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도 둥글다

in #kr5 years ago (edited)

축구공도 둥글다 역사도 둥글다

1966년 이탈리아를 ‘떡실신’시키고 월드컵 8강 진출 기적을 일군 이래 남한은 축구에서 북한 콤플렉스에 시달려야 했다. 아시아의 호랑이를 자처하면서도 북한이 출전할 법한 대회는 기를 쓰고 피했고 외나무다리에서 만날 양이면 맞붙었다가 깨지는 것보다는 다른 팀한테 밟히는 쪽을 택했다. 1974년 테헤란 아시안 게임에서 북한을 피하기 위해 두 번씩이나 의도적으로 상대방에 져 준 일은 ‘대한민국’ 축구의 흑역사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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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남북대결은 아시아 청소년 축구 대회(오늘날의 U20)에서 펼쳐졌는데 남한이 북한에게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또 얼마 뒤 다시 맞붙은 남북대결에서 남한 청소년팀은 오늘날 쌀딩크로 이름 높은 박항서가 깡다구를 과시하며 북한 선수들 기를 팍팍 죽이는 가운데 승부차기로 남북대결 첫 승리를 거뒀다. 나아가 1980년 아시안컵 A매치에서도 한국은 북한을 2대1로 격파하면서 완전히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는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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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북한 축구의 저력도 만만치 않았다. 1982년 8월 아시아 청소년 축구 동부예선이 벌어진다. 아내와 딸을 미국에 이민 보내고 홀로 남아 한국 축구의 88년 올림픽 메달을 지켜보겠다는 각오를 불태우던 (동아일보 1982년 2월 26일) 박종환 감독이 이끄는 한국 청소년팀은 북한 청소년팀을 맞아 역전했으나 5대 3으로 패한다. 거기에 중공 (당시 이름은)에게도 져서 3위를 차지하지만 1983년 멕시코 청소년 대회 출전의 꿈을 빼앗기고 말았다. 아시아 동부지역 2팀과 서부지역 2팀이 풀리그를 벌여 1위와 2위 팀이 출전하는 시스템이었으니 3위에는 해당사항이 없었던 것. 마지막 대회는 그 해 12월에 예정돼 있었다.


팀의 주력 공격수 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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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사이에 빅 이벤트 하나가 있었다. 요즘은 상당히 줏가가 떨어졌으나 당시만 해도 온 나라가 들썩이던 아시안 게임이었다.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이 대회는 테헤란과 방콕에 이어 세 번째 남북대결이 펼쳐졌던 대회였다. 그런데 축구는 영 죽을 쑤어서 예선에서 일본에 깨지고 탈락해 버렸다. 하지만 북한은 당당히 4강에 진출했고 쿠웨이트와 자웅을 겨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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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축구가 본격적으로 기지개를 펼 무렵이었다. 사우디, UAE, 카타르, 쿠웨이트 등이 본격적으로 아시아 축구에 명함을 내밀 때였는데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들의 오일 머니가 더 힘을 발휘했다. 명확한 증거는 없으나 그들의 돈은 선수들 훈련 외에도 엉뚱한 곳에 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중동팀만 만나면 심판들은 중동팀의 열 두 번째 선수가 돼 상대방 선수들과 응원단의 혈압을 대기권으로 높여 놓기 일쑤였던 것이다. 쿠웨이트 전의 태국 심판도 은근히 그런 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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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후반전에 한 골을 넣어 1대0으로 앞서 나갔는데 종료 10분을 나기고 태국 주심이 휘슬을 불었다. 페널티킥. 북한 선수들은 난리가 났다. 거기까지는 당연한데 본부석에 있던 북한 임원들이 심판 교체를 요구하며 한바탕 소란을 피운 건 좀 불길한 조짐이었다. 잠시 후 속개된 경기에서 쿠웨이트는 침착하게 페널티킥을 성공시켜 연장에 돌입했고 결국 3대 2로 쿠웨이트가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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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문제가 터졌다. 공을 들고 퇴장하던 태국 주심을 향하여 북한 선수들이 달려가더니 주먹과 발길질을 퍼부은 것이다. 태국 주심의 얼굴에서는 금새 피가 터졌다. 인도 경찰이 곤봉을 들고 그라운드로 달려나왔고 흥분한 선수들과 옥신각신하는데 북한 벤치의 스태프들과 본부석의 점잖은 옷 입은 사람들이 달려 나왔다. 선수들을 화급히 말리려는가 싶었다. 손에 손에 피켓과 의자를 들고 달려나오는 게 좀 이상하다 싶었지만.

북한 여자대표팀의 심판 폭행 당시

그런데 그들은 선수들이 아니라 태국 심판과 인도 경찰에게로 향했다. ‘조국’의 승리를 도둑질한 도적을 토멸하듯 의자가 날아가고 피켓으로 찍어댔다. 경기장에 있던 수만 명의 인도인들이나 경기를 지켜보던 수억 아시아인들은 북한 선수단의 ‘혁명적 본때’에 경악하게 된다. 축구에서 난투극이 벌어지는 것이야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한국팀도 1960년 심판을 폭행했다가 몰수패 당한 적은 있다) 그 정도로 한 선수와 임원들이 일치단결하여 심판을 공격하는 행위는 지금껏 본 일이 없거니와 심판이 피신한 뒤에도 북한 선수단은 그라운드에 앉아서 농성까지 벌였다. 인도 경찰 4명이 중상을 입고 나동그라질 만큼의 심각한 폭력 사태였다

언젠가 동아일보 주성하 기자가 2002년 아시안 게임 때 북한 응원단들이 ‘장군님이 비 맞고 계신다’면서 아우성을 친 사건에 대해 설명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북한에도 외부에 초상화 다 걸어 놓고 비오면 다 맞습니다. 비 맞는다고 딱히 신경 쓰지도 않아요. 내 생각에는 버스 타고 가며 무심히 보다가 누군가 한 마디를 한 겁니다. ‘장군님이 비 맞고 계시네.’ 별 뜻 없이 누가 입 밖에 낸 거예요. 또 이 말을 듣고 누가 ‘어디 어디’ 했을 거고, 누군가 비통하게 외쳤을 거예요. ‘이게 무슨 일입네까’ 그러면 누군가 차 돌리라우 했을 거고, 하나가 돌면 다른 차들은 무슨 영문인가 따라 돌다가 누군가 달려가면 내려서 뛰는 겁니다. 거기서 뒤처지면 무슨 불이익이 있는지 북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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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델리에서도 그랬을성 싶다. 처음에는 흥분한 선수들의 가벼운 폭력 후 경고나 출장 정지 정도로 끝나 버렸을 일이었겠는데 여기서 조국의 부당한 패배를 가져온 심판에 대한 응징을 주저했거나 망설이다가 다른 사람 다 나섰는데 자기만 점잔빼고 앉았으면 안되지 않는가 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을 듯하다. 그렇지 않다면 본부석에 있던 고위 임원들까지 피켓 들고 뛰어내릴 이유가 뭐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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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미증유의 폭력 사태로 손해를 본 건 북한이었다. 당장 북한은 3,4위전 출전 기회를 박탈당했고 아시아 축구연맹, AFC는 노발대발하며 폭력 가담 선수와 임원을 영구 제명할 뿐 아니라 2년간 모든 국제 경기 대회에 북한 출전을 금지시킨다고 결의했고 FIFA는 이를 받아들였다. 1983년 한국을 누르고 따냈던 멕시코 세계 청소년 축구 아시아 최종 예선 티켓도 물거품이 됐다. 이 티켓을 받아든 것이 북한한테 패해 분루를 삼켰던 박종환 호였다. 그들이 1983년 멕시코에서 어떤 전설로 남았는지는 우리가 익히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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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당의 유일 사상 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을 제기한 이래 북한은 유별나게 ‘주체’를 따지며 스스로 세운 벽 안으로 오그라들기 시작했다. 일례로 1978년 아시아 청소년 축구 대회 당시 북한은 참가팀 가운데 유일하게 영어로 자국 표기를 하지 않고 ‘조선’이라고만 큼지막하게 트레이닝복 뒤에 새기고 있었다. 중동세의 부상과 오일 달러로 인해 심판에게 피해를 본 나라는 북한 선수들은 매우 "그들 방식대로" 대응해서 태국인 심판을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 패 버렸고 결국은 스스로를 2년간의 고립에 빠뜨려 버렸다. 남과 북 중 먼저 세계를 놀라게 했던 것은 북한이었다. 월드컵 8강에 빛나는 축구 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북한은 세계의 존경을 받을만한 성장과 발전을 먼저 일군 나라였다. 한강의 기적에 앞서서 대동강의 기적이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변하기 시작했다. 뉴델리는 그 큼직한 변곡점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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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공은 둥글다. 그래서 어디로 굴러갈지 모른다. 역사 또한 마찬가지라면 지나친 말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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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델리의 참극 외 남과 북의 코믹하고도 비장했던 스포츠 대결사가 <딸에게 들려주는 한국사 인물전>에 실려 있습니다. 기승전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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