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최후의 날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의 죽음의 풍경
어려서 나는 원래 새벽반이었다. 새벽 6시면 일어나서 책도 보고 동네 앞산도 다녀오곤 했는데 1979년의 10월 27일도 산기슭을 배회하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동네 구멍가게 형이 뭔가를 열심히 찾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아마 아침 7시 반쯤 되었을 것 같다.
...
“뭐 찾능교?” 물었을 때 그 형의 답은 천만뜻밖이었다. “야 니도 빨리 집에 가서 태극기 찾아라 대통령이 죽었단다. 조기 달아야 된다.” 총알이 양 귓전을 뚫는 느낌이랄까 찌잉 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농담이라고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던 게, 워낙 그 형의 말이 진지했고, 태극기를 이미 꺼내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마징가 제트처럼 집으로 날아갔다. “대통령이 죽었답니더. 대통령이 돌아가셨답니더.,” 그 소리는 북괴군이 쳐들어왔다는 말과 동급의 무게로 집안을 흔들었다. 아침 TV 방송이 없던 시절, 온 가족은 라디오 앞으로 집결했다. 거기서 흘러나오던 아나운서의 침울한 목소리.
“차지철 경호실장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다투는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발사된 총에 박정희 대통령 각하가 서거......” 그에 따르면 대통령 앞에서 중앙정보부장과 경호실장이 싸우다가 총을 빼들었고 쏜다 안쏜다 하다가 우연히 발사된 총알에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미친 놈들 대통령 앞에서 총 들고 싸웠다는 거야?” 그때 아버지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누가 죽였을 수도 있고.” 움찔 눈이 튀어나올 만큼 놀란 나를 무시하고 아버지는 한 마디를 더 하셨다. 그것은 5.16 쿠데타 당시 대통령 윤보선이 했다는 그 말과 같았다. “올 게 왔구만.”
학교 분위기도 뒤숭숭했다. 나처럼 라디오 뉴스라도 듣고 온 아이들도 있었지만 괴뢰군이 쳐들어와서 박정희 대통령 목을 따 갔다는 아이들도 있었고, 서거는 잘못된 소식이고 대통령은 살아 계시다고 책상을 치는 아이도 있었다. 그 논쟁은 선생님이 들어오시면서 간단하게 정리됐다. 반장이 일어서 차려 경례를 하고 선생님의 짤막한 인사를 듣고 앉는 것이 정석이었는데 차려 경례 후 선생님이 눈물의 훈화를 한 시간 내내 늘어놓은 것이다. 기억나는 멘트는 대충 이러하다.
“하늘이 무너져도 이렇게 무너진단 말이냐. 땅이 꺼져도 이렇게 꺼진단 말이냐. 아직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대통령이 돌아가셨다. 우리 모두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죽었다. 터무니없는 늦둥이로 어머니 뱃속에 들어서는 바람에 창피를 못이긴 어머니가 간장 한 됫박을 들이키고 몇 척 높이의 언덕에서 뛰어내리기도 했건만 끝끝내 그 저지를 물리치고 세상 빛을 본 지독한 아이였고 소학교 선생을 하다가 일본 교장의 횡포에 분격하여 책상 한 번 엎어 준 것까지는 좋았는데, 독립군으로 싸우기 위해 만주로 간 게 아니라 ‘큰 칼 찬’ 군인이 되기 위해 만주로 가고, 일본 육사 입학을 위해 혈서도 썼던 묘한 청년이었고, 좌익이었던 형의 영향으로 남로당에 입당도 하고 군사 총책까지 맡았으나 숙군 와중에서 자신의 조직 전체를 고해 바치고 살아난 군인이었고, 육군 소장으로서 “다시는 나같은 불행한 군인이 없기를” 바라면서 정권을 탈취한 후 18년 반을 ‘재위’했던 철권의 독재자가 죽었다.
돌이켜 보면 4학년 담임 선생님의 정신 상태는 김일성이 죽었을 때의 북조선 인민들과 별 차이가 없었던 것 같다. 괜히 슬픈 척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흘낏 선생님을 봤을 때 그는 눈물을 철철 흘리고 있었다. 그 눈물은 전염되었고 반 아이들 대부분이 엉엉 울었다. 나는 솔직히 다리가 아파서 울었고. 국기 하기식에 애국가가 울리면 축구를 하다가도 공을 들고 우뚝 서고, 길거리에서도 숱한 인파가 부동자세를 취해야 했을 무렵, 대통령의 사망 소식에 조기를 달 태극기부터 찾았던 구멍가게 형은 그 살벌한 시기에 바싹 엎드린 채 조금이라도 튀지 않으려고 애쓰던 민초들의 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애매한 것은 우리 아버지다. 언젠가 “올 게 왔구만.”의 의미는 짐작이 간다. 부마항쟁이 가장 거세게 벌어졌던 남포동에 직장을 두셨던 분으로서 조만간 무슨 일이 나도 날 것 같은 분위기를 감지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에 대한 비판적 언사도 종종 입에 담으셨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날 그랬던 아버지는 오늘날 박정희에 대한 험담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시는 열렬한 박정희 팬이 되어 계시다. “지금 네가 차나 굴리고 아파트씩이나 사는 것이 누구 덕인 줄 아느냐?”며 가슴을 치실 때는 그 진정성(?)은 화산처럼 뜨겁다.
아주 개인적인 의견을 덧붙여 본다면 나는 그를 조선의 세조에 비한다.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고 그 조카를 죽이고 동생 여럿을 죽이고, 형수의 묘를 파헤치고, 사육신 이하 여러 신하들의 목숨을 빼앗았던 폭거를 자행했던 왕. 하지만 그 특유의 카리스마로 조선의 기틀을 다잡기도 했던 왕. 그러나 태종처럼 자신을 도운 척신들마저 인정사정 없이 제거하는 과단성을 보여 주지 못한 채, 훈구파로 대변되는 기득권을 형성시켜 후대의 모순을 잉태시키고 키워 나갔던 왕.
그가 죽은 지 40년이 되어 가지만 아직도 우리는 그의 자장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의 치세에서 형성된 권위주의 문화, 하면 된다 정신, 멸공통일 초전박살의 이데올로기, ‘닥치고 00’라는 웃기는 구호에서 나타나는 폭력성 등등은 유구하고도 면면하다. 여전히 그의 추모식에 현직 도지사가 갓 쓰고 울먹이고 태극기 부대에서 그는 반인반신이다. 그의 생물학적 딸이 말아먹은 나라에서도 그러하다. 또한 그린벨트며 의료보험이며 중화학 공업이며 우리는 그가 세워 놓았던 토대에서 성장하고 서 있는 측면 또한 상당하다고 여긴다. 문제적 인물 같다. 후일 역사는 그를 어떻게 평가할까.
당시 중학교 3학년이던 저에게, 1979년 10월 26일 등교 중에 육림고개의 시장 상인들이 크게 켜놓은 라디오 뉴스가 내뱉던 소식 중에서, 낯설은 한 단어가 들어왔습니다.
많은 걸 기억하시네요.. 하긴 제 머리에도 이즈음의 많은 일들이 흑백으로 남아 있습니다만
단군이래 처음겪은 일들이 어디 이뿐이겠습니까마는 ...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새벽
대통령의 죽음도 충격이었지만
북측의 도발이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어야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바로 계엄령 떨어졌으니......부산은 좀 분위기가 다르긴 했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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