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운의 원폭희생자 이우

in #kr6 years ago

1945년 8월 6일 불운의 원폭희생자 이우

좀 거슬러서부터 얘기를 시작하면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를 점거했던 일본군 장수의 이름이 모리 데루모도. 우리 식으로 읽으면 모리휘원이다. 그가 이끌고 온 병력 규모는 약 3만명. 선봉대인 소서행장이나 가등청정의 부대보다도 많다. 그의 본거지가 바로 히로시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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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히로시마에 거창한 성을 쌓고 위세를 자랑했지만 덕천가강이 정권을 잡는 결정적 계기가 된 ‘관원전’에서 풍신수길의 아들 편을 들면서 적잖은 타격을 입는다. 이때 히로시마는 복도정칙이라는, 임진왜란 때 충청도를 장악했던 일본군 장수의 수중에 넘어간다. 히로시마는 그 시절에도 상당히 중시되는 지방이었고 쟁쟁한 호족의 본거지였다. 2차대전 무렵 그 중요성은 더욱 커져 있었다. 한때 일본군 대본영이 자리잡은 적도 있었고 미쓰비시를 비롯한 군수공장들도 집결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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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오사카와 도꾜같은 대도시들이 미군의 공습으로 쑥대밭이 되는 가운데 히로시마는 별탈없이 무사했다. 히로시마 뿐 아니라 교또나 고쿠라 등 몇몇 도시들도 그랬다. 그 도시들의 공통점은 평지에 넓게 펼쳐져 있었다는 점. 일본에 원자탄 맛을 보이리라 결심한 이후 미국 정부가 계산하고 있었던 것 중 하나는 폭탄의 위력을 잘 볼 수 있는 지형적 조건이었다. 즉 도시가 어느 정도 쑥밭이 되는지 그 위력을 잘 관찰할 수 있고 폭탄의 위력이 극대화될 수 있는 도시를 찾았던 것이다. 히로시마는 그에 잘 들어맞았고 원폭 투하지 1순위에 오른다. 그리고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상공에는 버섯 구름이 솟았다.

히로시마원폭버섯구름.jpg

이 폭탄의 위력이 어땠는지를 따로 설명할 생각은 없다. 살아서 지옥의 유황불을 목도한 사람은 히로시마 사람들이 처음이었으리라. 최소 7만 최대 10만 명의 목숨이 재가 되거나 온몸이 타들어가는 고통 끝에 죽어갔다. 사망자는 일본인들만이 아니었다. 포로수용소에 있던 미군들 상당수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2만 명에 달하는 조선인 노동자들도 히로시마의 원귀가 됐다. 그리고 거기에는 특이한 사람 하나가 끼어 있었다. 이름은 이우. 조선의 왕족이자 일본의 공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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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공작.jpg

나무로 깎은 인형들같이 무력했던 대한제국 황실에서 그나마 사람 비슷한 존재로 쳐 준다면 의친왕 이강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의친왕 이강은 “아버지보다 훨씬 못하고 멍청한” (순종에 대한 외국인들의 평) 형에 비해 훤칠하게 잘생긴 미남자에 한성깔을 넉넉히 하던 황족이었다. 미국 유학 도중 미국 처녀와 미국 총각 사이에 삼각 관계를 이뤄 결투를 벌였다가 실신하여 안그래도 속시끄럽던 미국 주재 조선 공사관을 발칵 뒤집었고 공사관이 10년은 쓸 돈을 미국 여행에 다 탕진해 버린 개념 없는 황족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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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는 3.1항쟁 이후 거처를 빠져나와 상해로 망명을 시도한다. (물론 여기에는 도박 빚으로부터의 도피 여행이었다는 일설도 있긴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가 썼다는 친서의 일부는 그래도 전주 이씨 왕가의 마지막 일렁임 정도로 봐 주기에 넉넉하다.

“..... "나도 한국의 一民(일민; 한 국민)이라 차라리 한국의 독립된 한 서민이 될지언정 일본의 황족이 됨을 원치 않는 바이며 반드시 임시정부 여러분과 동심하여 여러 동포의 고심하는데 만분의 일이라도 보조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본 경찰에게 뒷덜미를 잡힌다. “전하 어디로 가시무니까. 원위치노 하시무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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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친왕은 이후 다시 개념없던 시절로 돌아가 주색잡기로 평생을 보낸다. 그 둘째 아들이이우였다. 일본에 고분고분했던 형과는 달리 이우는 일본을 병적으로 싫어했다. 당시 일본 귀족들처럼 일본의 군사 교육을 받고 일본군 장교로 임관했지만 누구와 싸움이라도 할라치면 바로 조선 욕설을 퍼부으면서 팔뚝을 걷어부치던 다혈질이었고 “조선은 독립할 것이다.”라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다닌 몇 안되는 조선인이었다. 물론 그런 말을 한다고 고춧가루물을 코로 들이킬 일이 없는 신분이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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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패망한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미국도 소련도 가만있지 않을 것이니 조선이 걱정”이라는 탄식을 하며 중국 근무 때는 항일유격대와도 비밀 접촉을 했다는 (소문이 있으나 증거로 확인되지 않았음) 이 왕족은 1945년 6월 ‘본토결전’을 위해 일본에 배치된다. 그 부임지가 하필이면 히로시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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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음식조차 싫어했고 일본 여자와 결혼 못하겠다고 버팅겨 조선인과 결혼한 왕자는 본토 결전의 총알받이가 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지만 결국 히로시마에 가야 했다. 그리고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여름. 차를 타지 않고 말을 타고 출근하겠다며 고집을 부려 말 위에 올라탄 그는 버섯 구름과 그 뒤를 이은 태풍에 휘말린다. 온몸에 화상을 입은 그는 다른 이들처럼 지옥같은 고통에 시달리다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이 열린 건 1945년 8월 15일 서울운동장 즉 얼마 전까지의 동대문운동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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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그의 장례식은 원래 좀 일찍 열릴 예정이었지만 오후로 늦춰졌다. 그것은 ‘덴노 헤이까’의 특별 방송 때문이었다. 바로 일본 패망과 조선 해방을 뜻하는 무조건 항복 방송. 장례식 직전 일본의 패망 소식을 들은 그의 혼백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 장례식은 일본 육군장(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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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뜻과 무관한 삶을 살았지만 끝내 그 삶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던 한 기구한 왕족의 사연을 통해 때로 일 개인이란 얼마나 무력한가를 돌이켜 본다. 이우는 일본의 공작이었고 일본군 중좌로 죽었지만 ‘친일파’로 규정되지도 않았다. 그나 그의 아버지 의친왕이나 일종의 ‘볼모’로서 자신들의 적극적인 의지가 적었다고 판단된 탓이다. 그래도 1945년 8월 6일 자신의 몸을 불태우던 버섯구름의 날이 돌아오면 저승의 이우나 아버지 의친왕은 자신들의 삶을 바꿀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들을 돌이키며 안타까와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그 계기들을 놓쳤고 자신들이 싫어하던 자들의 일원으로 죽었다. 이건 꼭 왕족만의 문제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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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ank you....

잘 보고갑니다. 다음 글을 기대하면서...
오늘도 행복한 하루되세요....^^^^

감사합니다 ^^

개인적으로 왕족을 인정하지 않지만, 그래도, 왕족 중에 가장 아까운 사람 아니었나 싶습니다.

조선 왕족 중에 독립운동에 헌신한 사람이 몇 명만 있었어도 오늘날 경복궁에는 황제 폐하가 계실 지도


그게 비단 왕족들만의 문제겠습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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