨 가지도 않았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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